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우리나라 방송사에 길이 남을 방송작가의 대명사 유 호

이장춘 2011. 2. 9. 23:04
  

 

 
우리나라 방송사에 길이 남을 방송작가의 대명사 유 호
 
전 방우회 회장 문시형님 유고
 
 

 

히히히히! 호호호호!  20평 남짓한
한국방송작가협회 사무국 사무실 안에
웃음바다로 변한다.  "한 장만 찍지 왜 이리
많이 찍으시요." (농담조) "미안합니다.
 
잘 찍으려고 하는 거니 용서해 주세요
." 유호선생과 본지 사진기자의 대화이다. 사무실에
있던 여직원은 호호호하면 입을 가리고 남직원은 파안대소
 핫핫핫한다. "사진 잘 나오면 한 장 뽑아 줘요."
"네, 한 장 잘 뽑아 올리겠습니다."
 
이 또한 보통 오고가는 말에 지나지 않건만
 사무실 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필자도 덩달아 웃었다기보다
 웃음을 머금은 게 사실이지만 기이한 일이었다. 웃음이 왜 터져
나왔을까?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마디로 그 이유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으나 명랑한 유머적인 유 호 씨의
성품에서 우러나온 게 아닌가 한다.
 
보통 노인과는 달리 빨간 셔츠에 잠바차림,
 거기다 모자까지 쓰고 계신 멋쟁이 할아버지의
말씀이니 젊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는 마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유 호. 이는 필명이며 본명은 유해준(兪海濬)이다.
 방송드라마 작가, 유모어 소설작가 또는 명량 소설작가로 유명
하기에 본명을 따라 유해준이라 하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1921년 11월 15일생이니 금년으로 고희(古稀)를
 지난 지 1년이 된다. 우리나이로 일흔하나가 되는 폭인데
 참으로 정정하시다. 정정하다는 표현보다 청년이라면
지나친 표현이고 장년(長年)이라고 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945년 10월 약관 스물다섯 살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요즈음 말로 연예담당 PD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유 호 씨는 한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를 지낸 일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평생 방송을
 천직으로 했던 방송인이라 하겠다.
 
그는 본격적으로 방송계에 몸을 담은 것은
1945년 10월이었지만 실은 1944년경부터 작가로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유 호 씨의 학력을 더듬어 보면
 방송작가가 될 분이 아니고 화가가 돼야 옳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제2고보 (지금의 경복고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제국 미술학교에 수학
했으니  화가 지망생 이었던 것이다.
 
명문인 제국 미술학교에 다녔다고 해서
한때 우리나라 유일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에서
 포스터도 만들고 심지어 극장 앞 대형 간판도 그린일이 있으며
징을 치면서 무대감독일 을 보기도 했다. 유호 씨는 50년 가까이 된
지난날을 회상하고 사람에게 인연이란 것이었게 마련인가
보다고 하면서 연극의 대가이신 박진(朴珍)씨와의 만남은
 동양극장에서의 첫 만남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방송국에서였다고 말했다.
 
대학을 다닌 젊은 무대감독이라 고 해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유호 씨는 박진 씨를 매우
존경한듯 하다. 우리나라 제일가는 영화배우라 해도과언이 아닌
 김승호 씨가 연출가의지시를 무시하고 리허설 할 때와 달리  무대 위에서

자기 마음대로 연기를 했다고 해서 연출가인 박진씨는 관객이 있건 없건

 무시하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야단을 치고해서 이로 인해

부랴부랴 막을 내린 일이 있었다. 고한다.
 
이일로 극장주 김 모 씨와 다투게 되고
급기야 육탄전까지 벌어졌다고 전하는 유호 씨의
얼굴에는 시종 웃음이 감돌기도 했다. 박진 씨와의 만남을
동양극장에서 있었던 일로부터 설명한 유호 씨는 1945년
10월경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문예담당 PD로서 곤경에
 처한 일은  비록 난처했지만  기분 좋은  통쾌한
일 인양 박진선생의 호탕한 기개를 말한다.
 
