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조흔파 조봉순 KBS 아나운서, 중앙방송국장 출신 얄개작가

이장춘 2011. 7. 11. 05:32

 

 

 

KBS 아나운서, 중앙방송국장 출신 얄개작가 조흔파

 
 
70-80년대 열개작가로 널리 알려진 조흔파선생님은
조봉순이라는 본명으로 1942년부터 방송국 촉탁직원으로
근무하시다가 해방후 1945년 11월 아나운서 공개 채용시험을 거쳐
아나운서가 되셨습니다.  1947年 5月에 방송국을 떠나 교단에 스셨고
 6.25전쟁을 맞아서는 종군문인 활동을 하시다가 결국 작가가  되셨
습니다.  민권운동가이기도 했던 님은  4. 19후의 민주당 정부시절 
KBS중앙방송국장을 지내셨습니다.   오늘 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1993년,  방우회장 시절에 쓰신글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本名이 조봉순(趙鳳淳) 1918年 1月 8日
平南 平壤市 염전리 125番地에서 父親 조창일(趙昌鎰)氏와
母親 양창신(梁昌信)女史 사이에서 長男으로 태어났다.  70餘編의
 作品中 "天下泰平記" "얄개전" "푸른 구름을 안고"등이 있는데,
特히 明朗小說에 있어서는 韓國에서 특이한 筆致를
 엿보였다는  게 衆論이다.
 
1941年 12月에 日本 東京에 있는
專修大學 法學部를卒業한 趙欣坡는 一見
特異한 길을 걸었다고 하겠다.   普通사람의 境遇
作家 生活의 終着驛이 大學 講壇이라 하겠는데 元氣 旺盛한
 30代엔 敎壇에서고, 40代에 이르러서는 言論機關에 投身하고 이어
民權運動에 參與했다. 民主黨과 生命을 같이 하게 되어 어울리지 않게
 公務員이 되었다가 政府言論機關인 지금의 KBS局長을  맡았으며
 文人으로서 近20年間을 自由 奔忙한 浪人生活끝에 
 1980年 12月 24日 他界하였다.
 
巨軀에 美男型에다 平壤내기답게 겉으로
보기엔 괄괄한 것 같으면서도 纖細하기 이를 데 없는
 性品의 所有者로서 유달리 放送엔 魅力을 느끼고 鄕愁를 느낀
 放送人이다. 1942年 倭政 末期에 暫時 京城放送局 囑託職으로
 放送과 關聯했다. 1945年 11月에 아나운서 公開採用 試驗에
 應試하여 아나운서가 되었다.
 
1956年 10月에 發行된 "放送"誌에 실린
 放送回顧錄을 보면 역시 體質的으로 明朗 小說 作家다운
 面貌를 갖추고 있음을 發見하게 된다. 回顧錄하면 自己자랑을
늘어놓게 마련인데 正反對이다. 그의 글을 紹介한다.
 

 

 

 

-1956年* 月刊 "放送" 지에서-

 

 

女子아나운서中에 이영옥(가명)이라는

 美人이 있었다. 그는 나하고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내가 "뉴스"를 마치면 곧 放送室로 들어와 레코드를 걸어 주곤 하였다.

"스위치"를 "레코드"라는 쪽으로 돌려놓으면 "마이크"와의 接續線은 絶斷되고

"레코드"만이 나가는 것이었고 "믹스"편으로 돌려놓으면 "레코드"와 "마이크" 가

같이 나가게 마련인데 어느 날 "뉴스"를 끝낸 나는 영옥양이 들어와 주는게

感激하여 "레코드"로 돌려놓을 "스위치"를 그만 "믹스"쪽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레코드"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영옥양은

 安心하고 내게다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참, 수고하셨어요. 점심은 제가

 한턱 낼 테니 같이 나가세요. 네?」

나는 "스위치"에 無關心한체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내죠.」

「돈 갖은것 있으세요?」 「없습니다.」

「없으면서 뭘 그러세요.」

「돈은 없지만 외상으로....」

「호호호. 우스워 죽겠네.

