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손목인, KBS 최초 전속 경음악단 지휘자
해방된 나라에서 국민들은 마땅히 부를 대중가요가 적었습니다. 대중가요의 시작이 일제강점기 때부터여서 일본 색에 젖은 노래를 부르고 듣는데 익숙해졌고 또 전쟁 중 일본의 전쟁가요가 많이 불렸기 때문에 그런 노래들은 더 이상 부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가수나 레코드사가 많은 때도 아니어서 그런 노래를 보급하는 일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방송국에도 대중가요에 조예가 깊은 직원이 없을 때라 이 땅에서 처음 대중가요가 불리기 시작하던 때부터 작곡활동을 했고 가수를 길러냈던 박시춘과 손목인에게 KBS 전속 경음악단 구성을 의뢰했습니다.
1947년 6월의 일이고 이로부터 전속가수도 선발했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공연활동을 하던 이예성, 김백희 같은 기성가수를 전속가수로 채용하고 송민도, 원방현, 옥두옥, 이계운 등 신인가수를 새로 모집했습니다. 또 방송국 에서는 1946년부터 작가 유호, 김영수를 직원으로 채용했는지라 이분들이 힘을 모아 노래를 작사하고 작곡해서 불렀습니다.
제일 먼저 나온 노래가 손목인이 작곡하고 김백희가 부른 아내의 노래였습니다. 아내의 노래는 6.25때 가사를 바꾸어 심연옥이 부르면서 시대상황에 맞아 떨어져 대 히트를 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국민가요 1호라고 불리는 자유의 종도 이때 손목인 작곡으로 제정 되었습니다. 이때 박시춘은 애수의 네온가, 청춘 브루스를 작곡해서 옥두옥이 불렀습니다. 방송도 하고 레코드도 제작해서 보급했습 니다. 그때 보급은 지금으로 말하면 KBS계열사와 비슷한 것으로 K.B.C 한국 방송문화협회라는 회사였습니다.
이때 KBS전속경음악단의 단장이던 박시춘, 손목인 두 분은 1913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특출한 재능을 지닌 분들로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작곡활동을 하신 분들입니다.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손목인, 박시춘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분들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 그때 그 가수들이 노래를 잘 불러주어서 손목인 박시춘도 그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1930년대 초에 시작된 박시춘과 손목인의 가요생활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져 왔습니다. 박시춘에 관한 얘기는 다른글이 있어서 생락하고 손목인 선생님 얘기를 좀 더하겠습니다. 박시춘님의 끝부분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손목인은 1913년에 진주에서 태어나 5살의 어린 시절에 서울로 왔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손득열로 제동학교를 다니면서 방정환선생님이 구성한 소년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때 교회 성가대에 참여하면서 현대음악에 접하게 되고 음악의 길을 걷기로 해서 일본 유학을 했습니다. 잠시 유학길에서 돌아와 인척 문호월의 도움으로 오케레코드에서 일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작곡한 노래가 타향으로 고복수가 불러 대 힛트했습니다.
이 노래가 대 히트를 하면서 대중가요를 하게 된 확실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곧이어 나온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노래로 발전했습니다. 1936년, 동경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한 후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했습니다. 이난영, 남인수, 장세정, 김정구, 고운봉, 이해연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손목인의 곡으로 연일 히트했습 니다. 대중가요와 더불어 재즈나 일본가요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폭넓은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작곡활동을 하면서도 1937년부터는 조선악극단의 지휘를 맡아 만주 일본등지를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지금 들리는 해조곡은 1937년 이난영이 불러 히트한 노래이고 아래 사진은 그 무렵의 모습입니다.
1941년에는 15인조의 손목인 악단을 구성해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까지 순회공연을 났습니다. 이때 단원 김백희, 이에성은 KBS전속가수가 되었고 남인수, 김정구, 박단마, 신카나리아, 황금심 등은 먼 훗날까지 최고의 가수 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KBS 전속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손목인악단(CMC)을 이끌고 활동했고 6. 25 전쟁 중에는 국군 제2군단 정훈공작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전쟁가요를 내 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 미국, 우리나라를 넘나들며 활동을 한 님은 1999년, 일본 출장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193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음악활동을 통해서 수많은 가요와 뮤지컬, 영화음악을 남겼습 니다. 오직 음악을 위해서 한평생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시춘님에 관한 얘기가 더 있습니다.
민중과 더불어 산 가요 한평생 박시춘
http://blog.daum.net/jc21th/17780298
1992년 6월 5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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