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6.25첫 방송 아나운서 위진록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이장춘 2011. 3. 28. 11:54

 

 

 6.25첫 방송 아나운서 위진록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위진록(韋辰祿)씨가 방우회를 찾아온 것은

지난 1월 31일 (*.1991)이었다. 사전예고도 없이 미국

 LA 로스엔젤리스에 살고 있는, 아니 미국에 있어야 할 위진록

아나운서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반가움에 앞서 어리둥절하여

그만 입을 열지 못한 채손부터 우선 덥석 잡아야했다. 위진록 아나운서.

그는 일찍이 약관19세에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입사해, 탁월한

목소리와 바른말 구사로 우리말의 본보기를 세웠던바있다.

 
 더욱이 공과 사를 확연히 구분할 줄 아는
성품과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방송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겸비한 방송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 위진록 아나운서는 전쟁뉴스, 전시방송과 함께 떠오르는
드문 방송인으로도 기억된다. 1950년 6월 25일 임시뉴스는
 오늘에 와서도 간혹 화제에 오르곤 한다.
 
산군의 전면적인 남침을 알리는 첫 번째
임시뉴스가 방송된 시간이 언제인가? 그 시간에 따라

 당시의 정세가 달라졌을 게 아니냐? 일부 군인들 사이에서

오고갔던 분분한의견이다. 당시 국방부에 의한 남침 통보는

오전 5시10분경에있었는데 임시뉴스는 정규방송이

 시작된 오전 6시 이후였다.

 

 이에 대해 위진록씨는 1990년 6월21일자
로스앤젤레스 발행 중앙일보 칼럼 '차침에…….'에서 방송을
 늦게 한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우선 국방부에서 온 박 대위라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고 그런 중대한 내용을 일개 아나운서인
 나만의 판단으로 방송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둘째로 아침 정규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있었다<중략>." 윗글에서 '일개 아나운서인
 나만의 판단으로...'라는 말은 곧 위진록 아나운서의 성품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임시뉴스도 당시 방송과장인 민재호씨가
 당시 정훈국장인 이선근 대령에게 확인받아 다시
민재호 방송과장의 지시로 방송된 것이다. '방송인물사'에
 위진록 아나운서를 이렇게 모신 뜻은 여전히 방송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쏟고 있기에 또한 지금까지도 퇴역 방송인을 물론
현역 후배아나운서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인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후배방송인들의 선망이면서도 반면,
 아나운서들에겐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6.25사변 통에
우리나라 모든 분야가 피해를 입었으나 방송에서는 특히
아나운서 부문이 대단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중견급 아나운서인
윤용로. 전인국 아나운서가 북으로 납치되고 당시
아나운서의 대부 격인 이계원씨가 방송현업에서 물러났다.
민재호씨는 6.25피난과 동시에 유엔군 사령부가 있는 동경으로
뽑혀가 심리전 방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위진록아나운서와 홍양보 아나운서는 1.4후퇴와 동시에
역시 동경에 있는 VUNC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와 같이 아나운서의 대이동은 국내 방송을
담당할 전문 아나운서의 빈곤을 초래했다. 결국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을 지킨 인물들은 서명석. 한희동. 장기범 아나운서 등이었고
 그밖에는 방송입문 2-3년 안팎의 풋내기 아나운서들이 국내방송을 담당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몇몇 퇴역 방송인은 당시를 일컬어 아나운서 수난기
 더 나아가서는 공백기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원인은 분명 6.25라는 큰 난리 때문이었다지만
당시로서는 동경으로 간 아나운서가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다. 그중 한사람인 위진록
아나운서도  예외일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방송에서 오늘날
표준어나  음의 높고  낮음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받는 까닭이
 어쩌면 한때나마  아나운서 공백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얘기들도 한다.
 
 필자 또한 전쟁으로 인해 아나운서 훈련이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못한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우리말 전통이 오늘의 아나운서 계에
 되살아나고 있음을 다행한 일이다. 전문 아나운서가 아닌 사람들이
방송의 주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이 남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아닌 비전문가들도 방송 출연자라면,
 영어로 말해 최소한 대학과정의 스피치 코스를 마스터한 사람들의
 방송이 되길 기대한다는 게 또한 위진록 씨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는 전쟁 당시 3년 가까이 아나운서 교육을 마치고 실무교육을
 끝낸 후 곧바로 동경으로 가버려 우리나라 방송계에서는
 원망의  대상이 된 점이 조금 아쉽다. 현재 미주
한국 문인협회 부회장직을 맡아 활동하는
그는 1928년 4월 2일생이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앞서 언급한대로

 1947년 7월 방송국에 입사한 그는 1950년11월 VUNC

아나운서가 되었다. 1972년 7월 도미한 그는 올해로 이민생활
19년째를 맞는 그는 여전히 방송에 깊은 애정이 남아 서울에
오자마자 방우회를 찾고 KBS방문을 청하였다.
 
