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드라마 선구자 김영수님
1970년대 이전에 사시던 대한민국 국민중 김영수선생님을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실 줄 압니다. 1911년에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이던 1934년 동경에서 박동근, 황순원, 김병기, 김진수, 김동원, 김일영, 허남실, 주영섭, 마원영님등과 함께 "동경 학생 예술좌"를 창단하고 그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주영섭, 김동원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 경성방송국 제 2방송을 통해서 9월 4일 유진. 오닐작 주영섭 역 "절해에서"를 방송극으로 방송할 때 김진순, 김동원, 김정호님과 함께 방송에 직접 출연 해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또 9월 9일 밤 골즈워터작 "태양"을 방송 할 때는 주영섭, 김진순, 김정호님이 출연하고 김영수님이 직접 지휘를 맡았습니다. (1977년판 한국방송 50년사 참조)
이렇듯 일찍부터 방송문예에 관심을 갖고 활동 하시던 김영수님은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방송기능이 군정청 소속으로 되면서 편성과에 두자리의 방송작가 T/O가 새로 마련되고 작가를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할 때 유호 선생님과 함께 방송국 직원이 되셨습니다.
이때부터 두 작가분은 해방된 후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 똘똘이 모험을 집필하고 신라의 달밤 등 노래가사를 쓰는 등 본격적인 문예활동을 했습니다. 김영수라는 본명 대신에 남해림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노래 "사나이의 길처럼" 예명이나 가명으로 발표된 작품도 많았습니다. 방송국 직원일때의 작품은 가명이나 다른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경우가 많았 습니다. 유호 선생님 글은 본 블로그 여러곳에 있으므로 오늘은 김영수 선생님에 관해서 KBS 편성과에서 만나 일생을 친 형제처럼 지내셨던 유호선생님의 글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 글과 여기 올린 사진은 김영수 선생님의 둘쩨딸 재미작가 김유미님의 홈에서 옮겼습니다. 김유미님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신라의 달밤은 해방후 마땅히 부를 노래가 없던때 방송국이 주관이 되어 유호님이 노랫말을 쓰고 KBS 전속 경음악단 지휘자 박시춘님이 곡을 붙혀 현인님의 노래로 불려 국민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磐石과 같았던 분 김영수 / 兪 湖 (방송 극작가)씀
1938년, 제2 高普(현 景福高) 4학년때,
나는 朝鮮日報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응모를 했다.
그해의 당선 작은 <素服>, 작가는 金永壽. 김영수란 이름 석자가
평생 가슴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그분은 일제하 中東高에서 농구선수를 했고 성적이 우수해서 재단측의 추천으로 일본의 早大 영문학부로 유학을 했다. 귀국하면서 문단으로 진출, 소설, 희곡, 라디오 드라마 등 모든 분야를 설렵하기 시작했다.
1943년과 44년 나는 東洋극장에서
문예부와 선번부 일을 겸임하면서 당시 내노라 하는 극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읽으며 劇作法을 배우며 2편의 劇本을 상연했다.
김영수 선생은 1941년 9월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靑春座'와 '호화선'의 합동공연인 <찔레꽃>을 각색했고, 1943년 4월에는 李光洙의 <사랑>을 각색, 1943년엔 <역마차>를 상연한 기록이 남아있다.
방송국 재직시절의 유 호님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그해 10월
나는 貞洞 고개마루에 있던 中央放送局에 입국,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김선생은 먼저 入局해서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었으며 유일한 연출자였다. 美軍政下시대라 영어에 능통한 그분은 미 고문관들과의 의사소통이 자유로워 일을 하기에 편리했다. 이름만 기억하고 있던 그 분을 직접 만나보니 六尺 거구에 걸걸한목소리, 원고를 쓰는 자세가 힘이 있고 자신이 넘쳐 보였다. 연출면에서 그 분이 후배들에게 한가지 남겨 준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이크 앞에 서 조금이라도 잡음을제거하기 위해서 극본의 프린트 한장 한장이 끝나는 대로 그냥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1954년 추석특집 연습광경으로 김영수, 이상만님을 비롯해서 김희갑, 김승호, 한은진, 주선태, 윤일봉, 최은희님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해방 직후 혼란기라 작가들의 소재나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서 몇 달 동안은 그분하고 둘이서 30분짜리 라디오 드라마를 써대야만 했다. 이래저래 그 때부터 그분과의 긴 교분이 시작된 셈이다. 하루 일이 끝나면 나는 美고문관실에서 그 분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내주는 미군용차인 '스리쿼터' 라는 차에 동승을 해서 거의 매일처럼 아현동의 그분 댁으로 가서는 식사와 술을 맘대로 제공받고, 취하면 그분 서재에서 내집처럼 자곤 했다.