박진선생이 드라마에서 미국 사령관인
하지중장과 군정장관인 러치를 일컬어 '멸치'라고
비꼬아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박진 씨와
 '멸치사건'이다.    "도대체 글러먹었단 말이야.  하치인지
( 하지를 하치로 꼬집은 것이다.)러치 인지 멸치인지는
 몰라도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이렇게 비꼰 대사를 오늘에 와서도
기억하고 있으니 가히 당시의 난처함을

 짐작케 한다.방송작가로서 선배인 박진 씨를

존경하기에 옛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다음은 문제안씨와의 만남인데
유호 씨는 동양극장의 무대감독으로 인연을 맺어
 방송국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마치 방송 드라마작가로서
 대성하고 원로로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게 마치
 문제안씨와의 만남에 있는 듯 강조하기에 필자는
문제안씨와 형제간이어서 어색함이 더했다.
 
문제안씨의 소개로 1944년에 그러니깐
 해방되기전해에 방송낭독소설 두 편을 쓴 적이
있다면서 실수담을 '인생드라마'라는 제목으로 방송
작가들의 감춰둔 이야기로 방송작가협회 회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는데 이를 소개한다.   
 
"문형의  소개로  44년도에 나는
(유호)방송낭독 소설을 두 편인가 쓴 적이
있다.  한번은 내가 쓴 것을 내가 직접낭독을 하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바람에 당시 그 프로를 담당했던 송영호씨가
어디한번 해보라고 해서 마이크 앞에 앉기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청색불이 켜지자 심장이 뛰는 바람에 어찌나 빨리
 읽었던지 15분 소설을 10분 만에 끝냈으니
오기란 좋지 않을 것이다.
 
 15분 방송을 10분에 끝냈으니
방송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방송사고로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역시 문제안씨의 소개도 있어
 1945년 10월 문예담당 PD로 오늘의 주인공인 유호선생이
방송드라마 작가로서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 하겠다.
 
1945년 10월 입사 당시 시인이기도한
안서 김억선생이 부장으로 계셨는데 애송이 작가로서
천대 아닌 천대를 받은 일이 기억에 새롭다면서 자신의
 잊지 못할 작품으로 방송소설 '기다리는 마음'과 텔레비전
 드라마 '돼지'를 들었다. 해방직후인 탓도 있지만 당시 소위
문예담당 PD로서 기획에 원고청탁, 낭독자 수배에
이르기까지 동분서주 몹시 바빴다.
 
바쁘기만하면 젊은 시절이니 문제가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일은 청탁원고의 입수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골탕 먹기가 다반사였다. 유 호선생은 이에 대비하고 나름대로
작품을 써 대비를 했다고 한다. 바로 데뷔 작품으로 창작한
방송소설이 '기다리는 마음'인 것이다.
 
당시 상관인 안서 김억선생은 원고를 다 읽고
"좋군. 잘 썼어."하면서 방송은 일단 이번 주엔 보류하고
 다음 주에 방송하라고 지시를 내리니 상사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유호선생은 난처한 처지가 되어
 고심했다고 한다.
 
새로운 편성에 의한 소설낭독이니
첫 회는 기성작가의 작품을 내라는 것이었다.
"기성작가를 제치고 신인 원고를 어떻게 방송할 수 있어.
 원고를 받아오도록 하세요." 신인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꼈으나
 50대인 아버지와 같은 김억선생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주소만 가지고 그야말로 장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원고를
받아와 방송이 사고 없이 무사히 나가도록한 그때가 바로
 엊그제 일 같다고 유호선생은 웃는다.
 
전화연락이 될 수 없던 시절이니
발로 뛰어야 했고 방송시간은 다가오고 하니
정황이 짐작되고도 남을 일이다. 더더욱 녹음방송이 아닌
생방송이니 말이다. 텔레비전 방송의 초창기인 1960년대 초에
개국한 프로그램을 보면 상업방송이어서 'OB쇼'라는 상호를 딴
프로그램이 있었으며 라디오 프로그램(KBS)에도 '경전시간'이나
 '군정청시간' '국군의 시간'등 단체 또는 기관의

 이름을 붙인 프로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이름을 붙여
프로그램 명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TBC-TV 주간 기본방송편성표에  한때 '유호극장'

이란 프로그램이 존재하였다.