오늘도 제가 내겠어요.」

「그게 상식적입니다.」

「호호호」

「하하하」

 

나는 늘 그에게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처럼 남자만 보면 돈을 꾸어 달라는

 그러한 영옥이가 아니었다. 「점심 먹고 德壽宮에

散步라도 갑시다.」 「좋아요.」

 

이때 放送課長이 遑急히 放送室도

뛰어 들어오더니 "스위치"를 "레코드"쪽으로

돌려놓고 나서 눈을 흘긴다. 우리는 效果 音樂까지

넣으면서 戀愛劇 한幕을 放送한 셈이 되었다.

 

서울中央放送局 아나운서職을 떠난지

近10年이 된 懷古談이다. 懷古談치고 유모어끼가

 넘쳐흐르는 글이다. 1947年 5月에 아나운서職을 떠나

 敎壇에 섰다. 그것도 男學校 아닌 京畿女子高等學校 敎師로 다시

淑明女子大學校 講師로 奉職하다 6.25事變을 맞았다. 6.25事變과 同時에

從軍文人으로서 活躍했고 政府收復과 同時에 京畿女子高等學校

敎師로 復職하여 다시 敎壇으로 돌아갔다.

 

유머 小說 作家이기에 女學生에겐

 人氣가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京畿女高 學生들의 評은 몹시 嚴格한 무서운 先生

이었다고 한다. 女學生 책가방에서 藝術 寫眞인 裸體女人像이

나왔다 고해서 책가방 主人인 女學生의 懲戒 問題가 論議되었는데

 當時 敎務主任兼 校監署理에 있었던 趙鳳淳先生은 强硬論者의

 한사람이었다고 한다.(李德根 前中央大敎授 證言)

 

敎職을 떠나 1957年 以後

「國都新聞」 「世界日報」 「韓國經濟新聞」 等의

論說委員으로 活躍한게 契機가 되어 自由黨政府에 抗拒하는

 位置에 서게 되어 1959年 1月엔 「民權守護國民總聯盟」常任委員

兼 宣傳部 責任委員으로 被選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政治人도 政黨人도 아니었다.

 4.19가 나고 過度 政府가 서게 되니 自然히 새로운

 人物이 必要했다. 1960年 2月에 公明選擧 全國推進委員會

中央委員에 被囑되고 마침내 1960年 6月에 公報室 宣傳局長에

 被任되고 張勉 政權下에서  國務院 事務處의

첫公報局長이란 重任을 맡게 된다.

 

?公報 局長 時節의 逸話?

 

張勉總理가 登極하고 첫記者會見 席上

 當時의 中央廳 出入記者團은 義氣堂堂했고 記者會見은

中央廳 出入記者團의 獨占物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總理室과 記者團과 橋梁 役割을 擔當했던 公務員 趙欣坡는

記者團에 屬하지 않은 所謂 말하자면 非會員記者에게

質問의 機會를 附與했다.

 

非會員記者가 바로 公務員인

서울中央放送局 記者이어서 한때나마 質問한

記者의 懲戒問題가 擧論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없었던

 일로 만든 役割을 擔當해 서울中央放送局

 記者들의 推仰을 받고 있다.

 

言論의 自由는 新聞만이 占有하는 게 아니라

 放送에도 適用되어야 한다는 哲學이있어 남겨진 逸話이다.

月刊雜誌 "現代女性" "學苑"等의 主幹을 맡기도 하고

新聞의 論說委員을 거친 經歷이 言論의 自由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는지 모른다.

 

 

 官職의 몸 理事官으로서 1960年 10月

서울中央放送局長이 되었는데 이는 歸巢本能에 依해서

放送局長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官職이라는 게 優先 權威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 官職 社會치고는 比較的 自由 奔忙한 곳이

 放送局이라고 보는데 1年 남짓한 放送 局長 在任其間中

넥타이를 푼 趙欣坡를 볼 수가 없었다.

 

季節에 따라 넥타이 색깔은  달라지지만

검정색 洋服이었다. 마치 나는 유머 小說 作家가 아니라

理事官 서울中央 放送 局長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듯했다. 27歲에

서울中央放送局 아나운서가 되었다가 壯年인 40代에 서울中央放送局長이 된

 趙鳳淳은 무지개 같은 꿈을 꾸지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國家 豫算으로 運營되어야만 되는 國營放送局의 硬直된

豫算으로 숱한 試鍊을 겪게 됐다.

 

試鍊中의 試鍊은 聲優들의 罷業이었다.

