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방송원로 문제안 / 문시형님 글

이장춘 2011. 3. 31. 13:07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방송원로 문제안 / 문시형님 글

 

  
오랜기간 저에게 메일을 받으시면서
간간히 답글을 보내 주시던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이 3월 30일 밤  메일 한편을 보내주셨습니다.

더이상 메일을 보시기가 어려우시다는 말씀이어서 그동안 제가

보관하고 있던 문제안 선생님의 아우이자 방우회 회장

이셨던 고 문시형선생님이 1991년에 쓰신  

 

 "방송기자 1호, 해직기자 1호가 된 원로방송인 문제안"
 
이란 제목의 글 한편을 불로그에

올리고  이후부터는 꼭 필요한 글만 

보내 드리도록 하려고 합니다, 

 
문제안 선생님은 대한민국 방송기자 제 1호

이십니다. 1920년에 테어나 1943년부터 방송국에서

일 하셨고 1945년 해방되던 그 다음날 8월 16일부터 방송기자가

 되셨습니다.  문제안  선생님으로 부터 제가 받은

메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이가 아흔(90) 하고도 둘(2)입니다.

그래서 눈이 시원치 못합니다. 시원치 못할 뿐만 아니라,

곧 피로혜서, 눈에서 눈물이 납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것도

제대로 못 봤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옷볼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이제 고만 보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부탁합니다. 오늘로서 끝내주시기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부탁만 드리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씀과 함께 글을

끝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1.3.30. 문제안

 

 듣고 계시는 육성은 1945년
10월 17일 환국한 이승만 박사를
처음 만나셨을때의 예기를 들려주시는
문제안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선생님은

2012년 초까지 보내드린 메일을

보셨지만 6월 17일 노환으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세상을 뜨실때의 글 두편을 링크했습

니다,문제안 선생님 글은 본 춘하추동방송

 불로그에 여러편 올라있습니다.

 

TV방송 창설자 오재경,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http://blog.daum.net/jc21th/17781360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300

 

 

 

 빙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고 문시형 선생님의 글
 
 

 

이번처럼 망설인 때가 없었다.
형님에 관한 것을 동생인 필자가 써야할
것인지말아야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방송 인물사에 등장하는 한 방송인으로서
객관적으로 써보기로 결심했다.
 
필자의 중형 문제안(文濟安.72세)은
괴팍스럽게 당돌한 고집하나로 70평생을
살아왔고,남의 여생도 그렇게 살아갈 방송원로의
 한분이다."고개 숙이며 살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이 얘기가 굳은 신념이란 것을 표정으로 나타내곤 하셨다.
정말 그렇다. 나의 중형 문제안이 살아온 지난 세월은 일그러짐 없는
 하나의 직선으로 일관 하였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딱하리만큼 순진하기도 하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면이 너무나 많다. 괴팍스러울
 정도로 고집스럽고 이것저것 볼 것 없이 할 말은 해버리는
성품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져가는 일이
많은 편이다. 그가 멀리하려는 것은 아닌데
그분의 성질 때문에 상대방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문제안'이라는 이름은 조고계(操고界)에
 뿌리박은 원로의 한분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자랑스럽기만 하다. 문제안 선생이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3년 5월부터.1949년4월까지 6년 남짓의 세월이었는데
그 중간에 통신사. 신문사로외도한 1년을 빼면
실제로는  5년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세월이 그에게 있어서는
20여년에 족히 맞설 만큼 파란만장하였고 온갖 풍상을
겪게 한세월이었다. 방송국에서의 파면. 재발령. 의원사직으로
이어지는 큰 변화를 단 5년 동안에 겪었기 때문인지
 사건마다에 얽힌 사연이 무궁무진하다. 

 

1943년이라면 덧붙여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제국주의가 승승장구, 곧 아시아 전역을
집어 삼킬 듯이  기고만장하던 무렵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정황설명은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 무렵 경성중앙방송국 방송부 제2보도과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이로써
처음 직장인이 되다.
 

 

 

이전까지는 연극에 미쳐있던
그에게 방송국 아나운서란 걸맞은 직업이었을까.
천만의 말씀이었다. 그는 이덕근(李德根), 윤길구(尹吉九),
장운표(張雲杓), 홍준(洪駿)선생들과 아나운서 동기이다.
남달리 글재주가 좋다는 이류로 필봉을 휘둘렀기에
오늘날 한국방송기자 1호임을 자타가
공인하지 않던가?
 
자랑 같지만.... 이 무렵 그는
 '동기호테'혹은 '면도칼'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어릴 때의 별명은 '꼬맹이'였다. 방송재직중의 첫 번째 시련은
 엉겁결에 휘말려 버린대서 비롯됐다. 1945년의 8월은 비껴가고
 9월이 되자 광복을 안겨준(?) 미군이 입성하게 된다.
 
