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파방송 연락운동 핵심인물 동아일보 기자 홍익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홍익범! 방송인들이 단파 수신기를 통해서 들은 국제정세와 해외 독립운동 상황을 근거로 독립운동을 하던 홍익범은 1943년 3월 허헌, 송남헌 등과 함께 채포되어 8개월에 걸친 고문 끝에 2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이 무렵 사경이 되어 병보석 출소 했지만 1944년 12월 19일 47세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홍익범님은1897년 한경남도 시골동내
그리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테어나 국내에서
중둥교육을 마치고 일본 와세다 정치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을 나오신 분입니다.
와세다대학의 같은 학과를 나온 양재현님의
학교 선배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미국에서 노동으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
다. 1931년 콜롬비아 대학을 나오면서 국내에 돌아와 1933년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가 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국제 정세를 잘 아는
님인지라 우리가 하루속히 독립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진력했고 선교사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외국의 정보를 받아 국내 유력인사들과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중일 전쟁을 일으켜 아세아를 삼키려던 일본이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제 2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면서 해 내외
모든 연락망을 끊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을 비롯해서
언론 통제정책을 강화 해 갔습니다.
갑자기 직장이 없어져 버린 홍익범님은 생활도
어려워지고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니 해외 정보를 얻을
길도 막막해져 독립운동가들과 상의 한 결과 경성방송국
직원들을 통하면 해외소식을 알수 있다는 결론을 얻고 여러
인과 관계로 일찍부터 알게된 송님헌님이 방송일로 방송국에
무상 출입함을 알고 송남헌님을 통해서 방송국 직원들과
접촉하게 되어 그 정보를 가지고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를 해 나갔던 것입니다.
언론계, 법조계, 학계 등 만나는 범위가
넓고 깊었던 홍익범님은 그 정보를 광범위하게
전달했 습니다. 일제가 일방적인 선전만을 늘어 놓던시절에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느니, 임시정부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다느니
이승만 박사가 무슨 방송을 했다느니 등등 소문이 퍼져나가 당황한 일제가
해외방송을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정보들이라 방송국을 감시하고 그런끝에
방송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끌려갈 때 홍익범을 비롯한 방송국에서
정보를 받던 독립인사들도 함께 끌려 가면서 1943년 3월 26일
핵심인사 홍익범님도 채포되었습니다.
예심이라고 해서 8개월 가까운 세월을 경찰서에
가두어 놓고 지독한 고문을 해 데니 몸과 마음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상황에서 육군형법 제 99조, 해군형법 제 100조,
조선 임시 보안령 제 20조등 사상범에 적용하는 어마 어마한 중죄조항을
적용해서 그해 11월 19일, 2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송남헌님은
이때 만약 홍익범님이고문에 못이겨 주변 사람들을 입에 오르 내렸다면 상황은
엄청난 양상으로 번졌을 것이라고 술회 했습니다. 육성은 송남헌 선생님이 1981년 KBS 라디오 "전파는 살아있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송남헌님은 자서전에서 홍익범이한시대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를 잃자 손남헌님은 너무나 슬프고 안타가워 가슴이 찢어지는듯 했다고 했습니다. 이때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다른곳에서
말씀 드렸고 2010년 세상을 뜨신 고 박용신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 감옥은 호텔이라고 할 만큼 구치소에 있는
동안의 고문은 가혹했습니다. 변호사는 물론이고 가족 면회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일제하의 감옥이라면 다 치를 떨었는데 감옥을
호텔이라고 표현할 정도라면 구치소의 고문 기간이 어느 정도
가혹했는지 짐작 할 수 있고 그때 그 일을 당했던 분들의
회고록에도 그 상황이 적혀 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로
옥사 하신분만 6명이나 되었고 홍익범님도
그 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홍익범님과 관련한 신문기사 두 편을 골랐습니다.
홍익범님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 가실때의 기사와 미국에서 도라 오셨을 때의
기사를 옮겨 보겠습니다. ( 1926년, 2월 4일자와
1932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입니다.)
홍익범님이 동아일보에 들어가신지
얼마 안되어 제네바 군축회의에서 독일의
군축 탈퇴와 관련 불란서와 독일의 관계에 대해
쓰신 두 편의 글중 한편으로 1933년 10월
21일에 실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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