 

 

 

 
특정한 드라마작가의 이름을 붙여
'유호극장'.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드라마작가 유호란

이름이 얼마나 시청자에게 어필했었나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한마디로 그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의 인기와 역량이 어떠했기에 주간편성표에
그것도 골든아워에 '유호극장'이 등장했을까 짐작하고도
 남을 이야기다. '일요극장'이 '유호극장'으로 바뀐 일과 같은 경우는
 텔레비전 방송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아니 다채널 시대에 오고 유선

 텔레비전이 등장하는 앞날에도 있기 어려울 것이다. 잊지 못할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서 앞서 열거한 '돼지'는 따지고 보면 4공화국이 저지른

관의 횡포가극에 달한 시절의 부산물 중의 하나이다. '돼지'는

 1971년 8월 21일에  TBC-TV를 통해 첫
방송된 주간드라마이다.
 
내용은 어느 시골대가의 머슴인 '돼지'가
우직한 성품 하나로 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면서도
 주인 영감과 가족을 위해 온몸을 내던져 살아가는 얘기였다.
인간미가 흐르고 흐뭇한 시골 인심이 물씬 풍기는 드라마이다.
주간 드라마로서 50회로 기획된 '돼지'가 26회로 도중하차,
 갑자기 방송이 중단된 사건이어서 유호선생은
 잊지 못할 드라마로 꼽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러니깐 1972년 초의 일이다.
남북회담이 열리고 있는 판문점에 나온 북측대표가
 "남반부 드라마 중 볼만한 것은 돼지뿐"이라는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 관의 강요에 의해 드라마가 중단
되었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중단하라는 압력을 가한 당시의 당국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북의 대표가 '돼지'를 보아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특히 북의 대표를 '돼지'앞에 묶어
 놓은 격이니 결과적으로 예상되는 이드라마의 영향은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났을 게 아니가?
아쉽기만 하다.
 
특히 독일의 통일에 끼친 텔레비전의 위력이
 어떠했었나를 생각하면 당시의 관은 참으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유호선생은 아직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고 하면서
'드라마 네트워크' 제9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이래저래 나는 '돼지'를 잊지 못할 미완성 드라마로 
간직하고 있다. 비록 절필선언을 한 입장이긴
 하지만 죽기 전에 기회가 오면 이것만은
완성을 하고 싶은 꿈이야."
 
'절필선언'을 당장 취소하고 이것만은
완성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살리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
 원고지 빈칸을 매꿔 주시기 바란다. 아니 방송국에선 어떤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툭하면 시청자의 요청에 의한다면서 앵콜방송을 하는데
이 같은 사연을 시청자가 안다면 앵콜박수가 천지를 진동시킬
것은 뻔 한 일이다. 방송문화상에 문화포장이
 한층 돋보일 것이다.
 
고집 이야기가 나왔으니 일화 한 가지를

덧붙일까 한다. 1948년 서울중앙방송국에 이관희라는

 분이 국장으로 부임한일이 있다. 이분과 유호선생과는 괴상한

인연이 있어 이글의 말미를 채운다. 화가라문화인이었기에

정부에서 이관희라는 분을 방송국장으로 임명했는지 모르나

 어처구니없는 말을 해서 안서 김억선생과 유호선생이

주위의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서울중앙방송국을 떠났다고 한다.

 
"방송 원고를 쓰면 썼지 웨 빈 칸을 이렇게 많이 내느냐.
원고료를 떠받기 위한 속임수가 아니냐?" 이국장의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대접치고는 대단히 모욕적인 망언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드라마 원고는 등장인물을 쓴 스페이스가 원고지 윗칸 서너 개를
 비우고 있으니 이관희 국장의 눈에는 대단한 속임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정말 넌센스가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연출되었던 것이다.
중국 글엔 띄는 법이 없으니 그럴 것이라는 양해 아닌 이해를
하려해도 얼른 수긍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임이 떠났으니 되돌아오길 바라나 김억선생이
 내후년이면 백세가 되시고 유호선생 또한 고의를 넘겼으니
부질없는 바람일지 모른다. 다만 '돼지'가 되돌아와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이글은 고 문시형 선생님이 방우회장
시절 1992년에   쓰신글을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님이 보내 주셨습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뉴스<오랜만입니다>동양극장과 인연…

 

 

 日유학뒤 얻은 첫 직장, 계훈·신 카나리아씨와 안면 터

 

문화일보|입력 2011.01.28 14:21|수정 2011.01.28 14:21

 

 

 

유호 전 이사장이 당대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 계기는 지금의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 자리의 옛 '동양극장'과 맺은 인연 덕분이었다.

