일제 강점기 방송

경성방송국 드라마와 그 드라마를 이끌던 사람들/ 단일방송 시절

이장춘 2011. 7.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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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드라마와 그 드라마를 이끌던 사람들/ 단일방송 시절
  

 

방송드라마는 방송극이라는 이름으로

시험 방송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문사 최승일이 경성방송국 직원이 되어 스스로 글도쓰고

연출도 하고 라디오 극 연구회도 구성하면서 방송극을 방송했습니다.

 최승일님은 막내동생 최승희를 세계적인 무용가로 길러낸 주인공 이기도

합니다. 친구이기도 한 김영팔님 (뒤에 방송국 아나운서가 됨)과 신학박사로

여러 분야에서 명성이 높았던 이경손님등과 더불어 구성한 라디오

연구회는 경성방송국 방송극을 방송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고 

또 곧이어 조선극우회가 결성되어 이분들이 중심이 되어

방송극을 이어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조선극우회가

1925년에 최초로 방송한 새벽종입니다.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방송 드라마가 아니라

무대극에 약간의 손질을 가해서 방송으로 내 보냈습니다.  

효과음이 전혀없고 단순한 낭독식으로 그때까지 해 오던 방식의

무대극을 하면서 극을 시작하기 전에 극의 줄거리와 상활설명을 해서

청취자들에게 상황을 알도록 하고 극을 진행 하면서도 극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상황설명을 하면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게 하면서 방송을

했습니다. 방송극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 생소했고 연구를

하면서 방송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1977년판 한국방송사 참조)  

성우가 없을때라 영화나 연극 배우들이 방송에도
출연하고 연극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활동이

없을때라 영화나 연극계 등 연예게에서도 여성을 구하는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27년 2월 16일 정식으로 방송을 내 보냈지만 

처음에는 우리말 방송시간이 적었고 또 좋은 시간은 일본인을 위한 방송을

했다던지 또 방송국 사정이 어려워 출연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상황

에서 여러모로 어려운이 많아 방송극이 활성화 되기는 어려웠어도

 무선신극회, 경성 라디오 드라마 연구회, 경성방송극회,

조선 극우회, 토월회를 중심으로 방송극은

이어졌습니다. 

 

 

 

경성방송국이 발족하기 바로전 1922년에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토월회의

활동은 경성방송국 방송극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토월회 에서, 박승희, 이서구, 김을한 등이 중심이 되어 사실주의적인

신극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을때 윤백남을 비롯한 이백수 이월화,

 안석주, 이소연, 이혜경, 이정춘등이 초창기 방송극을 빛내 주었습니다.

1927년과 28년, 본격적인 연극운동이 일어나 산유회회, 종합 예술회,

 무대 예술협회, 화조회등의 많은 연극단체가 테어나 새로 발족한

 JODK 경성방송국 방송극을 방송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경성방송국 개국 첫해인  1927년 5월 23일

문호 입샌의 100년제 특집으로 방송된 인형의 집을

 비롯해서 경성 라디오. 드라마 연구회가김영팔 작 현해탄,

이경손 작 은행수, 춘향전 (옥중막) 여성, 베니스의 상인 (법정장면),

其夜, 등이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방송극은 최승일, 이경손, 김영팔 등

몇사람에 의해서 주도 되었고 이때 무선신극회, 조선극우회, 토월회,

조선 연극사등의 무대 연극 단체들도 방송극에 출연했습니다. 

 

1928년 10월 해체되었던 토월회가 제기하면서

박승희 작 혈육과 이대감 망할대감을 복혜숙, 서월영,

이소연, 석금성, 전옥등의 출연으로 우미관에서 공연을 까지

방송했고 29년 3월에는 톨스토이 작 부활을 3일간 연속 방송 했습

니다. 이때 카츄샤 역으로는 석금성이 출연했습니다.

 

 

1929년 4월 부터는 경성 라디오 드라마 연구회가

고리끼작 밤 주막과 3등선실, 카르멘, 味등을 연달아 방송했고

1931년 12월에는 토월회의 박승희가 경성방송극 협회를 창립하고

이듬해 1월 10일에 박승희 작 良夫를 강석연, 이소연, 왕인삼, 윤성민,

 강석제등의 출연으로 방송 하기도 했습니다. 이 방송극 협회는

박승희가 총지휘하고 김을한, 윤성민, 이소연, 김영팔,

박진, 강대일, 강석제, 강석연등을 고문으로 해서

출범했지만 얼마 안가 해체되었습니다.

 

1929년 12월 조선연극사 (취성좌 후신)가

새로 발족하면서 강홍식의 지휘로 비극한의 야곡,

몸은 혼자다 등을 강홍식, 이경환, 문일수, 권일청, 임종철,

이 애리수 아경설, 신은봉, 전옥, 나품신등의 출연으로 방송했습니다.

이시기에 방송극을 방송한 단체는 금조회, 태양회, 신극회, 소성회, 청답회,

등이 있고 신흥극장, 태양극장등의 극단들도 몇편의 방송극에 출연한적이

 있습니다. 이밖에 방송초기에 王順의 死, 玉汀의 설움, 멍텅구리,

死의 道,등을 방송했습니다.  이중방송 실시 이후의 얘기는

다음회에서 하겠습니다. 연극, 영화, 방송에 함께

출연한 복혜숙은 197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방송 할머니로 통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왕수복 월야의 강변-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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