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1964년, 방송의 날을 맞아
10월 2일에 실시한 VOA 아나운서들의 좌담 내용의
전문을 올려 드립니다.
엠씨 강찬선(강창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0월 2일 오늘 우리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정하고
이것을 기념하는 방송의 날을 맞이해서 같은 방송인으로서
이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지금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에
종사하고 있는 직원 일동이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 나라 음악계의
선구자이시고 해방 직후에는 중앙 방송국에 편성 책임을
맡으시는 한편 직접 연주회, 또는 명곡 해설로써 방송 제 1선에서
활약하시다가 지금 여기 VOA에서 번역의 중책을 맡고 계시는 박경호씨,
한국에 계실때는 재담 만남가로서 명성을 떨치시다가 오래전부터 이 미국의
소리에종사하셔서 우리가 미국의 소리 하면은 곧 이분의 이름을 연상하게되는
황재경씨, 그리고 왜정때부터 우리말 방송에 종사하셔서 우리말 아나운싱에
기틀을 세워주신 우리나라 아나운서계의 원로격이신 이계원씨, 그리고
서울 중앙 방송국과 기독교 방송을 거쳐서 지금은 여기 미국의
소리에 종사하고 계신 이종완씨. 이렇게 여러분이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해방후 어느해인가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제네바에서 열렸던 국제 무선 전파
회의에 참석해서 지금 우리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HL이라고 하는 호출번호를 할당받게한 날이 바로 오늘
10월 2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날을 방송일로
제정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 방송도 전에는 국영 방송인
KBS뿐이었던 것이 1954년 말경에 민간 방송인
기독교 방송국 그리고 그 후에 문화 방송국, 또 동아 방송국
그리고 금년 들어와서 라디오 서울. 이렇게 민간 상업
방송이 많이 생겨나서 방송인은 활기를
띄고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고국에서 기념하는
이 방송일을 맞이해서 방송의 금속감이라고 할까.
여러분께서 직접 경험하신 방송에 관련된, 특히 미국의 소리와
관련된 여러가지 재미있고 유익한 얘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 역사라고 할까요? 미국의 소리의
역사를 황제경씨께서 간추려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황: 네. 이 미국의 소리가 시작되기는
지금으로부터 22년전, 그러니깐 1942년 2월 24일에
뉴욕시의 57가 한 모퉁이에 있는 빌딩 5층에서 조그만
스튜디오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독일어, 블란서어, 영어, 이태리어, 그리고 스페인어,
이렇게 다섯가지 말로 방송했습니다.
그후 몇달 지나서 서해안 샌프란시스코시의
한 빌딩을 빌려가지고 중국어, 마레어, 타갈러어,
그리고 한국어 방송이 태평양 지역으로 흘러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한국어 방송을 시작한 날이
언제냐 하면, 42년 8월 29일, 일한 합병하던
국치기념일이었다고 합니다.
때에 한국어로 방송한 아나운서는
지금 이 워싱턴에 사는 유경상 박사, 또 한국에서
지역 사회 개발 지도 사업을 하고있는 이진목씨, 전 국회의원
황성수씨, 대구 신명여자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김태묵 박사, 이런
분들이었고, 그 때부터 우리가 듣기에 이상한 어조로 “미~국으로부터
나~가는 미국의 소래는” 이렇게 말하던 이가 신두식씨라고
지금 저 서해안에 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의 소리
극동부 여러과가 뉴욕시 본부로 옮겨온 것입니다.
거기서 8년을 방송하다가 1954년 10월에 지금 이곳 워싱턴으로
본부를 옮겨 오게 된것이 이 미국의 소리와 특별히 한국어
방송의 대략 유래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강: 네. 지금 간단히 미국의 소리 양력을
소개해 주셨는데, 황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여기에 종사하고 계십니까?
황: 제가 여기 오기는 47년도에 와서
미국의 소리에 직접 아나운서로 취직하기 전에
그냥 여기에 와서 해외에 돌아다닌 여행담을 이 미국의 소리를
통해서 국내에다가 여러번 방송을 하길 시작한 것이 47년도부터
입니다만, 정식으로 채용돼서 일하기는 49년도입니다.
