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허헌님과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이장춘 2010. 10. 1. 17:34

 

 

 

 

 허헌님과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허헌! 북한 공산 집단의 김일성 다음
제 2인자의 자리에 까지 오른 사람이어서
입에 오르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저 하던 끝에  2010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기념식장에서 허헌에 관한
글 한 귀절을 읽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방송국 직원들이 단파 수신기로
해외방송을 듣고 있던 그 일) 송남헌이
이들과 연결하여 ( 단파방송을 수신하는
방송국 직원들 )  해외사정을 어느정도 알게
되었고 평소 그와 함께 시국에 관해서 우려하던
허헌,  김병로,  이인등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였던
이다. 암흑세계와도 같은 상황에서 이 정도나마 국제
정세를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고 이것이 허헌으로
하여금 일제의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게
하는 힘이 된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통로를 통해 국제정세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나마 접할 수 있었기에 허헌은 더욱더
머지않아 일제가 폐망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하에서 그는 일제의 회유를 거절하고
이인, 김병로, 송남헌등과 함께 시국에 관한 토론을 자주했다.
이 석상에서 전쟁의 진전상황이나 이승만,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상 등이 화재에 올랐고 이를 근거로
 독립이 임박했다는 그의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경남 대학교 교수 심지연님의
허헌 연구에서 인용한 이 짧은 글속에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본질이 일부 담겨
있어서 이 글귀를 중시합니다.
 

 
단파 수신기를 통해서
미국, 중국 등지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방송국직원들이 들어 독립인사들에 전해지고
또 국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일본의 일방적인
선전을 무력화 시키면서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는 힘을 불러 넣었습니다.  
 
좌 우가 없이 하나가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 했을때 허헌님은
핵심적인 독립 운동을 하신 분으로 일제
치하에서 두 번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으로  1943년 3월 26일  
채포되어 갖은 고문과 회유 압력을 받다가 그해 8월에  2년
징역형 언도를 받아 해방되기 3개월 전까지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극도로 악화된 형기 만료  4개월을 앞두고 건강으로 1945년
4월 병보석결정이 내려져  풀려 났습니다. 석방  때까지
  2년 이상를 유치장과 감옥에서지냈고 풀려 난
뒤에도 늘 감시의 눈 초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방전 허헌님의 활동은 
 
 이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허헌님은
해방되고 끝내 공산주의를 택해서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김일성에 이어  북한 공산 집단의 권력서열 제 2위까지 오랐지만
1951년 8월 16일 67세로 익사 했습니다.  늘 그와 함께 활동했던
같은 단파방송 연락운동핵심인사 송남헌 선생님은 뒷 날
 그의 회고록에서 남한에 계셨어야 할 분이 끝내
북한을 선택한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동안 허헌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또 일제가
이 일을 방송국 안에서만 있었던 일로 축소조작 하는
과정에서 허헌님의 관련사실을 의도적으로 비밀에
부쳐져 재판기록도  잘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같이 활동 하고
같이 채포되어 곤욕을 치루었던 송남헌님의 증언이나
홍익범님등에 관한 증인 조서에서 얘기들이 있고 님의 딸
허근욱님이 아시는데로 정리하신 민족변호사 허헌이라는 책이 있어
그 내용이 수록 되어 있습니다.  허근욱님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북한공산당의 거물급 아버지 품을 떠나 6.25때
남한으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때 간첩이 아니냐 해서 법정에 까지
선적이 있지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자유대한의
 품안에서대공방송등을 통한 반공대열에 앞장서서 활동 해

오신분입니다.오랫동안 대공 방송을 했던 저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올해 80세(2010년 현재)로 그동안 많은 글을 써서 책으로 출간

되기도 하고 방송도 되었습니다. 1961년에 발간된 책

" 내가 설땅은 어디냐" 여러나라 말로  

번역되어 보급되었습니다. 

 

 

  

 

 
 
참고로 허헌님의 생애를 간략히 요약했습니다.
 