경성중앙방송국이 '나가시마'국장의 손에서
 1945년 9월9일 '헤이워드'대령의 손에 넘겨진다.
상황은 이때부터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방송은
미국 군정청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고 움직임의
형태가 미군정 책임자의 성격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존 R.하지중장.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농부출신 군인으로 그저 무사히 군무를 마치고
귀국해 농장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하지중장이
가장 꺼려했던 점은 까다로운 문젯거리(?)가 생기는
 것이었고, 그래서 '무사안일'이란 낱말이 그 뜻을
 제대로 발휘하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런 가운데 방송은 '스팟'하나라도
 군정아래의 공보처 검열을 받아 처리해야했는데
 이무렵 문제안 기자는 검열단의 '알렌'소위와 빈번한
접촉을 해야만 했다. 1945년 10월 16일쯤으로 기억되는데
 건국준비위원회 공산계열의 선전책임자 최성환이란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네주면서 저녁 7시뉴스에
어떤 내용을 보도하라는 사뭇명령조의 요청을 하더란 것이다.
건준(建準)에서 조각(組閣)한 각료명단이었는데, 이미 미군에게
 편집권을 빼앗긴데다 최성환이란 자의 오만불손한 태도의
그 열화 같은 성미에 불을 당기고 말았다.
 
결국 그는 최성환이 아나운서에게 넘긴
 원고에서 문제의 조각명단을 다시 빼내 버렸고 따라서
 이날 그 방송에서는 각료명단이 보도되지 못했다.
이일로 건준은 골치 아픈 사건이 터졌다고
아우성하던 끝에 마침내 '방송중단'이란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편집권의 침해, 당돌한 그의 처사,
그리고 미군정의 무사안일이란 이 세 가지 요소가
우리 방송사에 끝내 방송중단이라 큰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17시간이 방송중단. 천재지변이 아닌 인위적인 유일무이한
방송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고개속이며
살고 싶지 않다는 그는 70평생을
그 고집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겨지는 홀로 깨끗하고
우뚝 서려는 강인함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만 화제를 돌려 이른바 '의견서'를 제출했다가
사문위원회에 회부돼 파면된 사연을 들어보자.
 
1945년12월 어느 날 모스크바 3상회담을
계기로 '조선에 신탁통치를 편다'하는 소식이 외신으로
전해지자 장안이 벌컥 뒤집힌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선생은
물론 심지어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까지 말도 안 된다며 반탁을
 고수하던 무렵이어서 당시의 문제안 기자는 우국지사들을
 두루 찾아 취재에 나섰고 기사를 만들어
검열당국에  뉴스원고를 넘겼다.
 
12월 30일 오후7시 뉴스용 원고는
 끝내 햇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사건은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검열단의 알렌소위는 사안이
 중대한 만큼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면서 차일피일
검열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러곤 원고를 깔아뭉개고 말았다.
그때 마침 그들이 방송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독려하게 되고 문제안 기자는 '바로지금'이라고 생각하고
 문제의 의견서를 제출한다. 1946년 5월 27일. 문제안의 의견서는
 "가장 민주적이어 야할 당신들이 언론의 자유를 짓밟았으니
자리에서 물러나 귀국하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예의 그 고집이 또 발동한 것이다. 무언중의
공감대가 방송국 안에 팽배했다고 한다. 방송국은 발칵 뒤집혔고
검열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사태수습을 위해
우왕좌왕  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에선 "신탁통치 문제로 장안이
들끓고 있는데 방송국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너희들에겐 민족정기도 없느냐" 하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이날 이후 문제안 기자에게는 방송업무에서 손을 떼라는
미군정 당국의 지시가 내려졌다. 1946년 6월 어느 날.
광복 후 최초의 방송국 사문위원회가
정당국의 명령아래 소집됐다.
 
민주주의의 본보기라도 보여주려고 했던지
재판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당시 이혜구 국장을
비롯한 방송국 간부들과 윤길구. 윤용노. 전인국등 직장동료
 18명은 문제안 구제탄원서를 사문위원회에 접수시켜
문제안 기자에게 최후 진술기회를 부여했다.
 
"제발 고집 부리지 말고 한번만 기를 꺾어요.
탄원서도 접수했으니 당신하기에 따라서 상황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동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문대에
 오른 문제안 기자는 끝내 그들의 만류를 거절하고 만다.
또 한 번 고개 숙이며살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이일로 그는 1946년 7월 25일
파면처분이 내려져 방송국에서 쫓겨나고
말았다.그는 이날 생전 처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고,
 윤길구씨등교분이 두터웠던 동료들과 즐기지 않던 술을
 폭음하면서 방송에 대한 미련을 다독거렸다고한다. 
 
