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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울 상권중심 “센간마에광장”(鮮銀前)주변

이장춘 2010. 10. 18. 18:19

 

 

일제강점기 서울 상권중심 “센간마에광장”(鮮銀前)주변
 
 
방송과 미스코시 백화점
 
 
1900년대를 전후해 선진문물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정동이 외국 공관과
학교, 교회 등을 중심으로 근대화 되기 시작한
곳이라면 근대적인 상권은 일본인들이 조선은행
(지금의 한국은행) 앞에 조성한 커다란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통감부가 있던 남산을
중심으로 생활터전을 마련 해 가던 시절
 여기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충무로에 일본의
백화점 미스코시가 오복점이라는 이름으로
지점을 연것은 1906년의 일입니다. 
 
1909년 이곳에  짛고 있던 한국은행은
한, 일합방으로 일본의 조선은행으로 바뀌고
이 일대에 식민지의 상징이라던 삼각형의
 커다란 광장을 조성했습니다.
 
이 광장이 “센간마에 광장” ( 鮮銀前 ) 이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한 충무로는 本町으로 뒷날
명동이라고 불리는 일본상권의 중심지가 되였습니다.
이곳에서 소공주로 ( 지금의 소공로 )따라 가는길 이름은
일본 초대 통감의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 (長谷川 )라 부르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했던 원구단을 헐어 조선 호텔이 된
 철도호텔을 지었습니다.   또 경성공회당을 지었으며
 1926년 경성부청을 지어 1920년대 말까지 이곳을
완전한 일본식 거리로 만들어 갔습니다.
 
 

 경성부청을 새로 지어 1926년
이사를 하면서  원래의 미스코시 오복점과
경성부청 자리에 커다란 미스코시 백화점을 지었
습니다. 이미 이곳에 들어선 조선은행, 경성 우편국  등과
더불어 상권의 중심지로 자리 궅히면서 명동과
경성역을 향해서 상권은 뻗어 갔습니다.
 
일제 강점기 상권의 중심지
 “센간마에 광장” ( 鮮銀前) , 삼각형의
광장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총독부가 그렇고
총독부에서 남산 신궁에 이르는 일련의 계획적인
행위가 이 나라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 라는
생각으로 설계되고 조성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던 “센간마에 광장
 (鮮銀前)은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도로개념에
의해서 최초로 계획된 도로이고 서울시내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그 넓이에 변화가 없는 유일한 광장인 것 같습니다.
 그때 지은 한국은행과 신세계백화점의 구관, 제일은행
건물은 옛 모습이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미스코시 백화점과 방송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일반 청취자가
최초로 방송을  들은 곳입니다. 광화문 근처에 있던
체신국에서 전파를 발사하고 이곳에서 방송을 들을 수 도록
시설을 하고 처음으로 시험방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험방송을 할때
 이름은  오복점이라고 했고 1930년 새로운 백화점을 지으면서
 '미스코시(三越)'백화점으로 불려졌지만 오복점도 
미스코시 백화점 지점이었음은
다를것이 없었습니다.
 
 
 1955년 부산 피난길에서 돌아온 방송국이
공개홀이 없어 이곳에서 스무고개나 노래자랑을
했습니다.  이때의 이름은 동화 백화점이었고 그 뒤 삼성이
이 백화점을 인수한후 라디오서울이 이곳 1층에 오픈 스튜디오를
만들었고 또 1964년 12월 부터 동양 텔레비전이 이곳에서 개국하고
방송을 실시 했습니다. 그때의 이름은 동양백화점이
 오늘에는 신세계 백회점이 되었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