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핵심인사 송남헌

이장춘 2010. 10. 4. 16:07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핵심인사 송남헌
 

 

 소학교 교사, 아동 문학가,
항일 단파방송의 핵심인사, 독립운동가,
정치가,  통일 운동가로 불리는  송남헌(宋南憲)
선생님은  1914년 4월 11일에 테어나 2001년 2월 20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실 때 까지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사시면서 많은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중책을 맡으면서
목숨을 건 일은 세상을 뜨실 때 까지
가슴속 깊이 간직되었습니다. 
 
 
소학교 교사를 하시면서 아동문학을 하신
 송남헌 선생님은 경성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의
 글을 쓰셨고 그런 인연으로 방송국을 자주 드나들며
 방송국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어 세계 제 2차대전을
전, 후한 일제 강점기의 암흑세계에서 단파 수신기를 통해서 
 해외방송을 듣던 방송인들로부터 받은 정보를  독립
운동가들에게 전함으로서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이인, 김병로, 허헌, 송진우, 원세훈, 함상훈,
여운형, 김태준, 홍익범님 등 독립운동의 핵심인사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독립운동가가 되어 활동 하던 중.  1943년
3월 26일 경찰에 채포되어 갖은 고문과 협박 회유를 받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 또는 묵비권으로
일관 했습니다. 국내 독립 운동가들과의 연계관계를
끝까지 부인했고 방송국에서 정보 수집한
 사실도 모두 숨겼습니다.
 
 
그 지독한 일본 형사 당국에서도
더 이상 어찌할 방범이 없어 치안유지법만
적용되어 1년형을 받았다가 즉시 상고해서
 8개월 징역형이 확정 되었습니다.
 
 고문으로 일관되던 
 미결수로 있던 유치장 생활까지
1년 3개월의 감옥생활을 하다가  1944년 6월
감옥을 나왔지만  온갖 감시 속에 또다시 올가미를
 씌우려는 일본인의 눈을 피해서 광산으로
 들어가 해방 될 때까지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을 뜨시기 직전까지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에 관한 그 때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여러 도움을 주셨고 벙송에 출연하거나
관련행사에도 나오셔서 그때의 얘기를 들려 주셨으며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록한 글도 보존되어 있어서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연구의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을 하던시절
단파 무선전화를 이용한 해외 애국지사들과
 교신을 해서 국내소식을 해외에 전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현실적으로 기술상의 어려움이 있었고  또
그 무렵부터 검거선풍이 휘몰아쳐 실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1914년에 출생한  송남헌선생님은
 1934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군산에서  2년간의 교직생활끝에 서울을 지망해서
배정 받은곳이  서울 제동 소학교였습니다. 서울에서도  

제동은 이름있는 분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인촌 김성수, 몽양

여운형, 해방후 남노당의 문예부장을 지낸 김태준등 저명인사들의

 자제분 교육울 맡으셨고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다 보니어느 사인엔가

 아동문학 이론가라는 소문이 퍼져  원고청탁이 들어왔고 또 기고를 하게되어

본의아닌 아동문학이론가, 또는 아동문학가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동아일보 학예란을 집필했고여기서 홍익범님을 비롯한 신문사와 친분이

생겼으며그러는동안 방송국의 글을 쓰게되어 편성과 직원들과 친한

사이가 되고 방송국에 근무했던 이서구님과는 사촌  처남
남매지간이 되는등 인간관계가 맺어져 만남의 폭이
넓어졌고 듣고 보는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원래 독립의식이 강했던 님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독립을 위한 활동도 같이 하시게 되고
방송국 양재현님의 담당 프로그램에서 글을 쓰시게 되시면서
문학 동인이 되는등 친분이 두터워진 가운데  방송국에도 무상출입하게

되었을때 독립운동가들이 방송국의단파방송으로 들은 소식을 접해야 할

절실한 상황이 되어 이런 방면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양재현님과 

 홍익범님은  외세다대학의 선후배 관계인지라 얘기가  잘 통하고

양재현님으로 말하면 해외 독립운동의 핵심인물 양우조님의

 (양우조님은 1999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되셨습니다.)조카이기도 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으로

 이들은 서로 간에 뜻이 잘 통했습니다.