다음날로부터 조선통신. 경향신문
(1946년.10월1일 창간).중앙일보. 국제신문으로
전전하면서 1년감짓 외도를 하게 된다.한번만 고개를
숙였던들 그의 인생은 지금과는 퍽 달랐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방송인 문제안과 방송국과의 인연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그의
아내(양숙자.60세)와 송영호(당시 방송국 편성과장)선배
부인과의  만남이 계기가 돼 송영호과장을
 찾아뵙게 되었다.
 

 

 

"이봐! 헤이워드도 갔고  알렌도 떠났어.
그러니 함께 일하지 않으려나?" 국제일보에 재직하고
있던 그에게 다시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1947년 7월 1일 다시 방송국편성과로 발령받아
 프로듀서로  일하게되었다. 아나운서. 기자, 그리고 프로듀서. 
당시 높은 청취율을 기록한 '라디오 3년'과 '스무고개'는
비록 외국방송의 것을 모방했지만 문제안 프로듀서가
 처음으로 시도한 프로그램이 엇다.
 
윤용노. 전인국 아나운서가 함께 제작을 했다.
 1948년12월 연말특집으로 방송국이 부산하게 움직일 때
그 역시 '1년을 돌아보고'라는 특집물 제작을 위해 인천부두에
 서 있었다. 귀국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서재필박사등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이날따라 인천부두엔 잿빛 먹구름이
두텁게 드리워졌고 진눈깨비가 흩날려 스산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독립된 환희의 기분도 채 가시기 전에 한 많은
시름이 안고 다시 고국을 등지는 서재필 박사의 쓰라린
 가슴처럼 하늘은 답답했고 절로 솟아나는 감상적이
 기분은 진눈개비가 대신 말해 주었다.
 
문제안 PD역시 그랬으니 서재필 박사의
 심경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박사님. 이제 언제나 다시
 환국하시렵니까?" "글쎄요. 봄풀이 푸르옵거든 다시 돌아오리다."
어느 시귀에서 들어봄직한 '봄풀이 푸르옵거든 돌아오리다.'라는
 서박사의 이 한마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더라고. 글쟁이가  
감상에 젖어서는, 더구나 방송은 더욱 그렇거늘 한사코 
이 한마디를 넣어 '1년을 돌아보고'원고를
데스크에 넘겼다.
 
'봄풀이 푸르옵거든 다시 돌아오리다.' 라는
 글귀를 삭제하고 달리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삭제여부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이 오래도록 지속됐고 당시 이관희(李觀熙)국장의
 집요한 요구에 처음으로 뜻이 꺾여야 했다. 개작을 하였고 개작
때문에  생긴 번민으로 기분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은 절대 거짓을 써서는 안 된다'
'권력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돈과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이러한 신념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이다. 결국

그는 "봄풀이 푸르옵거든 다시 오리다"라는 세재필 박사의

진눈깨비 날씨에 걸맞은 우울한 한마디를 "이승만
박사가  물러내면 다시 오리라"라는 뜻으로
해석해 버리는 치졸한 생각들에 환멸을
느껴 방송계를 떠나고 만다.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방송기자 1호로 기록되는 문제안은 경남 진양땅
곤양이란 한촌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작달막한 키에
총기만이 살아있는 눈동자, 어디 그뿐이랴. 동안(童顔)에
호호야(好好爺)이신 그는 서울 효창국민학교와 양정고보를 거쳐
 명지대학 창작문예과를 졸업한 고집불통 일본 유학생이다.
 현재 마포구 용강동에서 조용히 생활하시는 그이는
'바른 우리말' 계승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1988년 10월 18일 유엔총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연설에서 박수가 몇 번인가 터져 나와 장내는 더욱더
무르익은 가운데 연설이 끝났다. 그런데 우리대통령의 마지막
 마무리 인사말이 '감사합니다.'였다.  아뿔싸, 대통령은
 한개인이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고맙습니다.' 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중국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감사합니다가 뭔가.
역시 우리나라는 중국의 속국이란 말인가?> 그만해두자.
또 괴팍스런 그 고집이 발동할는지 모를 일이다.
나라 사랑만큼 우리말 사랑으로 일관하고 있는
 문제안 선생, 바로 나의 형님에 관한 얘기는
 이정도로 접어두고 싶다.
  
 

글쓰신 문시형님입니다.

이 글은 그때의 방우회 정항구님이

보관 해 오시다가 보내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