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2차대전 마지막 격전장 청진방송국의 비극

이장춘 2011. 3. 27. 10:23

 

 

 2차대전 마지막 격전장 청진방송국의 비극
 
 
청진방송국은 우리나라 최북단에
자리 잡은 방송국으로 중국, 소련과 국경이
멀지않은 지역이어서 일본이 전략적으로 설치한
 방송국이기도  합니다.  지방방송국으로는 부산,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설치된 방송국이고 출력도 다른방송국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대출력 10Kw로 설치되었습니다.
 
고말산 중턱 동해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면서  청진 시내에서도
4 - 5Km나떨어진  지역이어서 시내 내왕이
쉽지도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이 청진방송국을
 2차대전 끝자락에서 소련군이 점령의
 첫째 목표로 삼아 격전장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두만강을 건너면서 곧이어 청진 앞바다에
나타나 제1 공격목표이기도 한 청진방송국에 함포사격을
가해서 방송의 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8월 13일에 이르러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방송국은 폭파되어 사산 조각이 되고 이 안에  있던 
 방송인들이나 일본군이 모두 산화하는 비극속에서 청진방송국은
사라젔으며 일본인 방송인과  가족을 포함한 40여명은
청진방송국장 부인 한 사람을 제외 하고는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의 자폭이라고도 하고
 소련군의 포격 때문이었다고도 하지만 그때
그 상황을 정확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청진방송국장 부인이 시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흥방송국까지 와서 그때의  얘기를 했지만 그 내용도 정확한 것은
 될 수 없었습니다. 책임을 맡았던 군 부대장이 한 말도 있지만
그도 직접 그곳에 참여한 것은 아니어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청진방송국에는 조선인 직원들도 있었지만
중경방송과 VOA방송등을 통해서 상황을 다소 알고 있었고
조선인은 일본에 협조하지 마라는 방송이 계속되는 상황속에서
사전에 방송국을 떠나 마지막 포격에 피해를 입은
조선 방송인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일에 관한 얘기가 별로
 없지만 일본 방송사는 청진방송국장 부인의 얘기를
토대로 해서 쓴 함흥 방송국장 얘기를 중심으로 방송사에
기록이 있고 또 일본 전사에는 군 부대장의 말을 중심으로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일본방송사에
쓰여 있는 얘기를 옮깁니다.
 
 

청진방송국에서 보면 그 밑에 등대가 세워져 있는 등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3일 이른 아침 8시
느닷없이 폭음이 터지고 대지가 진동했다.
이 폭음이 해군 함포사격이라고 알아 차렸을 때는
 방송국 근처에 사람들 그림자도 없었다.
 
이 무렵 청진 방송국 안에서는 일본인 직원과
그 가족 전원이 사색이 되어 모여앉아 피난을 가느냐.
사수하느냐를 놓고 경황없이 협의하고 있었다.  이제
방송기능을  상실한 방송국을 사수한다는 건 
 무의미하다며 걸어서라도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인 방송인들과 가족들은 공포에 질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참 서두르고 있을 때
뜻밖에도 약 1개 중대의 완전 무장한 전투태세를
갖춘 일본군 방송국 수비대가 닥쳐 들어왔다.
 
중대장은 눈을 부릅뜨며 일본인
방송국장을 불러 지금 소련군이 국경을
돌파하고 진격해 오고 있지만 일본군 주력부대가
급파되었으니 안심하고 방송국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인 직원들과 가족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란스럽던 함포사격의 폭음이
점차 사려져 가는가 싶더니 다음에는
소련군 지상부대의 총포성이 콩 볶듯 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접근 해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일본군
패주병들이 방송국 안에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소련군의 추격 탄은 더욱 격렬하게  방송국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태는 급박하였다.
 
이제는 연약한 처자식을 거느리고 걸어서
피란 가기란 어림없는 일이었다. 방송국장은 일본군
중대장에게 가족들만은 제발 트럭에 태워서
함흥방송국까지만이라도 피란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한마디로 거절하고
죽든 살든 군과 함께 행동 할 것을 명령 했다.
동시에 전 직원에게 무기 탄약을 나누어 주며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싸울 것을 명령하는 한편 그는 몇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방송국 폭파작업을 서둘렀다.
 
특히 가족들이 피난해 있는 지하 방공호에는
많은 폭약을 장치하였다. 직원들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일본병사들과 함께 밖에서 사력을 다 해서 싸웠고
전원이 사상당하고 말았다.
 
중대장은 폭파작업을 마치고 밖으로 뛰어나와
 직접 기관총을 잡고 박격포탄에 맞아 부하와 함께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사력을 다해 기어가더니 기어이
 폭파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처절한 폭음과 함께 40여명의
목숨이 청진방송국의 운명을 같이 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중상을 입은 방송국장 부인이
함흥방송국까지 찾아와 진술한 것이며 그 후 부인도
 절명하고 말았다 (일본방송사에서)
 
일본전사에는 군이 방송국에 간것은
방송국의 요청에 의해서 간것이라는 얘기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청진비극.mp3
2.8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