 
허헌님은 1885년 6월 11일 함경북도
명천(明川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
 ( 明治大學 )을 나오셨습니다.  190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셔서 젊은 나이로 변호사생활을 하셨고
특히 독립운동과 관련되는 일을 주로 하셨습니다.
 
3 . 1독립운동 민족대표 48인의 변호를 맡아
 공소 불수리 요청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결국은 애국지사들이 형을 받기는 했지만 일제 사법당국의
위신을 여지없이 깎아 내린 일이었습니다.
 
아래 동아일보의 관련 신문기사 한편을 올렸습니다,
 
 

 
 
님이 신간회 중앙위원장을 할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인 민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다가 조병옥선생님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채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이후 변호사 활동은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허헌님이 변호사를 하실 때 청진동에
형사 공동 연구회라는 사무실을 열어 김병로, 이인님과 함께
변호사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분들을 대표적인 시국변호사 『三人』
이라고 해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김병로님은 街人, 허헌님은 競人이
 그 호였고  이인님의 호는 애산이었지만 성함의 끝자가 인자여서 
  3인이라고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위의 세분이 청진동에서
  형사 공동 연구소를  하실 때의 사진입니다.
 

 
 
이곳이 변호사 사무실이기는 했어도
내면에 들어가면 독립 운동가들의 모임장소였습니다.
 2층에 따로 응접실을 두고 민족문제에 뜻이 있는 분들이
드나 드셨습니다. 송남헌님이 쓰신글을 보면 조병옥,
송진우, 윤보선, 안재홍, 박찬희님등은 날마다 이곳을
드나들다 시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홍익범님과 송남헌님이 단파방송으로
 모은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토대로 행동방향을 정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허헌님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고
 별로 할 일도 없어 이런일에 온갖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사상범의 꼬리가 붙어있는 님은 감시망을
 벗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경성방송국에서부터
일이 터지고 마침네 자신도 채포되었습니다. 이때는
형사공동 연구소라는 사무실이 사실상 폐쇠되었습니다.
이인님은 앞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끌려가시고 허헌님과
 홍익범님, 송남헌님이 단파방송 사건으로 끌려가니
사무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치고 단파방송과 연계되지 않은
 분들이 별로 없었던 터에 끌려가신 분들이 고문에 못 이겨
말 한마디 잘못 나오면 모두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짐작한 일제의 고문은 더 심했고 이미 끌려가신 분들의
 고통은 더 컸지만 7개월 8개월에 걸쳐 초죽음을 당하면서도
또 옥사를 하면서 까지 입을 다물어 독립 운동가들이
더 이상 화를 입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회유와 압력을 가했지만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픈 마음으로 끝까지 버티었다고 했습니다.
몸이 허약 해질대로 허약해진 님은 1945년 4월 말에
이르러 병보석으로 풀려 나셨습니다.  
 
전쟁이 믹바지에 이르면서 감시는
더욱심해져 활동에 극도로 제약을 받아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가운데 독서로 소일하며 살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이때 연세는 61세였고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해방전  님의
마지막 활동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남아 계셨어야 할
그는 기어이 북으로 가셨고 1951년 67세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허헌 보존사료





 

  
허   헌   약     력  
 
 

△1885년 음력 6월11일 함경북도 명천군하우면 하평리 출생

△1907∼08년 일본 메이지(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시험 합격

△1919∼25년 3·1운동 33인 변호, 보성전문학교장, 조선변호사회장, 조선공산당 사건변호

△1929∼32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광주학생사건 변호,1차 투옥

 

 

△1943∼45년 2차 투옥 (단파방송 독립운동)

 

 

△1945년 8∼9월 건준부위원장, 인공 총리

△1946년 민전 공동의장, 좌우합작운동 참여했다가 탈퇴, 은밀히 월북하여 김일성을 만남

△1946년말∼48년초 남조선 신민당위원장, 남로당위원장, 남북협상참가 계기 북한잔류

△1948년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 총장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

△1951년 8월16일 익사, 국장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네차례나 일어난 언론압박 탄핵 민중대회 당시
 기자단을 고문한 폭악경관 규탄 결의 대회를 한후 기념촬영한 변호사단과  기자들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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