강: 네. 다음에 박선생께서 앉아 계시는
데요. VOA에 오신지가 몇 해쯤 되시죠?
박: 제가 미국의 소리에 오기는
1949년 3월에 왔는데 처음에 와서 얼마 동안
일하다가 한국 사변이 나자 유엔 방송국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유엔에서 한 6년 일하다가 1956년에 다시
이 미국의 소리로 왔습니다.
강: 네. 흔히 우리가, 일반 국민들이
해방전 (?) 전까지 방송을 통해서 큰 화제거리가
나있었는데요. 이것은 단파사건, 즉 미국의 소리 방송을
왜정하에 있는 우리 한국 사람 직원들이 그것을 들었다해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모진 고생을 당한 이런 일이
연상됩니다만은, 그 당시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을
맡고 계신 이계원 선생께서 그 당시 일을
좀 말씀 해주시면 좋겠는데…
이계원: 네. 그 일정하에서 단파로써
미국의 방송을 들었다는 것은 그냥 그 때
서울 정동 방송국 그 안에서만 생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 내가 현장에 있었는데, 현장에 있다는걸
내가 들었다는게 아니고 우선 말씀 드리기 전에
그때 그 정황을 소개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밤에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 먼저
이 방송 사업이 긴장상태에서 있기 때문에
자기 맡은 방송을 마치고 나면 쉬는 동안에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또 자기대로 뭐 쓰는 사람도 있고, 근데
그 젊은 사람들이 처음엔 장기를 두었습니다.
그러면 장이냐 뭐냐 소리를 치게 되면은
이웃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니깐 그걸
막고서 바둑으로 돌렸습니다. 바둑으로 두니깐 자연히
조용히 두는데 어느 날 밤에, 그때 기술과에서 기술 관계 일하는
사람들이 2층에 있었는데 직통 전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전화가 오니깐
바둑 두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이 그 전화를 받고 나서는 아무 말도 없이
2층으로 갔어요. 남아있는 사람은 일 하기 바쁘니깐 거기에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그러고 끝나고 나서 그 후에야 인제 미국에서 하는
방송 얘기가 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자 그게 방송국 안에서 들었던
그 일로써 발단이 된것이 아니고 다른 외부에서
또 단파 들은 사람이 입이 가벼웁게 말을 터놓고 저는
그걸로 이해 꼬리를 잡혀 결국 그때 당시 경기도 경찰부에
일망타진이 된 그런 얘기였습니다.
강: 그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은건데
방송 내용은 어떤 방송을 들었는지…
이계원: 그 때 하나는 그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는 이승만 박사의 얘기를 들었다는 그런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강: 왜정 말기라서 일본 사람들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그 당시 아니겠습니까?
이계원: 물론 경계도 심했습니다.
그 있기 전에 원칙적으로는 타임으로써는
그 기술과 조정판 근처에 가지 못하게 되있었는데…
근데 그때가 마침 밤이 늦은 때여서 아무 그 일본인들이
없었고 마침 그 기술자도 한국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런 일이 있었나봅니다.
강: 그 왜정하, 특히 2차 대전 말기, 패망 직전
일본은 얼마나 그야말로 지독하게 통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일본이 점점 패망해
간다고 하는 이 소식을 미국의 소리를 통해서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는데요. 그 당시 박경호 선생님께서도
역시 방송계에 계신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 그때에는 뭐 저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 이계원 선생께서 말씀하신
그 단파 사건 이외는 미국의 소리하고 접촉이 잊을 수가 없죠.
미국에서도 들을 수가 없고 우리가 단파 수신기를 가질 수도 없으니깐…
그러나 그후에 제 경우로 말하면 해방 직후에 미국의 소리가 우리에게
개방이 되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맘대로 들을 수 있을 때입니다.
그 때 미국의 소리를 듣던 인상으로 말하자면
저의 집에 단파도 있었고 서울 방송국에서 들은 인상으로
말하면 아까 황재경씨가 흉내낸 이상한 어조로써 그런 식으로
말하는 방언이었구. 또 그 전부가 방송 전문가가 하는 것이 아니고
아마추어들이 방송을 하니깐 물론 그럴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순서 변경이라던가 또 그 아나운싱하는 기술이라던가
그 전문적 견지로 볼때 대단히 유치한 것이죠.
