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京城放送局의 女性 아나운사(아나운서)들/-1935년 삼천리지에서-

이장춘 2010. 5. 7. 09:06
 

 
 
京城放送局의 女性 아나운사(아나운서)들
 
-1935년 삼천리지에서-
 
 
 
이 글은 1935년 8월 1일에 발간된
삼천리 제7권에  7호에 실린 글입니다. 사진은
 제가 첨가하고 원문은 그대로 옮겼습니다.  내용이
다소 다른 부문이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때의 글을
원문대로 볼 수 있는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원문을
그대로 올린것입니다.  이 글에서 국어는 일본어를 말하는
것으로 그때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했습니다.
 
  
 
「J.O.D.K」 여긔는 경성 방송국이올시다...」
마이크로폰 앞에 나서서 멫 십만 멫 백만의 많은
사람들에게 아츰 저녁으로 상양스러운 말로 인사의 말과
소개의 말을 늘 듸리는 여자를 세상에서는 여자 아나운써-라고 부른다.
이 여자 아나운써-가 조선에 처음으로 나타나기는 그 언제붙어일까?
그것을 알자면 먼저 「경성 방송국의 발바온 연혁과
거러온 유래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지금으로붙어 생각하여 보면
그리 짤지 않은 십년 전의 일이다. 그때에 지금
체신국 안 무전국(無電局)의 한쪽 구석에서 그때에 그 안
감이과 (監理課)에 잇든 모 일본 내지인의 창안으로 조선서는
 처음인 방송국을 꿈꾸고 비로서 첫 방송을 시험하여 보앗다.
그때의 방송이래야 전부가 국어뿐이였으며 浪花節. 櫻音頭...
등등의 것으로 극히 멫 않되는  일본 내지인들을
대상으로 밖에는 되지 않었었다.
 
 그 후 얼마 않되여서,  아마 생각컨댄
大正 15년 말경에 조선 식산 은행  회의실에서
비로서 처음으로 조선 안에다, 더욱이 서울에다가
방송국을 하나 세우기로 작정하고 라듸오 방송에 대한  깁흔
이해를 가진 멫멫 인사들이 뫃여서 「경성 방송국 창립
사무소」를 동 은행에다 두고 그의 期成을 위하야
적지않은 활동을 하게 되였섰다.
 
그때의 조선 사람들에게는 라듸오 방송국의
창설에 아무런 필요도 흥미도 거게 다 늣끼지 못햇든 것이다.
아마 새 학문을 배우고 첨단적 문화를 힘닙은 신사들도
거기에 대해서는 너무도 등한시하여 왔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때의 모-든 期成工作 가운데서는
 지금 경성 방송 협회에 게신 韓相龍씨 朴榮喆씨 등 數 3人
이외에는  이에 관심하는 인사를 별로히 어더볼 수가 없었다.
그러든 것이  불과 10년이 그리 넘지 못하는 금일에 비겨보면
 여러분 얼마나  놀나운 발전이며 天壤之判임니까?
 
 아마도 그동안, 세상은 다른 여러 부문도 다-
그렇겟지마는 이 라듸오에 대해서도 퍽으나 이해가 깁허가고
 그의 필요를 점점 늣끼게쯤 되였나 봄니다. 그리하야서 이 창립활동은
 여의대로 진전되여 昭和 2년 2월에 마츰내 경성방송국-
JODK-는 완전히 성립되고 말앗슴니다.
 
그 건물을 경성 貞洞에다 새로히
모-단 형의 2층 콩쿠릿트 양옥으로 신축낙성을
 보게 되였다. 그러나 그때 시기의 방송 내용을 살펴보면
전부가 국어뿐이엿스니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청취자 층이 백이면 99까지는
일본 내지인이엿기 때문이였다. 그러든 것이
차츰차츰 서울 장안의 젊은 사람들에게-혹은 해외에서 돌아온
고급 문화인 층에서, 환락과 영화에 단꿈꾸는 유한인들 층에서,
모단형 가정생활의 신사층에서-도 거리와 거리에서 쏘다저 흘너나오는
 라듸오의 소리에 귀가 띄워서 한 사람, 두 사람, 또는 한 집 두 집에
조선 사람의 귀를 끄을게 되엿스니 실로 여긔에서 비로서
조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방송 내용을 차츰차츰 조금씩
 취급하게 되였고, 더욱이 특히 조선말로도 간간히
소개할 필요를 늣끼게 되였었다.
 