 60고개를 훨씬 넘긴 위진록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중앙일보 칼럼에 노익장을 이렇게 과시하고 있다.
<때로는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소리를 지른다. 나이 먹어 신체에서
일어나는 노화현상을 느끼면서 목소리만은 아직 탄력적이라고 자부하게
된 까닭은 평소 자동차속에서 발성연습을 한 덕인지도 모른다.>  고국에
 발을 딛자마자 방송국과 방우회를 찾은 위진록씨. 방송에 대한
사랑도 많은 때문이겠지만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탁월한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기도 할 것같다.
 
그는 최창숙 아나운서를 부인으로 맞이해
동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부인
최창숙씨는 동그란 눈매의 뛰어난 미모뿐 아니라 당시
방송편성표 작성은 물론이고 스튜디오 배정까지
 도맡아 일했던 지성적이며 매력 있는
여성방송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미국생활 19년이 되는 '하이 미스터 위'.
그는 자신이 미국생활에서 겪은 경험과 체험으로 얻은
인생철학을 담아 '하이 미스터 위'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후대에는 이 책이 이민생활의 한 지침서가 될 것 같다.
그는 부인과 함께 미국의 어느 해 변가에서
 10년 넘게 햄버거 장사를 했다고 한다.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작은 점포에서
위생복 차림으로 타국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으니
 그 고생됨이야 어떻게 말로 다하겠는가.   때로는 검은 피부의
 불량배들에게 시달림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러나 위진록씨는 어려운 이민생활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2남1여를 야무지게 키워냈다.
그 자신도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황색인종이라는
 콤플렉스를 벗고,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백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가 된 것 같다.
 
두 아들이 미국사회에서 변호사와 의사의
자격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딸도
 여변호사로 미국사회에 군립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얼마 전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우연찮게 신의주에서 그의 형수를 45년 만에 만나보았다고 한다.
 왕년에 VUNC, 유엔군 총사령부 아나운서가 북에 갔다 왔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군 총사령부 선전전에  참전했던 그의 이력을
 감안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새삼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였다.    "아 글쎄 북경에서  조선민항을 타고 평양으로 갔는데,
 비행기 안에서 간식이라고 주는 게 삶은 달걀 한 알이  아니겠어요."
그는 북한 방문길에 겪은 얘기를 이렇게 풀기 시작하였다.
 
 달걀 한 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 항공사도 삶은 달걀을 껍질째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민항이 내놓은 그 달걀을 통해
 위진록씨는 돌아가신 모친 생각이 나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한다.
달걀 한 알이 45년만의 귀향길에 어머님을 떠올리게 하고
눈물을 글썽거려야할 순결한 인성을 자아냈다면서
위진록씨는 말을 잇지 못한다.
 
"평양 사범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어머님이
삶은 달걀을 한 꾸러미나 갖고 오셨는데 어머님 앞에서
 열 알을 혼자 다 먹었던 기억이 나요. 어머님도 함께 한 알드시라는
 말도 하지 않고서……." 45년만의 귀향길에 얽힌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민족은 하나다'라는 게 아니라 '조선은
하나다'라는  북의 구호가 대중심리 속에서 묘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는 위진록씨의 말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12월 26일자 로스앤젤레스 발행
중앙일보 위진록 칼럼'조선은 하나다'라는 그의 글을
일부 소개한다. "범민족 통일 음악회 참관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가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속사람들과 같이 구호를 몇 번 외칠 기회가 있었다.
어떤 때는 그 구호들이 자연스럽게 번져 나왔고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유도된 적도 있었으나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우리들을 큰 감동의 소리
요동이 속으로 몰아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걸린 것은
'조선'이란 말이었던 것 같다. <중략> 나 자신으로 말한다면
 지금까지 '한국'혹은 '대한민국'을 써온 사람이다....
 
<중략>....
 
