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한국 드라마의 선구자 김희창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이장춘 2011. 3. 17. 10:36

 

 

 

 

 

한국 드라마의 선구자 김희창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노차부를 를 방송하던때의 울연진입니다.

김용구, 이운방, 복혜숙, 서월영, 김연실, 김선영,

 강석연, 박진, 박재행, 김선초, 윤성님등 그 시대의

 이름있던 배우들이 출연했습니다.

 

 

 

 

 

 '1934년에 라디오 플레이 미팅의 결성을
봐서 방송극 '노차부'를 그해 8월 29일에 방송했는데  
이 '라디오 플레이 미팅'은 토월회의 일원이던 윤성무(尹星畝)와
 김희창(金熙昌)의 주도로 발족된 것으로 드라마
 분야의 개척자 구실을 했다.'
 
 이글은 한국방송공사가 펴낸 한국방송
60년사에 기록된 것이다. 한국방송 60년사의 기록을
굳이 인용한 것은 김희창 선생이 이 나라 방송의 산증인으로서
 드라마의 기초를 닦아 오늘이 있게 한 명실상부한
선구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희창 선생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난 신학문을
 배척하는 부친 덕에 13세가 되어서야 겨우 4년제
보통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익진서당에 8년간이나 다녔지.
그러니까 둥구재(지금의 냉천동 근방)에 있는 서당인데
 어릴 때부터 나가게 되어 훈장선생님 무릎에 안겨 천자문을
읽기 시작했지." 까마득한 70여 년 전의 일을 더듬으면서 요즘 말하는
 학력이 별로 없음을 강조하신다. 4년제 보통학교를 나와 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7세에 휘문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2학년
 1학기에 일어난 동맹휴학 덕분에 학창을  떠났으니
학력이 없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희창 선생은 1930년대 '토월회'에

관여하면서 우리나라 문예활동에 진력한바 있어 자타가

공인하는 신학문의 선구자이니재미있는 지난얘기다. 1926년부터

'조선극우회'가 결성되기도 하고'토월회'가 중심이 되어 '혈육'을 방송한

것은 방송계에 널리 알려진 일이며 '라디오극연구회''무대예술인회''경성방송극 협회'

'극예술 연구회'등을 꼽을 수 있다. 1933년 4월 26일을 기해 JODK가 우리말과

일본말을 구분해서 이중방송을 시작하게 됨에 따라  우리의 연예방송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드라마도 심심치 않게 등장해서 김희창선생이

윤성무씨와 함께 발족시킨 '라디오 플레이 미팅'등 

극단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58년에 방송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김희창 선생은 문예부문(드라마)에 공헌한 공로로
 제2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3년 초봄의 일이다.
1961년에 텔레비전이 새로이 등장하였지만 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은 여전히 라디오 일일연속극이었다.
 
 당시의 연속극은 끝나자마자 영화업자가 달려들어
 극본(대본)을 사자고 성화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러기에 드라마
작가는 연속극 집필을 열망하고 실무진에 미소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방송국의 드라마 실무진은 연초부터 원로 작가 순으로 순위를 매겨
작가에게 집필을 요청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는 대환영이며
청탁에 응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바로 차례가 김희창 선생으로 돌아왔는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연락을 했는데 김희창선생의 답이
 없다는 실무진의 보고이다. 편성의 선배인 배준호씨는 김희창 선생을
'겉으로는 부드러운 양반이지만 특히 대인관계가 유한 듯 하면서도
 끊고 맺음이 어름짱같다'고 한다. 문화방송 라디오가 개국한  1961년
 가을,방송부장인 배준호씨는 개국 일일연속극 집필을  김희창
 선생께 간곡히 부탁해서 집필승낙을 받았다.
 
무사히 개국방송을 마쳤음은 물론이었다.
김희창 작 일일연속극은 순탄하게 매일같이 안방을
찾아들었다.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일일연속극은
매일매일 이어져갔다. 그러더니만 해가 지면 울려오기 시작한
연속극이 아직도 이야기 할게 많은데 급행열차와도 같이
마무리 짓기에 바빴다. 마침내 보름째 되는 날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방송부장인 배준호씨였다.
 "배준호씨, 원고료도 줄 수 없는 방송국은 그만 두시오.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아닙니까? 글 쓰는 사람에겐
원고료가 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인데 원고료를 줄 수 없으면
방송국 문을 닫아야지." 곤혹스러움을 느낀 배준호씨는
죄송하다는 말을 공손히 김희창 선생에게
 올리고 물러섰다고 한다.
 
거의 쉰 편이 되는 단막드라마를 쓴
김희창 선생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데뷔작이기도한
 '노차부(老車夫)'를 꼽을 듯이 말문을 열다가 고개를 흔든다.
 "대표작을 꼽는다면 '소슬바람'이 되겠지. 그게 단막극인데  해방 후의
 작품이오." 여든이 넘은 노작가 김희창선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소슬바람'에 취한 듯 줄거리를 일러주신다.

