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극 (드라마) / 제 2 방송시절
경성방송국에서 1933년 4월 26일
우리말 방송 전담 채널이 새로 생기고 방송시간도대폭 늘어났으며 우리말 방송이 활기를 띠면서 드라마 방송이 시간도 늘어나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때의 방송은 전적으로 청취료로 운영 되던 때라 청취자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어서 청취자들의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연예 프로그램이 중점적으로 방송되었고 드라마 프로그램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4월 29일의 특집방송에서 9시부터 30분간 싱작, 유치진 역의 약수를 조선 방송극 협회 소속인 이웅, 이만례, 이일광, 김영옥, 백성녀, 이석훈, 윤태림의 출연으로 방송된것을 시작으로 드라마가 자주 방송되었 습니다. 이때 방송 드라마와 관련된 많은 단체들이
1931년 7월 8일에 구성되어 경성방송국의 제2방송이 출범하면서 드라마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극 예술 연구회" 는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1939년에 일제에 의해서 해산되기 까지 방송 드라마에 크게 기여 했습니다. 유치진님을 비롯해서 뒷날 방송국 편성과장을 지내신 김진섭, 이헌구, 서항석, 윤백남, 이하윤, 장기제, 조희순, 최정우, 함대훈, 홍해성, 정인섭님이 주축이 되어 되었던 이 모임은 김광섭, 박용철, 이웅, 유형목, 임학선, 현정주, 신재홍, 조용만, 윤태림, 윤정섭, 고장환, 조이행, 김희창, 모윤숙, 노천명, 이무영, 김수임님 등 지금까지도 이름이 잊히지 않는 분들이 모임에 참여 하셨습니다.
이석훈님
1933년 제2방송이 실시되던 해 소설가로 방송국 아나운서이기도 했던 이석훈님의 주도로 서울 라디오 드라마 동호회가 구성되어 그해 6월에 체홉의 곰을 이훈 번안 이석훈 지휘로 방송하고 7월에는 약혼성립을 이석훈 지휘로 방송했으며 그 뒤로도 오스트로 프스키 원작 함대훈 개작으로 뇌우와 귀향, 오월동주등이 방송되었습니다. 이 무렵의 출연자로는 김복진, 방춘산, 김창기, 정린, 유옥엽, 이삼청, 이애라 등이었습니다.
1933년 토월회 소속이었던 극작가 김희창과 배우 윤성무, 연출가 박진 등이 참여해서구성한 "라디오 프레이 미팅" 은 해서 1933년 8월 29일 김희창작 노차부를 새롭게 선보임으로서 현대 라디오 드라마의 틀을 확립했습니다. 이때부터 방송극이 번역극의 틀을 벗어던지고
창작극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극작가나, 연출가 배우들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노차부가 방송된데 이어 9월 26일에는 박진 작 지휘로 양귀비의 죽음이 방송되었고 12월에는 철로상의 두사람이 방송 되었으며 1934년에는 빅톨 유고작 레미제라블이 박진 지휘 윤성민 주연으로 연 3회에 걸쳐방송했습니다.
프레이 미팅은 이후에도 박진 각색 지휘의 牧丹燈記 김용규작 은하에 흐르는 정열, 이운방 각색 장화홍련, 박진案 그들의 새봄등을 방송 하는등 활약했으며 출연진에는 초기의 토월회원외에 복혜숙, 서월영, 김선초, 김성운 박제행등의 배우들이 출연했습니다.
1934년 2월 극 예술연구회가 톨스토이의 부활을 함대훈이 각색해서 카츄샤란 이름으로 19일부터 22일까지 4회에 걸쳐 연속 라디오 드라마란 영칭으로 방송했습니다. 홍해성 지휘 함대훈 해설로 방송된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는 카츄샤에 김영옥, 네프류도프에 이웅, 그밖에 홍정숙, 김복진, 김창기, 신태선, 고장환등이었습니다.
1934년 일본 동경 유학중이던 박동근, 황순원,
김진수, 김동원, 김일영, 허남실, 주영섭, 마원영 김병기님이 "동경 학생 예술좌"를 창단하고 그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주영섭, 김동원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 9월 4일 제 2방송을 통해서 유진. 오닐작 주영섭 역 "절해에서"를 방송극으로 방송했고 또 9월 9일 밤 김영수 지휘 주영섭, 김진순, 김정호님 출연으로 방송된 골즈워터작 "태양"을 방송 했고 1936년 여름에도 주영섭작 연출 "날이 밝으면 비가 오십니다." 를 박동근, 마원영, 박경순, 임유영등이 출연으로 방송해서 학생들은 뒷날까지 방송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특히 김영수님처럼 일생을 방송드라마에 혼을 쏟은 분도 있습니다.
극 예술연구회가 1935년에 3회에 걸쳐 연속방송한
체흡의 앵화원(櫻花園)은 모윤숙, 노천명, 이헌구, 이정숙,이웅, 김복진님 등이 출연 해서 관심을 모았습니다. 여러 단체에서 많은 출연자들이 방송에 참여 한 가운데 방송국 편성원, 아나운서들이 직접 대본을 쓰고 드라마에 출연한 경우도 있어서 1935년 12월 2일 연말특집으로 제작된 新案債鬼防禦라는 드라마는 그때 제 2 방송과장이던 김정진님이 쓰고 이혜구, 이하윤, 이석훈, 남정준, 이계원님등이 순수 방송인들이 출연해서 방송을 내 보낸것으로 워낙 보수가 적던 방송국 직원들이 망년회 비용을 마련 하기 위해 실시한 방송이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방송 스탶들이 방송에 직접 출연한 최초의 일로 기록됩니다.
1929년 조선박람회에 이어 1936년에는 부민관에서 라디오 드라마
실연대회를 가져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눈과 귀로 체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일종의 공개방송 형식으로 드라마를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36년 5월에는 모처럼 방송극을 위한 라디오 현상 라디오 소설 현상모집이 있었습니다. 1등당선작은 없었고 2등 당선작은 이병호(李炳皓) 작 물장사와 그 아들, 3등은 최금동의 종소리 3등은 연은룡의 빛나는 청춘이었습니다. 이 무렵 이서구님을 비롯해서 김건, 박진, 유치진, 조일제, 함세덕, 이익, 김영춘, 이백수 등이 방송극을 위해서 활약했고 이색적으로 의학박사 김성진 (복혜숙의 남편)이 김백수란 필명으로 연출과 작품 부문에서 활동했으며 김일해, 김인화, 독은기, 복혜숙, 이금룡등이 활약했습니다. (1977년 판 한국방송사 P. 87 참조)
1937년 중. 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축되기 시작해서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방송은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면서 드라마도 크게 위축되어
명맥만 유지될 정도였습니다.
라디오 프레이 미팅을 제안하고 실천한 김희창님, 유학생신분으로 드라마의 지휘도 하고 출연도 했던 김영수님, 1930년대 중반부터 방송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여러분야의 방송에 힘을 기울였던 이서구님은 해방된 나라에서 196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지나면서 최고의 극작가로 혁혁한 공적을 남겼습니다. 한국방송작가 협회 창설을 주도한 이서구, 김희창님은 초대, 2대 방송작가 협회의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아래 1934년에 재직중이던 우리말 방송 직원들의 모습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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