 
송남헌님이 젊은 나이로 방송국에서
 글을 쓰게 될 무렵, 이하윤, 이헌구, 이서구,

양재현님등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문학인들과 문학

동호인이 되었습니다.방송국의 여러 동지들과 친분을 쌓은 것이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으로 얻어진 정보를 활용하게 된 바탕이 되었

습니다.이로부터 방송국과 독립 운동가들을 나로 묶는 연결고리가

 확실하게 마련 된 것이었습니다.성기석, 이이덕님등이 열심히 듣고 

양재현님등이 종합한 정보를 송남헌님이 받아 홍익범님과 함께 

독립운동가 들에게  전하게 되니 단파방송으로 들은

정보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위원회 우측비서,
김규식 입법의원 의장 비서실장, 민족자주연맹
비서처장 및 상임위원을 거쳐 1948년 남북협상 민족

자주연맹대표 등을 역임 하셨습습다. 현대사 연구가로서의

 연구도 활발히 해서해방 3년사와 해방 30년사를 쓰셨고 우사

(우사는김규식 선생님 호임) 연구회 회장으로 강만길, 심지연,

서중석 교수님 등과 함께 자신의 회고록을 포함한 우사 김규식

전집 5권을 간행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회고록에는

 단파방송 연락운동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송남헌 선생님이 그때의 
고문에 관한 글 한 구절과 이인

 선생님이 애산여적에서 인용한 송남헌

선생님의 글을 올립니다.

 

 
 
사찰과 형사에게 잡히면 누구나를 불문하고
가진 고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비행기고문과
물고문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비행기고문이란
 한 밤중에 불러내다가 양팔을 뒤로 묶어서 포승줄로  천정에

매달아 몸을 공중에 띄워 놓는 것으로 몸이 공중으로 들리는 순간

 소스라치게 까무러쳐 정신을 잃고 만다.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 초죽음이

 되면끌어다가 던지다시피 유치 장안에 쳐 넣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끌어내 물고문을 했다. 기진맥진한 사람을 책상위에 뉘어놓고 수건을

 물에 축여 얼굴을 덥고 양동이의물을 코에 집어넣었다.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물이 코로 들어가면 뒷골 깨지는 것처럼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 정도면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생각이 수십 번 씩
들어 저들이 원하는 데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동지를 배신하거나
전향하는 일도 비일 비재 했다. 
 

 

이인선생님의 경성방송국 단파사건 글 부분에

"고문…….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 당시를 말하는

송남헌씨 " 라는 글이 있습니다.

 

 

 


 

 

고문.....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

당시를 말하는 송남헌씨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에 연좌했든

한 사람으로 반백의 머리가 된 송남헌씨는

딩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밤중이면 꼭 불려나가 그 지긋 지긋한

물고문이며 비행기 타기 등의 악형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나 보다도 더 혹독한 고문으로 산송장이 되어 업혀서 감방으로

오곤하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나는 약과였다고나 할까....

그 중에서도 끝내 자기 이외의 일에는 입을 열지 않은채 순사를 하고만

홍익범씨를 생각하면 살아남아 이렇다 할 일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

럽기만 하다. 또한 경성, 청주, 대전 형무소 등을 전전하면서 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모습이며, 형기를 마쳤음에도 출옥을

못하고 소위 사상범 보호 구금령에 묶여 그대로 감옥살이를

하고있던 선배, 동지들을 생각 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지금 생각하면 방송국에 근무했던

우리 기술인들은 실로 애국자였다고 여겨진다.

평소에 이렇다 할 민족적 교양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또한

뜻있는 사람과의 접촉도 아니 했는데 있을지도 모를 무서운 일을

예기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매일같이 「라디오」를 청취해서는 전해주곤

했다는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꼭 정기적으로

있는 방송을 제때에 듣기 위해서 일인들을 속이는 修理명목의 연극도 꾸몄으며

숙직도 아닌데 열성을 부리는 척 밤에 남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때의

뜻 있는 분들이 지금은 거의 유명을 달리하는 고인이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외국에, 혹은 북에, 혹은 행방조차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때의 동지였던 민족진영 인사들을 등지고

공산주의 자들과 합작 해 버린 허 모의 경우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없다. 하루빨리 모두가 태극기 아래 옛날의 동지애로

되 돌아가서 보다 나은 조국을 건설하는데 함심 했으면 하는 염원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한마디로 경성방송국 단파사건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지방방송국에도 단파수신기가 있었고 혹은 비밀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던 터라 이 밖에도 단파사건

으로 해서 희생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줄 안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선배, 동지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 송남헌 보존사료

 

 





방우회 이사 이장춘.  

 

 

 

송난헌, 홍익범, 이인.mp3

 

송난헌, 홍익범, 이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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