그 때에 방송을 듣던 이들이 그런 인상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도 미국의 소리라 하면은
이상한 어조로 말을 한다는… 그런 인상이 남아 있을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의 소리는 아마 대부분이 우리가 전문적으로
하게 되고 또 한국에서 오신 전문가들이 계시니깐 그런
폐단이 없습니다만은…. 그때로 말할것 같으면은 정말
그 전하는 내용을 우리가 청취할 뿐이니깐
기술상으로서는 대단히 아마추어한
이런 일면이 있었습니다.
황: 그런데 아까도 제가 흉내를 냈습니다만은
그렇게 말하던 일을 제가 미국에 와서 만나서 당신이
평소에 앉아서 얘기할 때는 제법 곧잘하는 양반이 어째서
그 미국의 소리 마이크에만 가면은 “미~국으로부터 나~가는”
이렇게 하는냐 그래서 국내에 있는 청취자들이
모두 듣기 싫어한다 했더니,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은 않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우리 미국의 소리 방송의
트랜스미터가 마닐라에 있었는데 그것이 하도 매우 약해서
말을 천천히 뜯어서 한재한재씩 안하면 말이 범벅이 되어서
들리질 않는다고, 그 때의 군서 그 전에 경신 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군수 목사가 여기 한국과 주임으로 계실때
딱 지키고 앉아서 그렇게 시키더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강: 네. 시대가 좀 더 내려와서요.
미국의 소리 하면은 우리가 6.25 동난을 맞이해서
공산국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가지고 피난 봇다리를 싸가지고
전전할때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미국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동포들이 여간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얘기를
좀 해주시면 좋겠는데… 그 당시는 황 선생님이
이미 여기 와 계셔서…
황: 네. 그랬는데 그것보다도 제가 먼저
여기 와서 일을 하기 전에 우리 미국의 소리가
한국에다가 전해준 특별히 기록 할만한 방송이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후에 우리들이 여기서 그전에 미국의 소리 아나운서들이
방송한 기록을 찾아서 보니깐, 1943년 11월에 ‘카이로’ 이렇게 해놓고는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그리고 중화 민국 장개성 총통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복구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런 뉴스라던지 그 다음에 1945년
7월에 ‘포츠담’ 해 놓고는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을 받은 뒤에 38도선 이북을 소련군이 진주하기로 하고
38도선 이밤을 미국이 진주하기로 양국 대표가 포츠담 회의에서
결정했다. 이런 것이 아주 미국의 소리에서 특개할만한 것이고, 그래
놓고는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 일본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천하의 소위 중대방송이라는 것으로
항복을 하는 것을 전국민에게 시사를 하고 그 해 9월 9일
미저리호 해놓고는 진주만 사건을 일으킨지 만 4개년
8개월 만에 일본은 드디어 극동군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미저리호 상에서 무조건
항복 조의를 끝마쳤다.
이러한 방송이 제가 오기 전에 있었구요.
제가 미국에 와서 바로 제 목소리로 미국의 소리를
통해서 처음 방송한 것이 47년 11월 14일이었습니다.
그때 UN총회에서 남한만이라도 48년도 5월10일 선거를
통해서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로 가결했다는것. 이것을
아주 한국에 중대방송이라고 해서 당시에
군정때 그런 방송을 했고,
또 그 다음에는 1948년 8월 15일 정오에
대한 민국이라는 독립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식을 거행했다는것. 그 외 1950년 6월 25일에 북한 공산국이
38선 전역에 걸쳐 여러 군데 지점에서 침략 공격을 개시했다는
것을 제가 울면서 방송항 기억이 납니다만은.