'한국'과 '조선'에 대한 내입장이 대강
 설명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가 북한에서 소리높이
'조선은 하나다'하고 구호를 외친 것이다. 모두가 분명히 '조선은 하나다',
 '조선은 하나다'하고 입을 모으는데 나 혼자 '한국은 하나다'
 '한국은 하나다'하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략>
 
우리는 통일에  대해서 말할 때 보통 '조국은 하나다,
민족은 하나다'에서 시작한다.<중략> 나는 평양에서 '조선은
하나다'를 외치면서 그들의 통일에 대한 열의에 완전히 압도 당하였다.
그 열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몰아놓은 힘이 무엇인지 앞으로 곰곰이
 생각해  볼 작정이다."   평양을 방문해서  일가친척들을 만나고
금강산까지 구경한 그이지만 '한국'과 조선'이란 음성학적인
 이질성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던 것으로 볼 때 바로
언어의 차별이야말로 결과적으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걸림돌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더더욱 걸프전쟁 와중에 스커드미사일을
생산해서 이라크에 팔고 있는 북의 오판이 두렵기도 하다.
위진록씨와의 대화는 북한이야기에서 자연히 걸프전쟁 이야기로  
넘어갔고 마치 우국지사나 된 듯 열을 올렸다.  바른말 보도상 시상식에
가야할 시간에 쫓겨 우리들의 대화는 끝났다. 그는 귀국한 기념 선물로
  매주 한 번씩 써온 칼럼 복사판을 남기고 갔다. 미국교포를 상대로
하는 신문 칼럼 '이 아침에'에 '우리말이 무너지고 있다'라고
전방송인 위진록시는 외치고 있었다.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은 이 전기는 읽을 만하다'
'겨울밤 진화로 가에서 밤 구워 먹던 시절이 그립다'
 '성적의 상 하 가릴 것 없이 상을 받았다' '산 어머니 산에
 버리니 이름하여 고려장' '병많은집, 선박엔 약병만 가득하다' 고
.저장단이 틀리면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제목들이
 재미있어 몇 개 소개하였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을 켜놓고
눈을 감은 채 흘러나오는 말만을 들어볼 때가 있다.
그러면 가끔 이것이 과연 한국말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는 말이 들려온다.
<중략> 영상을 보면서 들으면 별반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도 눈을 감고
 들으면 전연 달라진 다시 말하면 우리말이 영상이라는 시각적인
 메커니즘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글픈 이야기다.
 
" 방송인답게 여전히 탄력성 있는 음성을
 자랑하는 왕년의 아나운서로서 주장할 만한 얘기들일 터이다.
 고난의 이민 생활 중에서 비록   햄버거장사로   고생은  하였으나
남달리 자식농사는 잘 지은 위진록씨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의 아내 최창숙 전 아나운서의 병세가
 다소   호전되어,   서울 나들이 길에   공항까지 자동차를 몰고
배웅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또한 귀로에도 공항으로
 마중 나왔으리라 믿고 부인의 병이 완쾌되길 빈다.
 
 
자끔까지의 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
우회장 시절에 쓰셨던 내용으로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글은 1991년에  쓰셨습니다.  

 

문시형님

  
 
 다음글은 위진록님이 KBS사우회보
2008년 9월호에 기고 해 주신 내용입니다.
 

 

아래 글은 6.25발발 60년을 맞아 KBS 사우회보에 특별기고한 내용입니다.

 

 

 
위진록님의 글을 더 보시려면
아래 제목 영문자 주소를 클릭 하셔요.  
 
 
 
 

 

 

 

위진록님 관련 사진을 모았습니다.
위 가운데는 2007년  5월 1일자로 발행된 재미방송인협회
30주년 기념호 표지이고 왼쪽 사진은 이 책 인터뷰 기사에 실린
위진록님 근황입니다. 위진록님은 아나운서가 되기전에, 성우를 하셨고
위의 오른쪽은 최초의 어린이 연속방송극 똘똘이 모험 방송 장면입니다.
위진록님은  이 프로그램에서 아저씨역을 하셨고 ( 가려서 안보임)  왼쪽은
연출하신 현재덕님, 그 옆이 프로듀서 배준호님, 가운데 한복입은 분, 해설
 홍은순님 ( 송현식 회원님 어머니로 사진 제공 )    똘똘이역과  복남이
역은 경기 중학에 다니던   윤승진군과   엄규성군이  맡았습니다.      
우리나라 연속극은 어린이  방송극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님이 VUNC가 오키나와에 있던 시절 한기선,

윤길구, 조남사님이 위로차 들려 찍은 사진으로 오른

쪽이 위진록님이고 여자분은 김복자님입니다.

 

 

1991년 우리나라를 방문, 여의도

KBS청사 앞에서 촬영하신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