딸 은미, 유미, 다미, 나미와 함께
부인이신 趙錦子 여사는 한번도 언짢은 빛을 보인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 어리디 어린 세 공주인 나미, 유미, 다미, 그리고 아 들 하나는 그랬으리라.....체 저 사람은 누구길래 매일처럼 와서는 먹고, 취하고, 자고, 참 뻔뻔스런 사람이라고. 어느 해 겨울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다. 술이 취한 나는 팬츠바람으로 뛰쳐나가서는 장독대로 올라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놀란 일이 있었다.
6.25 전쟁때까지 우리나라의 라디오 드라마界를
누비다시피 한 선생은 뜻하지 않은 상처로 인해 발가락 한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지 얼마 후 그분은 東京에 있는 UN군 사령부 心理戰課의 작가로 옮겨 갔다. 그러나 몇년 뒤
발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다시 수술을 해서 결국은 한쪽 다리의 무릎아래까지 절단을 했다. 그 원인이 어릴 적에 걸렸던 凍傷 때문이라는 얘기를 그분이 들려준 일이 있다.
김영수님 VUNC재직중 직원들과 함께한 두장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1957년 김유선 아나운서 송별회사진으로 위진록, 최규원, 유덕훈, 김종흡, 황진남, 김유선, 정상문, 김주영님이 한께 한 사진이고 아래는 김영수님을 비롯해서 유덕훈, 김유선, 김기형님등 VUNC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선생은 의족을 달고 단장을 짚고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귀국을 했다. 조금도 고통을 내비치지 않았다. 육척 거구에 걸걸한 그 목소리, 때로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 너털 웃음, 변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의족을 벗어 놓고 아랫목에 앉아 있는 모습은 오히려 반석처럼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장 하나를 짚은 것 뿐.
김영수님이 VUNC근무를 마치고 돌아 올 무렵 유호, 전숙희님과 함께 한 사진
작품 집필과 연출에 대한 의욕과 집념은 더 했다.
건강한 사람 이상으로 라디오드라마를, 그리고 TV시대가 열리면서부터는 선생의 활동은 더욱 불을 당긴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그러한 시기에 선생은 京鄕신문에 연재소설 <파도(波濤)>를
시작했다. 나는 문화부의 평기자로 선생을 매일 만나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지만 저녁때만 되면 문화부장인 金光州씨와 단둘이서만 모처로 사라지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다. 바람결에
그분의 건강이 썩 좋지않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데도 타고난 게으름때문에 선생을 찾아 뵙지 못했다.
선생의 부음을 접한 말, 비가 부슬부슬 뿌리고 있었다. 부인은 미국에
체류중이었고 빈소에는 나미, 유미, 다미, 아들이 정신 나간것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더 건강하셨더라면 우리나라의 방송, 예술, 문화계를 휩쓸고도 남으셨을 터인데...
<혈맥> 初演을 나는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렇게도 만족해하시던 모습과 객석의 박수소리가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것 같다. 더구나 이번 연출을 맡은 林英雄씨는 金永壽선생과도
잘 알고 지낸 사이다. 이번 무대를 통해 두분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선생은 저승에서 쉬고 계시지만 한은 없으리라 믿고 싶다.
<혈맥>이 살아나고 또 하나는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따님 유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았음인지 미국에서 20년 넘게 文才와 사랑의 정신을 발휘하여 在美한국인 사회의 발전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해가 되었나, 선생이 타계하신지 한해가 가까워 올 무렵
나는 유가족의 뜻이라면서 선생의 碑文을 부탁받았었다. 나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기에 끝내 사양을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서 긴 세월을 함께 해온 정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서 다음과 같이 적어 드렸다.
서민으로 태어나서
서민과 같이 사시면서
朴서방,
굴비,
血脈...