 

 

위 사진은 1959년에 그무렵 방송 출연이 많던

성우들과 김희창님이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반백이 넘어 우이동 밖 한적한 시골로
은둔생활을 하는 퇴직교장선생의 이야기로 그 많은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나 보다. 사전예고도 없이
 찾아온 제자가 당장 주례를 서달라고 떼를 쓴데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주례를 맡으려면 주례다운 옷차림도 해야 될 처지인데 이도  여의치
 않은데다 주례를 맡지 말라는 안사람의 눈총이 따갑다.
 
 돈도 많고 세력도 당당한 국회의원이
주례를 맡기로 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
못 봐주게 되었으니 교장선생님이 맡아 주셔야 되겠다고 생떼다.
한평생 중에 가장 뜻 깊고 중요한 결혼식을 맞은 제자의
 사정이 딱해 마지못해 주례를 맡기로 한 교장선생님은
허둥지둥 넥타이를 매고 뿌옇게 않은 먼지를
털면서 중절모를 쓴다.
 
이때 대문밖에 찝차가 들이닥치고 빵빵한다.
주례를 맡은 국회의원이 오기로 되었으니 빨리 가자는
 성화이다. 신랑인 제자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찝차를 타고 떠난다. 떠난 찝차 뒤엔 뽀얀 먼지가 인다.
이를 본 교장선생님은 상을 찌푸리고 돌아서서 우이동 골짜기
오솔길로 발길을 옮긴다. 옮겨가는 발길사이에 풀잎이
 너울거리며 솔밭 사이로 소슬바람이
주름살을 어루만져준다.
 
소슬바람... 지난날의 교단과 떠들썩한 교실 안
 제자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다지도 돈과 권력이 전부일까.
드라마의 선구자는 마치 자기가 그 교장선생님이나 된 듯
창밖을 내다본다. 사오십 대의 청취자라면 아마 '로맨스빠빠'를
기억하겠고 '또순이' 를 연상하며 미소를 지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희창 선생의 역작이다. 또 앞서 말한 '노차부'와 '소슬바람'외에
 '탑' '어부 살이' '기러기가족' '삼국통일' '만고강산'등의
 드라마를 쉽게 꼽을 수 있다.
 
이 작품들 속에는 꾸밈새 없고 소박한
김희창 선생의 인간미가 그대로 배어있다. 선생은 또
희곡도 많이 썼다. '반군' '비석' 그리고 1973년 민예극장 창립공연작인
'고려인 떡쇄'등이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 '엥헤야 엥헤 비오는날이면
공치는 날이요 엥헤야 엥헤....' 일일연속극 주제가 치고 반주없이
남성중창(블루벨즈)만으로  불리워진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만 26년전인 1963년의 일이다.
무반주의 구수한 목소리로 불려진 일일연속극의 주제가
 '엥혜야 엥헤...'반공을 국시로 한 5.16군사정권은 신경질적이어서
'비오는 날이면 공치는 날이요'라는 가사에 유달리 신경을 곤두 세웠다.
전파를 타고 방송된 지 사흘 만에 아니나 다를까 정보부 아저씨가 찾아왔다.
 좀 이상하지 않느냐는 항의 아닌 질문이다. 질문이기에 '서민의 애환을
그린 게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너그럽게 대답했다.
 
당시 또 하나의 인기프로그램인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엥헤야'가 나간 지 한주일도 안되는데 노래자랑에 등장했다.
그야말로 불에 콩 볶듯이 유행의 물결을 장안 아니 전국적으로 몰아쳤다.
 인기절정에 오른 일일연속극 '엥헤야'가 어떻게 김희창 선생의
붓에 오를 수 있었을까. 어떠한 작으로 엮어졌을까.
 
해답이 풀리지 않은 채 세월은 흘러 흘러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답을 얻게 되어 후련 함속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젊어서 고생 많이 했지요. 20대 청년시절
 견문을 넓힌 다기 보다 세상 구경하기 좋아 무전여행을 식은 죽 먹듯이
많이 했지요. 소위 도항증도 없이 갈 수 없는 일본에 건너가 닥치는 대로
 육체노동을  하면서 대만으로 동경으로 그뿐인가요 북해도 삿포로로
 가서 끝이 없는 허허벌판 풀밭에 뒹굴기도 하고  또 길을
떠나기도 했지.’ 선생은 당시 육체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발길을 내디딘 김에  지금의 사할린인 '가라후도'에까지
 갔었는데,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서 들려온 사할린 동포소식을
 되새기면서, 구분들이 바로 선생과 함께 탄광에서 고생하던
분들이  아닌가. 해서 가슴이 아프셨다고 한다.
 
