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남헌님이 증언하는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이 글은 방우회 (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가 1988년 6월 3일 그때까지 단파방송 사건이라고 불리던 항일 단파방송 연락 운동을 종합 정리하면서 연 방송 토론회 (세미나)에서 이 운동의 핵심적인 운동을 하셨던 송남헌 선생님이 "단파방송과 정계 연계관계"라는 제목으로 발표 해 주신 내용입니다. 송남헌 선생님에 관한 얘기는 다음 회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송남헌입니다.
여러 가지 주제발표말씀을 듣고 뭐라고
형연 할 수 없을 정도로 감개무량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옥고를치룬 허헌선생님이라던지 홍익범선생
이분들은 허헌선생은 해방을 보았겠지만 홍익범 선생 같은 분은
해방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옥사와 다름없이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뭐라 말 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당시 돌아가신 문석준씨 같은 분도
상당히 고생을 하셨던 분이기에 돌아가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참으로 애석합니다. 저희들은 단파방송 외에
정치적 관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이를
해외연락사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방송 쪽에서는 단파방송사건이라고 하고
정치관계에서는 해외연락사건이라고 합니다.
VOA는 한국의 호랑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직접 본국에 대해서 방송을 했고
중경에서는 아까 유 ( 유병은)선생 말씀하신 외에
신기언씨, 정영식씨, 그리고 임시정부의
엄항섭씨가 있었습니다.
엄선생의 계씨인 엄도해 라는 분이
있었는데 전기통신일을 본 관계로 역시 중경방송에
관여 하셨고 중국의 증산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의 언론기관에
근무하기도 했으며 임시정부의 선전위원회와도 맺은 조병무씨라는
분이 한국으로 보내는 중경단 파방송을 했던 분의 한분입니다.
1943년도에 우리들이 발각되었습니다마는
그 이전인 1930년에 들어서서 일본은 발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주 사변을 기점으로 대륙에 침략을 하게
됩니다. 다시 1937년 7월에는 중, 일전쟁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유린하게 되고 1941년 12월 8일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당시 서울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하신 우리선배 지사들께서는
일본이 패망할 것이 확실함으로 우리는 건국준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청진동에 김병로, 이인 합동법율사무실이
있었는데 2층집이었습니다. 이 집에 당시 서울에 계셨던
모든 민족 지사들이 수시로 들리신 곳입니다. 그중에서 매일같이
들리신 분은 허헌선생니이셨고 김병로, 이인선생님이 중심이셨는데
이 세분을 그 당시 민족변호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삼일운동의 33인에 대한 변론을
맡으신 분입니다. 허헌 선생님의 공소 불수리 사건으로
유명한 변론사건이 있었고 그 후에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운동
내지 사회운동에 있어서 이 세분이 무료변론을 하지 않은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세간에서 민족
변호사라고 받들어 모셨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건국을 해야 하기에
우리들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가장 중심적인 사무소가
청진동 변호사 사무실이었습니다. 송진우 선생 댁이 원서동에
있었는데 이곳에 홍익범씨가 가끔 들렸고 민족운동의
중요한 문제는 청진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유 선생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홍익범씨 관계인데 홍익범씨는 경신학교
출신이어서 교장이신 선교사 “쿤스” 씨를 잘 아는
사이가 되어 해외소식을 “쿤스” 교장으로부터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과 동시에
선교사들이 전부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해외소식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혔던 것입니다. 길이 막히게 되어
연구 끝에 그 당시 경성방송국 양제헌씨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가끔 원고를 써서 어린이 시간을 담당한 양제헌씨에게
건네주고 한 관계도 있고해서 해외소식을 입수하는 일이
둘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양제헌씨가 한국인
방송 기술자들에게 부탁하여 협조를 얻게
되어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해외 연락이 이렇게 다시 이루어 짐에 따라
해외 정보만 입수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국내 사정도
해외에 알려야 된다고 생각해서 계획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희들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도 못하고 사건이 터져
피검 됨으로서 이루어 지지 못했었습니다.
당시 청진동 변호사 사무실엔 많은 민족운동
지사들이 들리셨는데 그 중에서 조병옥선생을 비롯해서
원세훈, 홍명희등도 자주 들리신 분들의 한분이십니다. 해외연락
사건과 관련이 되었던 분들이 해방후 정치와 어떤 관련의
결과를 나타냈느냐 하면 해방이 되자 청진동
사무실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모여서 1945년 8월말
조선민족당이 창당되었습니다. 계동 입구에 있는
서울여상 교주가 되는 한학수씨댁 사랑에서 발기된 것입니다.
당시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미 진주해 있었고 미군의
이렇다 할 결정된 바를 알 수 없어 왕십리에 사시는
단파사건과 관련 되신 분에게 부탁하여 단파방송
수신기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이로서
미군의 동정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조선 민족당에는 홍명희씨가 직접 관련을
하지 않았습니다마는 홍명희계통의 박의양,
이원혁등 여러분들이 관련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치안을 책임지고 있어서 일인들의 학대와
감시를 피해 다니다 참여한 조병옥선생은 찌드는 모시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초라한 모습이었는데
조선민족당의 사회를 밭아 보았었습니다.
그때 대청마루 한가운데 태극기를 걸어놓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공적 행사를 하게 되니깐
무두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 감격해서 모두 운 것입니다.
홍익범씨가 가끔 출입해서 해외사정을 보고한 안국동의 윤보선씨댁에서는
윤보선씨를 중심으로 국민당이란 당이 생겼고 조선민주당이 생겨나기
10일전쯤 원세훈씨가 제일먼저 만든 당이 고려민족당이라는
정당입니다. 조선민족당, 국민당, 고려민주당이 합당해서
그해 9월에 창당한 정당이 한국민주당입니다.
그 당시까지 송진우 씨는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당분간 시국을 관망하고 임시정부가
들어 올 때까지 정당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9월 15일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입당수속을 마치고 9월 16일에 한민당의
수석총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초기 한민당은 민족적인 연합세력을
이루었으나 후기 한민당은 부정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1946녀 10월 좌 우 합작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토지정책문제로 한민당을 이룬 조선민족당과 고려 민주당이
탈퇴함으로서 한민당의 성격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담으로 정당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마는
단파방송 사건의 해방 후 정계와의 연계관계가
이런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중략 ..........
오늘 단파방송사건, 해외연락사건과
관련되셨던 방송국에 계셨던 여러분을 이같이
만나 뵙게 되었으니 특히 증언을 대하게 되니 새삼
옛일이 생각나서 감개무량 합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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