TV放送이 出現되기 前의 서울中央放送局의 電波는

그나마 生活情報를 얻을 수 있는 그리고 娛樂媒體로서의 獨步的

存在 價値가 있었으며 特히 "청실홍실"로 始作된 라디오連續劇은 全國의

 聽取者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것은 媒體 環境속에서의 聲優들의

 罷業은 分秒를 다투어 解決해야 할 急先務이었다.

 

聲優들의 出演料 引上要求鬪爭은 强硬했으며

 豫算의 確保는 國家豫算이라는 壁에 부딪쳐 解決의 餘地는

 全無했다. 失手도 했었던 아나운서時節에 鄕愁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나운서가 아닌 經營의 1人者의 位置에서 그 어떤 斷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高級文化의 象徵인 KBS交響樂團에게 마지막 葬送曲을 演奏하게 한 것이다.

窮乏한 豫算속에서 罷業을 解決하기爲한 豫算確保를 爲해 60餘名을

 거느린 KBS交響樂團을 解散케한것이다.

 

聲優들의 出演料 引上鬪爭은

 마침내 當時로서는 唯一한 交響樂團인

KBS交響樂團의 解散을 强要한 것이다. 窮餘之策으로

 내려진 斷案은 聲優들의 罷業을 中斷시켰으나 時刻에 따라서는

 趙鳳淳 個人으로서는 文化的인 面에서는 하나의

 汚點을 남긴 것으로 記錄되기도 했다.

 

그러나 當時의 事情을 熟知하는 人事等은

 平凡한 公務員이 아닌 文人이면서  作家이면서

 藝術人이기도 한사람으로서 내린 勇斷이었다고 不可避한

 決斷이었다고 높이 評價하고 있다. 5.16으로 1961年 7月

서울中央放送局長職을 떠나 浪人生活을 始作한다.

 

 노타이에 남방을 입고 지퍼가 제구실을

못하는지 앞자락을 풀어 헤친잠바스타일에 變形된

베레모를 머리에 쓴게 아니라 얹은 趙欣坡의 모습은

放送局長職을 떠나 1980年 12月 24日 幽明을

달리할 때까지의 차림새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문시형님

 

5.16後 獨裁政權에 抗拒한다기보다

어울리지 않겠다는 그의 意志였다고 評價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의 飮酒癖은 巨軀답게

 斗酒를 辭讓치 않았으며 自由人임을 자랑이나 하듯 아침이건

 낮이건 저녁이건 술자리를 辭讓치 않았으며 아니 辭讓한게 아니라

술자리를 마련하는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某大學 某敎授의

 證言에 依하면 午前10時頃 電話를 걸어 講義가 있는지

 없는지를 確認하고 講義가 없으면 만날 것을 强要,

女子 技師를 雇傭하고 있는 自己車를

 大學으로 보내곤 했다.

 

술자리가 벌어지는데 武橋洞의 술집은

 겨우 淸掃를 끝낸 아침 時間이어서 술집 한구석에

 겨우 술자리를 마련하는 게 일수였다고 한다. 某敎授는

그후로부터는 電話가 오면 時間에 따라 講義가 있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避했다고 한다.

 

 

作品으로 "大韓百年" "小說國史" "酒遊天下"

 "얄개전" 일일이 列擧하기 어렵다 하겠으며 小說, 歷史, 飜譯物,

敎材, 硏究書等은 百餘卷이 되며 戱曲을 비롯해 라디오 드라마로서

單幕劇 連續劇 그리고 TV드라마 등은70餘編에 이르고 있다.

 

特히 特記할 事項은 死亡後 4年後인 1984年에

 全9卷으로된 "小說聖書"가 學藝春秋社에 依해 出版되었으며

 1985年엔 全6卷으로 된 "學生明朗 小說選集"이 民西出版社에 依해

 出版되고 1987年엔 全18卷으로된 大作 "小說韓國史"가

 三省出版社에 依하여 出版되었다.

  

參考文獻

* 韓國放送史料集 1992年 12月 30日

韓國放送史料保存會 發行

* 月刊 "放送" 1956年 10月 1日 公報室 放送調査硏究室 發行

 

 

 

지금 들려오는 곡은 조흔파선생님이
쓰신 시에 김용인님이 곡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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