"사할린 탄광에 온 우리 동포들은 나올 수가 없었어.
그것이 바로 강제노동이었어. 소위징용으로 강제로 끌려왔기에
 사할린을 떠날 수 없었지. 나는 탄광생활 2년 끝에 사할린을 떠났지만
 노동의 된 맛을 깨달은 좋은 경험이었지."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서민의
심정을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린 '엥헤야 엥헤'는
 김희창 선생의 마음속에 깔려있는 인생철학이
표현이기도 했으리라.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하는 김희창 선생은
 벽에 걸린 원숭이 액자를 쳐다본다. 두 평 남짓한 김희창선생
서재에는 색다른 액자가 걸려있다. 엉거주춤하게 반쯤 허리를 굽혀
 등을 돌린 원숭이 그림에 불경을 해설했다는 순한문으로 된 글이
 가득 차 있는 액자이다. 신식말로 한문에 도통한 김희창 선생의
 한 면모를 대한 것이다. 김희창 선생의 당시 드라마를
 회상하는 말은 필자에겐 신기하기도 했다.
 

 

김희창선생님과 연출(효과) 이상만, 음악 김용환님이 드라마 제작을 얘기하고 있다.

 

 

"당시엔 드라마라는 정의가 없었지. 라마라기보다
 극장무대에 올려진 연극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지.
방송용 드라마 대본이 아닌 연극 대본을 그대로 쓰곤 했었어.
 3막5장의 연극이라고 하면 막이 바뀌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무대상황을 설명한 다음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깐
 '배경에 식료품 가게 앞에 인력거가 세워져 있고
인력거꾼은 머리에 띠를 질끈 메고 땀을 닦고 있다.
 
', 이런 식으로 무대상항을 일일이 설명하는 해설이 있었지.
" 신기하기도하고, 어떻게 보면 참으로 따분한 드라마가 아니었나
생각되기 하였다. "전파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그때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연극을 감상한 기분이 들어 인기가
대단했어." 웃음을 머금은 김희창 선생의
안면은 한편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오는 백발 막대로 막으려니 주름살이
 제일 먼저 알고 오더라'하는 예시조가 생각나서 억지로
 정색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희창
선생은 30평 남짓한 올림픽 공원의 대림아파트 13층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시다. 혈압관계로 다소 행보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김희창 선생은 조용히 생의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고 계시다. 이미 서재정리는 다했고 시간의
 무료함을 느끼고 계신모양이다.
 
"내가 일제 시대에 철이 들었으니
 보던 책의 대부분은 자연히 일어로 쓴 책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게 아니겠어.  그래서 그 많은 책을 내 일생으로 휴지가
 되기 쉽기에 전부 남에게 기증했지. 그러고 보니 문득 옛 생각이 나서
 책을 찾을 때가 있는데 '아차, 그 책은 어디다 보냈지'하면서
쓴 웃음을 짓기도 하지.
 
"어려운 행보를 따님의 부축을 받아 아파트입구
 꽃밭까지 와서 사진을 찍으려고 포즈를 취한 김희창 선생의
모습은 존경스럽기도 하고 우리 이웃에서 흔히 보는 할아버지의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김희창 선생을 만나고 나오면서 외유내강은
 어떤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글 쓰신 문시형님입니다.
 

 
이 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 
( 한국 방송인 동우회 ) 회장 시절에  쓰신
한국 방송 인물사를 당시 방우회 사무총장이던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열두냥짜리 인생'은

김희창 선생님이 채보한 노래로 60년대의 애환을 담은

 서민들의 삶을 그린 라디오연속극 주제가로 블루벨즈가 불렀습니다. 

김희창 선생님이 노동판에서 구전으로 불려지고 있던 이 노래를

 채보해서 본인이 쓴 연속극 주제가로 활용했습니다.  

 

 

통통이 삼촌님 글

 

김희창 선생님의 영애가 영화배 우  

김정란 님이죠   (무술영화 사학비권등에

출연했고tbc 어린이 드라마에도출연했지요)  

실제로   무술을했던배우죠

 

 

 

 

아래 사진은 1948년 3월 KBS가 모집한
희곡모집에서 김희창 선생님의 " 꿈의 공덕"이  1등에

입선된 다음, 심사위원, 방송국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뒤쪽 왼쪼에서 두번째가 김희장선생님입니다.앞줄 왼쪽부터 연출과장

 송영호님, 심사위원 김진섭님과 윤백남님,방송과장 이계원님이고 뒷줄은 유호, 

김희창, 이백수, 노정팔님입니다.  이 희곡이 방송 되면서 드라마가 활기를 띄었

습니다. 이때 2등으로는 최요안 작 세뱃돈, 3등 조남사작 큰 아버지의

스승과 박창오의 허생원, 원신연 아! 이 청춘 이 입선되었습니다.

박창오는 진방남, 반야월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