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조선 방송협회 방송기술인 인맥

이장춘 2010. 12. 31. 17:50

 

 

 

 

 

 조선 방송협회 방송기술인 인맥

 

 

방송기술인들은  방송 시발점에서부터
시험방송을 할 때나 지방방송국을 설치 할 때나
 이분들의 머리와 손길, 발길이 안 미친 곳이 없었다.
 “여기는 경성방송국 시험방송이 올시다.” 시험방송시절
 라디오에서 울려오던 이 방송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술인 노창성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서울에는 아나운서가 따로 있었지만
지방방송국에는 기술과와 업무과 두개의 과가
있었고 아나운서가 따로 있는경우가 적어서 기술자가
 방송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술과에 방송계가 생기고
또 방송과가 새로 발족한것은 먼 훗날의 얘기다.

방송기술자는 이토록 방송사에 뿌리가 깊다.

 

 

 

 

 

방송국이 서울에만 있을때는

방송기술자 역시 그 수가 많지를 않았다.
노창성은 30년대부터 이미 방송기술자가 아니었다.
방송기술은 한덕봉이  앞장섰고 1929년부터 이남용이 
  방송국과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이남용은 해방후 조정과장을

하다가 방송기술자들의 파업사태로 방송국을 물러났다. 국립경찰 창설때

 경찰에 입문해서 경무관을 지냈고서울시 공무원이 되어 시민회관 관장시절

1972년 12월 2일 민회관의 화재로 순직한 인물이다. 방송기술자가 대폭

 늘어난것은  연희송신소가 새로 생기고 또 10Kw를  50Kw로 늘림과

동시에 지방방송국을 설치할 무렵 고흥인, 이주호, 장문원,

양길승, 황태영, 정일모, 염준모 등 오래도록

이름이 알려진 기술자들이 들어왔다.

 

 

 

 

 

1935년에 일본유학을 마치고 방송국에 들어온
 황태영은  연희송신소 50Kw출력증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한덕봉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리방송국 기술과장이라는 최초의 기술보직을 받았다. (이때 한덕봉도

 함흥 기술과장 보직을 받았다.) 두대의 단파 수신기로 해외방송을 들어오던

황태영은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으로 방송인들이 어려움을 치룰때

가까스로 실형을 면했지만 거액의 벌금을 물고 방송국을 떠났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을 설치한 주인공이다.

 
1937년부터 40년 사이에
훌륭한 빙송 기술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이종훈, 이인관, 김성재, 이규일, 한기선, 김두식, 
신봉순, 양중석, 신상운등이다.  이인관은 오랜기간 방송기술의

총수가  되었고, 이규일은  방송관리국장을  지냈다.  한기선은 전시

기술과장을 거쳐 시설과장을 하면서남산방송국 건립을 주도했다.  뒤에

기감이 되었다.김두식은 경찰 경무관이 되었고,   정일모, 신봉순은  군 통신의

  중추적이  인물이 되었으며, 김성재는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

부터 일하던 방송기술자들은 해방된뒤 여러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많다.

이남용, 김두식과 함게 우리나라 경찰 통신을  창설한   이인화,  최동곤,  이상훈,

 조선기와  군 통신을 창설한 심궁구, 심상웅, 김경원, 이천기, 신상운. 외무부

 통신을 발전시킨 한진동, 주석환 등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이덕,

성기석, 김동하. 조종국  등1943년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옥고를 치룬분들도 이무렵에 들어온 방송기술자다.

 

 

 

 
 

 

방송과 기술을 함게 담당했던
지방방송국에는 많은 방송 기술자가 있었다.
유병은은 1998년에 발행된 방송야사에서 한덕봉의
 증언에 따라 조선방송협회의 지방방송국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산방송국 : 이종성, 한진동, 김정현
평양방송국 : 김한용, 김도현
청진방송국 : 최방진, 장용식
이리방송국 : 이인관, 김호득
함흥방속국 : 김례현, 김원용
대구방송국 : 심긍구, 김석호
광주방송국 : 엄상선, 성기석
목포방송국 : 이태구, 한영희
대전방송국 : 민병설, 정기영
마산방송국 : 양재관, 박한국
춘천방송국 : 이종훈, 유병은
청주방송국 : 이규일, 한기선
성진방송국 : 조선재, 이옥선
원산방송국 : 황세연, 조성기
해주방송국 : 김인지, 이종록
신의주방송국 : 김득풍, 함영복
강능방송소 : 전영설, 김억윤
장전방송소 : 유호경
개성방송소 : 이이덕, 김동하
서산방송소 : 이성흠, 고찬국
 

 

 
 

 

  

 해방될 무렵 방송기술인은

100명에 달했다.  한국 방송 70년

사에 기초한 해방 될 때 방송

기술인들의 명단이다.

 
 
 
조선방송협회 기술부
 
김경원, 김성재, 김승열, 이상훈,
최동곤, 한영식
 
 
정동연주소
 
한덕봉, 고찬국, 고병완,
 심상웅, 김두식, 설창덕, 이순기,
이인화, 이종일, 이원상,
 
 
연희송신소
 
이인관, 김규한, 한기선, 김봉근,
양길승, 양중석, 정일모, 이은동
 
 
부산방송국
 
 황세연, 이우봉, 박인규, 지윤상,
강재수, 김정현, 
 
평양방송국
 
김석모, 박능상, 김한룡,
조일건, 김창운
 
 
목포방송국
이태구, 한영희
 
 
마산방송국
 
고종수, 조선재, 박한국, 강대현
 
 
해주방송국
 
이종록
 
 
청진방송국
 
정규섭, 장용식, 최방진, 안용금
 
 
 청주방송국
 
이규일, 김상곤
 
 
신의주방송국
 
김득풍, 함영복, 김익모
 
 
 강능 이동방송 중계소 :  전영설,
 
 장전방송소 : 심현보,
 
서산방송소 : 이성흠

 

 

 

조선방송 협회시절 1948년에 3월 정동방속국 현관 앞에서

조정과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 정경순, 2 고종수, 3 이종일,

4 심응주. 5 김선영, 7 김무호. 8 왕종현, 10 남궁규오, 12 박옥길, 13 김석모,

14 전영설 이때의 조정과장은 고종수님이었고 이종일님은 계장이었습니다.

전영설님은 원래 박상기로 기재되어 있던것을 전영설님의

아들 전인섭님이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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