쓰고 쓰시다 가신 분
金 永 壽
1960년대 MBC스튜디오에서 왼쪽부터 김영수님이가수 한명숙, 작사작곡 손석우, 성우 정은숙님과 함께한 사진
2003년부터 2007년 2월까지 KBS사우회 회장을 지내신 서병주님이 김영수, 조금자님에 관한 글을 읽으시고 6.25 피난때 있었던 추억의 글을 보내 오셨기에 옮겼습니다. 서병주 회장님의 선친 서희택님은 그시절 KBS 대구방송국장님으로 계셔서 대구방송국 관사에서 사시던 서병주님은 김영수님 일가와 같이 생활 하셔서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 나신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중략----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1950년 6월24일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6. 25가 터지자 당시 방송국 관사에 살고 있던 저는 대구방송국(대구시 원대동 소재 구 청사)이 중앙방송국이 되어 생방송을 위해 작품 쓰시고(드라마) 연출하시는 김영수 선생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볼수가 있었고
(당시 드라마에는 출연한 배우 최은희 문정숙등 기억함) 조금자 여사님과 따님들과는 동요 (예쁜 손으로 비빈 그 떡을 예쁜 손으로 구워....)를 부르며 함께 놀든 기억이 납니다. 꼭 62년전 이 때 쯤의 일이었네요. 그러나 그 당시 쓰레기 통으로 들어 갔을 쓰고 난 "원고"들 한 장의 소중함을 몰랐던 저로서는 안타깝기만 하지요.김영수 선생님은 원고를 써 놓으신 것이 아니라 출연 스텝들이 둘러 서 있는 상황에서 말씀으로 하시면 스텝들은 이를 받아 적어 자신의 역할을 담당해 나가든 생각하면 어설픈것 같지만 어쩌면 그 작품들은 김영수 선생님의 영혼이 담긴 빼어난 작품들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때가 그립습니다. 그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한 조각의 증거물을 가지고 않다는 것이못내 부끄럽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시카고에서 서병주
작가 김영수님이 연출한 드라마 녹음 : 구봉서, 오승룡, 김희갑, 복혜숙, 이향자가 출연하고 최세훈 아나운서가 맨트를 넣었다.
김영수 선생님 악력
1911 서울 출생 1934 (1933?) 와세다 대학 재학중 황순원 김동원등과 함께 동경 학생예술좌 창립 1934 <동맥>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1등 당선. <광풍>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입선
1938 와세다 대학 영문과 수료. 귀국후 동양극장 전속작가로 활동 1939 <소복>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1등 당선 1939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 희곡 발표 희곡 <단층>, 단편<生理><코><병실>, 중편<放浪記> 발표
1940 희곡 <총>, 단편<밤><海面> 발표 1940 조선일보에 중편 <방랑기> 연재. <조광>지, <문장>지, <인문평론>지에 단편- 희곡-평론등 발표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연극 시평과 칼럼 다수 발표
1941 단편<範疇><崔基成氏> 발표. 1941-44 <결혼생태> <역마차> <행복한 가족>등 연극 발표 고려문화사 편집국장 주간지 <민성>, <어린이 신문> 창간
1945 해방후 최초의 KBS 중앙방송국 소속 작가 1946 한국 최초의 일일 연속극 <똘똘이의 모험> 집필 <閔中殿> <정열의 지대><불> <사육신>등 공연
1947 극단 ‘신청년’창단. 전속작가로 장막극 6~7편 발표 <황야> <5남매> <사랑의 가족> 발표
1947 희곡 <血脈>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 작품상 수상 1948 <혈맥> <사랑> <상해야화> <여사장 요안나> <운명> <결혼명령>등 공연 장편 <波濤> 발표 1949 시나리오 <성벽을 뚫고> 발표 가극 경연대회 단체상 <화전지대> 공연
1950-54 <돼지> <붉었던 서울> <별은 빛난다>등 다수 공연 1951 장편 <여성회의>, 희곡<고향 사람들> 발표 동경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 (VUNC)에 파견, 작가겸 연출가로 6년 근무
1959 조선일보에 장편 <빙하> 연재. 방송극 <박서방> 발표 1960 연합신문에 장편 <격정의 뜰> 연재 조선일보에 장편 <바람아 불어라> 연재. 단편 <혼탁> 발표
1960-70 <귀국선> <박서방> <굴비> <거북이> <문> <산그림자> <장미의 곡> < 단골손님> <신입사원 미스터 리>등 라디오-텔레비전 드라마 다수 발표 경향신문에 장편 <파도> 연재
1972 안수길의 <북간도>와 이병주의 <관부 연락선>등 텔레비전 드라마 각색 한국 최초의 본격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발표
1977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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