 

그의 본명은 유해준. 황해도 해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이 몰락했지만 의사이던 형의 도움으로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과에서 2년간 유학생활을 하고 귀국한 뒤 얻은 첫 직장이 '동양극장'이었다.

 

당시 동양극장은 '청춘좌''호화전'등 전속극단을 두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같은 신파극이나 악극을 공연하던 한국 최초의 연극전용 상설극장으로 당대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 1971년 TBC(동양방송) TV 운현궁스튜디오에서 시골 부잣집 머슴이 주인공인 드라마 ‘돼지’ 스태프들과 유호(앞줄 가운데) 전 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돼지’는 주간 드라마로는 처음으로 50회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판문점 남북회담에서 북측대표가 ‘요즘 남쪽 TV에서 볼 만한 것은 ‘돼지’밖에 없구먼’이라는 발언 때문에 정부 조치로 10회만에 중단됐다. 앞줄 오른쪽이 황은진PD(작고). 뒷줄 왼쪽부터 탤런트 서승희(황PD 부인), 김세윤, 정해창, 안인숙(미국 거주), 사미자, 김성원, 김순철(주인공·작고), 헤드카메라맨(카메라감독).

"해방 전 정동의 서울중앙방송국에 내 작품 소개를 해준 사람이 메이지(明治)대 법정대와 한국일보를 거쳐 우리나라 방송기자 1호가 된 문제안(文濟安)씨야. 문씨가 연극·연출을 배우고 싶다며 나하고 연극지망생을 선발하는 동양극장에 가자고 해 끌려가다시피 간 게 연극, 드라마와 평생 인연을 맺게 됐지."

 

그는 1943년부터 1년여 동안 동양극장 미술부와 문예부에서 일하면서 간판과 포스터를 그리면서 당대 문화계를 이끌던 인사들과 교유하게 된다. 유 전 이사장은 "그곳에서 희곡을 쓰던 박진·박영호·임선규·이서구 선생, 연출하던 계훈·이서향 선생, 연구생으로 지내던 배우 김승호·황정순씨, 무대미술 하던 원우전 선생, 신카나리아 같은 가수들과 모두 안면을 텄다"고 회고했다.

 

"극본 쓰는 법을 한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극장에서 일하면서 매일 연극을 보니까 속으로 저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었어."

 

그는 동양극장 연극을 보면서 극본 두 작품을 썼고 청춘좌에서 상연했다. 당시 쓴 필명이 '맑은 호수'를 뜻하는 '유호(兪湖)'였다. 방송소설을 쓰면서 방송작가로 데뷔한 그는 낭독소설(朗讀小說) 두 편을 경성방송국(후에 서울중앙방송국으로 KBS의 전신)에서 방송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1945년 광복이 되면서 10월에 편성부에 들어가 라디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광복 후 처음 방송된 연속 낭독소설 '기다리는 마음' 집필을 계기로 방송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연속방송극 시대가 열린다. 김영수·김희창·최요안·이익·김성민·이서구씨가 연속방송극 시절의 멤버들이었다.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43년 동양극장 미술부·문예부 입사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근무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5년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장 ▲1987년 한국방송 60주년 문화포상 ▲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작사곡:'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전선야곡''삼다도 소식''이별의 부산정거장''고향만리''럭키 서울''맨발의 청춘''님은 먼 곳에''전우야 잘자라''진짜 사나이'등

 

▶<오랜만입니다>"百世淸風 지켰더니 아흔에도 건강… 요즘 드라마? 악만 써"

 

 

 

구술로 만나는 한국 예술사

국립 예술자료원

 