여기 박경호 선생님도 계시고
그러자 조금 후에 서울 방송국에 계시던 민재호씨,
여기 지금 방송국에 거장이신 이계원씨 여러분이 다 오셔서
그 때는 방송이 제대로 틀이 잡혔죠. 그리고 제가 여기서 방송할때
대구, 부산만 남겨 놓고 유엔군이 방위 태세를 취할 때는 그야말로 맥빠진
방송을 해오다가 그 해 9월 15일에 약 4만명의 미해병대와 육군을 실은
260일척의 적전 상유 함대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한국 해병대와
함께 방금 인천에 상륙했다고 방송할때 만큼 참 신바람난
방송은 내 생전에 전무후무 했다고 할수 있는데 아마
남북 통일이 될 때까지 여기서 일을 보게 된다면은
그 날이 제게는 일생의 가장 신바람이 날
방송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네. 지금 인천 상륙에 관한 쾌거를
직접 방송한 황재경씨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그 당시에 북한에 있었습니다. 이북 동포들도 역시 이 미국의 소리를
지하실에서 또는 이불을 쓰고 몰래 몰래 듣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만은
북한 정권에서는 허위 방송을 했고 심지어 대한 민국에서도 혼란 상태에
빠져가지고 국민들을 수습하지 못한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때에 미국의 소리만은 사실 그대로를
거짓 없이 방송한다. 믿을 수 있는 방송이다. 신빙할 수 있는
방송이다. 이것이 아마 전세계에 인식된 미국의 소리의 한 위력이라고
생각되는데… 지금까지 여기에 종사하시면서 박경호 선생님께서는
재미있는 경험담 같으것이 없으시는지… 박: 그게 특별히
어느해인가요? 부산서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
내리고 그럴때 그게 전쟁 바로
뒷전인가요?
강: 저 일사 파동때?
박: 그 때 계엄령 내리고 국회의원 잡아가고
그럴 때 그 우리 미국의 소리에서는 엄경한 중립적
입장에서 여기 신문 사설을 그대로 소개하고… 그러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그래서 그 때 미국의 소리를 갖다
두주일인가 석주일 중계를 중지한다. 그랬었죠?
강: 그때가 제가 중앙 방송에 종사할 때였습니다.
네. 저도 기억납니다.
박: 그런걸 가만히 보면 그게 일종의
혼란 상태지만은 역시 미국의 소리의 힘이라고
할수도 있는거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압니다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또 제 개인의 경험으로, 무엇인가 하니,
49년이지요. 가을에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한국 선수들이
참가를 했는데… 그 어찌 돼서 그랬는지 가서 마라톤
대회 상황 보고를 하라고 해서 기사를 대동하고
자동차를 동원해서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 선수가 1등을 하리라고
기대를 했고. 그 쯤에 준비를 했습니다만은, 골인하는
옆에 있는 빌딩에 자리를 잡고 내다 보고 있는데 뜻밖에
1등 2등 3등 전부다 한국인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깐 말도 별로
준비도 못했고, 스포츠 중계라는 것은 일생에 해보지도 못했고 (웃음) 아
뜻밖에 1, 2, 3등이 들어오니깐 말은 별로 못하고 대한민국
대한민국 하던게… (모두 웃음)
강: 네, 지금 저도 박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깐
저도 공감되는 한가지가 있어요.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제3회 아시아 대회에서 그 때 우리 이창훈 선수가 일착으로
들어왔는데요. 제가 그 장면을 중개 방송하다가 많이 준비했던
말은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감격에 벅찬지 눈물만 흘리고
한국 만세 이창훈 만세만 부르던 생각이 납니다.
박: 그래서 그것을 저는 녹음을 해가지고
뉴욕 와서 그걸 방송 했습니다. 한 번 테입을 틀어서
일반인에게 들렸더니 아주 썩 잘 됐다고 그러더군요. (웃음)
강: 이선생께서는 또 무슨 경험 생각 나시는거 없습니까?
이계원: 무슨 경험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별로 인상에 남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 있다면 여기서
사무실에서 일만 하다가 그게 58년인가요? 하와이에 한 두주 가서
거기에 한안 교포들을 만나 프로그램을 짰었는데 그게 여기서 아침 방송이나
한국에서는 전기로 수신 되는것인데… 그 방송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직접 편지를 못 받았으나 일본 재류 동포, 특히 오사카 그 대판에
있는 젊은 한인 교포가 편지를 보내가지고, 그 자손 얘기와
여러가지를 한게 내 일생에 있어서, 일생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소리에서 일하면서 결국 우리 청취자에게서
직접 호응을 받은 감격 깊은 멋이었던,
그게 하나가 기억에 남습니다.
