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경성방송국 우리말 방송 인맥

이장춘 2010. 12. 31. 17:55

 


 
경성방송국 우리말 방송 인맥
  
 
경성방송국 개국을 전후해서 들어온
방송인들은 방송국을 스스로 떠나고자 하는 분들이
있었고 또 방송 초창기 재정이 극도로 어려움을 겪게 되어
노창성이나 한덕봉등 필수요원만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인이 1930년 전후해서 방송국을 떠났다.
 
이때는 라디오 값이나 청취료가 비싸고 
1Kw방송으로는 청취권이 제한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편성내용도 일본인 위주여서 

청취자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위해   출력을 늘리고  일본인대상 방송과 

 한국인대상 방송을 분리, 방송 하고자 해서 마련

된것이   “전 조선 방송망 구성계획

이라는 것이었다.  

 
이계획에 따라 제 1차로 연희에 10Kw출력의
방송소를 세로 세우고 1933년 4월부터 조선인대상 방송과
일본인대상 방송을 분리 방송하면서 방송시간도 대폭 늘어넜다.
또 지방에도 방송망을 확장해서 1935년 9월 21일을 기해
부산방송국이 문을 연것을 시작으로 평양, 청진, 이리,

함흥등지에 방송국을 설치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방송국 직원들이

많이 늘어났고 특히 1932년부터 우리말방송을 위한
방송인들을 늘려 나가면서  구성원이 많이 달라졌다.  이중방송의
우리말 책임자는 제 2방송과장이었다.  처음에는 제 2방송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당대의 영화, 연극, 만담등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윤백남을 제 2방송부장으로 내정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발령장은 제2방송과장이었다. 
 
이로부터 제2방송과장이 우리말 방송의
 책임자가  되었다.  윤백남 과장은 얼마 안있어
동지인 김정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방송국을 떠났다.
김정진이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이다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심우섭이 세번째 제2방송과장이 되었다.
심우섭은 상록수로 널리 알려졌고 방송국에도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심훈의 맡형이다.  심우섭은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심우섭이 제2방송과장을 하고 있을때
청취자가 많이 늘어나 조선방송협회의 재정상태가
호전되어 조선어 방송에 더 힘을 기울이기 위해 제2방송부가
신설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2방송 프로그램에
일본어를 섞어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을 하라는
총독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심우섭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얼아 안 있다가 심우섭은 방송국을
떠났다. 제 2빙송부장은 공석이 되고 이혜구가 잠시
직무대리를 하다가  함흥방송국장으로 있던

노창성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제2방송부는 1942년 말부터 터진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그 종말을 고하고
제 2방송부장이던 노창성은 오랫동안 몸담아 오던
방송국을 떠났다. 이때부터 방송부 안에 제 2방송과,
또는 제 2보도과라는 이름으로 우리발 전담부서가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밎물려 
우리방송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가지 우리말 방송 책임자 애기를 했다.
이 기간중의 제2방송 구성원들을 보자. 이옥경, 마현경,
최승일, 김영팔등 제 1세대 방송인들이 물러난자리에  
1931년 남정준. 박충근이 들어왔다.
 
 제 2방송을 하기위해 1932년에
세로 방송국에 들어 온 사람은 이혜구, 이하윤,
이석훈, 최아지, 김문경등으로 이들이 이중방송의
제 2방송 초창기를 이끌어 간 사람들이다.
 
조금 있다가 김준호, 정문택아나운서가 
들어왔고, 1935년에는 우리 방송사상 아나운서로
오랫동안 혁혁한 공적을 남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계원이 들어왔다.  이 무렵에 들어온 송진근도  널리  알려진
아나운서였지만  1943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방송국을
떠났다. 이 무렵 아나운서로 들어와 편성원으로있던 양제헌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핵심인사로 옥살이를

했기에 방송국을 떠났다.  

 

  

1935년 문단에서 널리 알려진 

김억이 들어와 방송편성일을 했고 

1940년에는 김억님과의 문학동인 김진섭이

들어왔다.  또 신문사에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사건이 있던 무렵 1937년에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언론계에서 널리 활약하던 이정잡이 방송국에 들어 왔다.

이 분들은 해방정국에서 조선방송 협회장, 편성과장,

업무과장등 중책을 맡아 방송국을 바르게

이끌어 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부터 40년 사이에 방송국에 들어와 
활동 하던 사람중에 아직도 우리 귀에 익은 이서구,
고재경, 이현, 박용신, 송영호, 이익령, 민재호가 있다.
1943년의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은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운동이고 또 이 운동은 방송인의
구성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이 운동으로 빈 자리를 1943년에  

공개채용을 통해서 들어온 문제안, 윤길구,
이덕근 장운표, 홍준이 채웠다.  이분들은 그 다음해에
들어온 윤용노, 전인국등과 함께 해방 정국의
방송을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 아리랑 - 장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