유호(劉湖)

극작가, 작사가

 

출생_1921년 11월 15일

 

본적_황해도 해주

 

 

 

 

 

 

 

 

1939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1942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공예과 2년 수료

 

1942 동양극장 미술부 근무

 

1948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입사

 

1951 경향신문사 문화부 기자

 

6.25 전쟁 중 육군본부 정훈국 문예중대 근무

 

1954 경향신문사 문화부 차장, 부장

 

1962 텔레비전 및 라디오 드라마 집필 시작

 

1980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3 한국방송작가협회 고문 및 교육원장

 

1968 제11회 방송문화상 수상(문예상)

 

1987 한국방송 60주년 기념식 문화포상

 

2000 한국방송대상 특별상 수상

 

1) 대중가요 가사

1940년대 <가을인가 가을>(춘호 작곡, 남인수 노래, 유니버설)

<고향은 내 사랑>(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유니버설)

1946 <목장의 노래>(박시춘 작곡, 옥두옥 노래)

<하이킹의 노래>

1949 <낭랑 십팔세>(박시춘 작곡, 백난아 노래, 유니버설)

<신라의 달밤>(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럭키)

<비 내리는 고모령>(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럭키)

<고향만리>(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럭키)

<선죽교>(김해송 작곡, 이인권 노래, 럭키)

<럭키 서울>(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럭키)

<무정 블루스>(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여인애가>(박시춘 작곡, 장세정 노래, 럭키)

1950년대 <영 너머 고갯길>(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전선소야곡>(손목인 작곡, 이예성 노래, 스타)

1950 <전우야 잘 자라>(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1952 <아내의 노래>(손목인 작곡, 심연옥 노래, 오리엔트)

<전선야곡>(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오리엔트)

1953 <바로 그날 밤>(박시춘 작곡, 도미 노래)

1954 <삼다도 소식>(박시춘 작곡, 황금심 노래, 스타)

<승리부기>(박시춘 작곡, 신카나리아 노래, 스타)

<이별의 부산정거장>(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57 <여옥의 노래>(김광수 작곡, 송민도 노래)

<아무도 없어라>(박춘석 작곡, 나애심 노래)

1960 <카츄샤의 노래>(이인권 작곡, 송민도 노래)

<원일의 노래>(이인권 작곡, 최무룡 노래)

<그늘에 핀 꽃이라>(이인권 작곡, 백설희 노래)

<남몰래 우는 목숨>(이인권 작곡, 최무룡 노래)

1962 <사랑아 별과 같이>(황문평 작곡)

1963 <맨발의 청춘>(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1964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황문평 작곡, 김승호 노래)

<학생부부>(황문평 작곡)

<이 원수야>(김광수 작곡)

<떠날 때는 말없이>(이봉조 작곡, 현미 노래)

<위를 보고 걷자>(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1965 <맹호들은 간다>(이희목 작곡, 군가)

<주책바가지>(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맨발로 뛰어라>(이봉조 작곡, 남일해 노래)

<불타는 청춘>(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1966 <종점>(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말띠 신부>(최창권 작곡, 조애희 노래)

<길 잃은 철새>(최창권 작곡, 최희준 노래)

<남성금지구역>(최창권 작곡, 이시스터즈 노래)

<밤은 알고 있다>(길옥윤 작사, 패티김 작곡)

<겉으로만 그래요>(박춘석 작곡, 남기숙 노래)

<오인의 건달>(이봉조 작곡)

1967 <몽땅 내 사랑>(이봉조 작곡, 현미 노래)

<짚세기 신고 왔네>(최창권 작곡, 김세레나 노래)

<치맛바람>(정민섭 작곡, 드라마 주제가)

1968 <눈이 맞아서>(손석우 작곡, 김상희 노래)

1969 <시거든 떫지나 말지>(손석우 작곡)

1970 <승전의 노래>(황문평 작곡)

1971 <언니의 노래>(김강섭 작곡, 문정선 노래)

1972 <좋아서 만났지요>(이봉조 작곡, 정훈희 노래)

<며느리>(홍영표 작곡)

1973 <왜 왔던가>(김학송 작곡)