강: 네. 지금 모두 연로하시고 대선배이신
세 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 가장 나이가
젊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요? 이종완 아나운서가 지금 여기 나와
계신데 이종완 아나운서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가 기억하기에는
6.25후에 부산으로 정부가 천도했다가 다시 서울로 환도한 직후에 KBS
아나운서로 들어오셨다가 기독교 방송을 거쳐서 지금 미국에 와 계신줄
알지만은 그 당시 이종완씨가 가셨던 기독교 방송국이 KBS
다음으로 민간 방송으로써는 우리 한국에서 처음 등장했던
방송국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은 그때를 회상하시면서
한말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종완: 네. 지금 미국의 소리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기독교 방송국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갚습니다만,
기독교 방송국이 한국의 최초 민간 방송국으로써 등장하게 된것은
1954년 여름이었는데 그때부터 시험 전파를 발사하다가 같은해에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정식으로 방송을 계시했습니다.
그때 저는 감리교 신학교 제 3학년 재학중이면서
지금 강창선 아나운서가 말씀하신대로 서울 중앙 방송국
아나운서 강습생으로서 훈련 받고 있었을 때입니다. 강습을 마치고나서
전영우, 지금 동아 방송국에 아나운서 실장으로 계신 전영우 아나운서하고
제가 동기인데요. 그 이듬해, 그러니깐 1955년 봄에 정식 아나운서로
채용되 가지고는 한 1년동안, 그럭저럭 1년 강습 기간까지 합해서
1년 서울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55년 가을에
KY로 전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KY는 규모가 작고 지금은 방송망이지만
그 당시는 방송국으로써 서울에만 하나 있는 방송국으로써
저녁 방송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한국에 있는 청취자들은
특히 서울에 있는 청취자들은 다이알을 하나만 고정시켜 놓고 싫든지
좋든지 간에 서울 중앙 방송국만 들을 수 밖에 없었던 선택권이 없는 청취자
였었지만 기독교 방송국이라고 하는 민간 방송국이 생김으로써 선택의
적으나마 자유가 생겼고 또 기독교 방송국이 이름은 기독교
방송국이고 그 목적이 복음을 전파하는 종교 방송국
이었지만은 한국의 문화면에서 공헌한 바가
지대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기독교 방송국은 확장 일로를
걸어서 지금은 대구, 부산, 광주, 이리 이와 같이
4대 도시에 지방국을 개설하고 전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또한 진리를 전파할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 심장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강: 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오늘 한국의 방송의 날을 맞이해서 한국에 계신
방송인들에게 특히 하시고 싶은 말씀. 오래되신 방송인들을
대표하셔서 이계원 선생께서 한말씀 해주실까요?
이계원: 네. 대표라기 보다는 소감인데,
나이 어려서 이 방송 사업에 들어갔을때 첫째 공포를
느낀것은 우리말이었습니다. 네, 제가 알기로는 한국 방송을
시초로 개척하신 분이 지금 고인이 되신 윤백남씨, 그리고 그 대를
이은게 김정진씨 그리고 제 3대를 이은 분이 심의석씨였습니다.
모두 고인이 되셨습니다. 그 분들이 일정하에서도
우리말의 미와 우리말이 가진 그 아름다은 미를 살리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시고 후배들을 지도하신데 대해서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서구 박사가 방송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악 재래
국악 분야를 개척해서 금대탑을 이루었다는 것도
저는 영영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강: 네. 그러면 끝으로 우리 이 한국의
뜻깊은 방송의 날을 맞이해서 여기 미국의 소리 방송에
종사하고 있는 일동은 같은 방송인으로서 심심한 축하를 보내드리고
아울러 언제나 거짓없는 진실한 보도를 통해서 반공과 자유 민주 세계의
등대 역활을 하고있는 이 미국의 소리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 시간 방송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특히 고국에 계신 방송인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