<구두쇠와 노랭이>(이희목 작곡)

<진짜 사나이>(이흥렬 작곡, 군가)

1975 <개미의 집>(박춘석 작곡)

1977(?) <왜 그러지>(김학송 작곡)

1979(?) <무교동 이야기>(정민섭 작곡, 박경애 노래)

1980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이봉조 작곡, 이주일 노래)

1985 <우리가 맡았다>(김기웅 작곡, 공군 군가)

연도미상 <그대는 가고>(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유니버설)

<청춘목가>(이인권 작곡, 백설희 노래, 유니버설)

<애정산맥>(박시춘 작곡, 안정애 노래)

<종착의 서울역>(이봉조 작곡, 명국환 노래)

<사랑은 무서워>(이봉조 작곡)

<팔도미녀 만세>(이봉조 작곡)

<슬픔은 나에게만>(황문평 작곡)

<어머니 나라>(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

<친구야 친구>(김준 작곡)

<사나이 맹서>(?)

<두 사람>(이봉조 작곡, 현미 노래)

<감초 아줌마>(황문평 작곡)

<푸른 하늘을 안자>(황문평 작곡)

<그리운 내 아들>(황문평 작곡)

<돌아갈까>(성영택 작곡)

<고향사람들>(박춘석 작곡, 조미미 노래)

<지난 여름>(김희갑 작곡, 영시스터즈)

<명동에 내리는 비>(고봉산 작곡)

<한번 만납시다>(김기웅 작곡)

 

2) 방송극본

1940년대 (KBS R) <나를 기억하십니까>

1944 (경성중앙방송국) 낭독소설 2편(제목 미상)

1945 (KBS R) <기다리는 마음>(연속낭독소설)

1945~1948 (KBS R) 라디오 드라마 다수

1946 (KBS R) <똘똘이의 모험>(조남사 연출)

1950년대 (KBS R) <호호할아버지>

1958 (KBS R) <여름날의 사건>(납량특집방송극)

(KBS R) <봄은 어디엔가>(3.1절 기념 ≪방송극예술제≫)

1959 (KBS R) <개문만복래>(릴레이방송극, 박진 연출)

(KBS R) <푸른 추억>(릴레이방송극 )

(KBS R) <내 가슴에 그 노래를>

1960년대 ( ? ) <밤은 알고 있다> KBS T) <결혼보류>

1960 (KBS R) <공일날은 나빠>(라디오 유모어, 이상만 연출)

1962 (KBS R) <사랑아 별과 같이>(오사량 연출)

(MBC R) <비상선을 쳐라>(조흔파 연출)

(DBS R) <우리 아빠 최고>(변하림 연출)

1964 (KBS R) <신식 할머니>

(DBS R) <연습결혼>(허지영 연출)

(DBS R) <학생부부>(임영웅 연출)

(DBS R) <안녕하십니까>(오락프로. 구봉서 담당, 변현규 사상완 연출)

(TBC R) <이 원수야>(최상현 연출)

(TBC R) <아내 마음 남편 마음>(최상현 연출)

(TBC T) <초설>(허규 연출)

1965 (MBC R) <산비둘기 울어>(이동희 연출)

(DBS R) <공처가 삼대>(변하림 연출)

(TBC R) <특호실 여자손님>(유신호 연출)

(TBC T) <다릿목>(황은진 연출)

(TBC T) <끈덕진 복수>(이기하 연출)

1966 (TBC T) <맞벌이 부부>(허규 연출)

(TBC T) <내 멋에 산다>(황은진 연출)

1967 (TBC T) <치맛바람>(황은진 연출)

(TBC T) <웨딩드레스>(황은진 연출)

(TBC T) <정 두고 가지마>(황은진 연출)

(TBC T) <일요부인>(황은진 연출)

(TBC R) <결혼은 했는데>(김의경 연출)

1968 (DBS R) <언니 시집 좀 가>(이병주 연출)

(MBC R) <1 대 1>(이경재 연출)

(TBC T) <파란 눈의 며느리>(황은진 연출)

(TBC T) <짚세기 신고 왔네>(이기하 연출)

(TBC T) <산비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