여긔에 비로서 조선에선 처음인
여자 아나운써-의 필요를 늣끼게 되였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 아나운써-라는 새로운 직업선에 처음으로
 용감히 발을 내여민 여자는 과연 누구일가.
 
 
 
이 여자 아나운써-라는 일흠붙어도
그 때의 조선사람들 귀에는 잘 익지 못하엿든 만큼
그에 지망하는 여자도 물론 만치 않었다.  오즉 한 분의
 귀여운 지망자가 있었으니 그이는, 당시붙어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여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방송국 사무에
노력을 아기지 않으시는 廬昌成씨의
부인되시는 李玉景씨이였다.
 
이 李玉景씨는 그러면 어떠한 분이길내
 조선에서 처음인 여자 아나운써-로 나오게 되엿든고?
그는 물론 남편의 깁흔 이해와 지도가 있기 때문이엿섯겟지만는
 그보다도 그의 어린 처녀 시절붙어가 그 부인으로 하야금
 조선서  처음인 여자 아나운써-란 직무에 감히 나스게
만들었다고 봄이 옳을가 한다.
 
 
그러면 그 어린 처녀시절은 어떠하엿스며
그 가정은 어떠하엿든고? 李玉景씨는 인천에서 나서
 그 곳에서 소학교를 단이게 되였었다.  氏는 본래 태여나기를
 귀하게 명문의 가정에서 태여낫스니 그의 부친은 그 당시에
 인천 세관 관장이란 놉흔 요직에 잇섯슴을 보아도 그가
어린 시절붙어 얼마나 호화스럽게 귀엽게 또한
부모의 사랑 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며
자라낫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후 氏는 부친이 안동현 세관 관장으로
 전임되여 가게되매 부모를 따라 이역 滿洲 安東縣으로
가게 되였다. 그 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로
곳 안동현 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었다.
 
氏는 어려서붙어 미모의 사랑스러운 얼골을
 가젓스며 또한 그의 목소리는 명랑하고도 아름다웟다.
그는 소학교 시절이나 이곳 고등여학교 시절이나 늘 학교에서는
 선생 앞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님과 아버님 앞에서
그 고흔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좋와하였다.
 
그렇게 영이하게 생긴 氏는 학교에서
공부도 남에 빼나게 늘 우수한 성적을 어덧다.
그러한 氏가 또한 조선 녀자로서는 국어를 남달니 잘 하엿슬
것은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였다.  인천 소학교을 마추고
 안동현 고등 여학교를 마춘 氏는 그 당시의 조선 여자로서는
 어더보기  드물게 유창하게 흘너네리는 물처럼 국어을
잘한 것은 조금도 기이할 것이 없었다.
 
그러튼 李玉景씨는 학교를 졸업하자
현재 남편 되시는 廬昌成씨와 결혼을 하게 되였다.
당시의 廬씨는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엿섯스니 결혼 후의
李씨가 라듸오 방송에 대하야 다소간의 지식을 갓게 되엿고
 또한 유의하엿슬 것도 당연한 일의 하나이였다.
 
이씨는 그렇게 다복한 신혼생활 중에서도
 남편의 하시는 그 업무에 깁흔 이해와 동정을 가지게
되엿슴인지 또는 남편의 간곡한 충언으로 엿슴인지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비로서 가정에서의 주부생활을 버서나서 처음으로
경성 방송국 방송실의 마이크로폰-앞헤 나스게 되였었다.
 
실로 지금에 앉어 생각하여 보면
그 때의 이씨의 행동은 참으로 대담함이 있었다.
<248> 그때만 하여도 라듸오의 청취층에 조선 사람들이
대단 귀하였고 대개는 일본 내지인이였음으로 이씨의 입에서
 흘너 나오는 국어는 조금도 그들에게 불만족함이 없이 유창하였다.
 아무리 말 잘하고,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처음으로  마이크로폰
앞헤 나스면 말문이 꽉 맥키고 또한 말의 고저,   장단을 잘 마추워 방송하지
 못하면 모든 청취자들에게 불만을 주고 또한 무슨 말인지도 알아듯지 못하는
 경우가 하두 많은데도 이 李씨만은 그에 대한 소질를  가젓슴인지,  천재로
태여낫슴인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약간의 실수도 없이 매일 매일
마이크로 폰- 앞에서 수만의 인사를 대하여 정답게 고흔 목소리로
방송하게 되엿스니 그의 그 때의 큰 이상은 많은 청취자들을
 한가정과 같이 늘 생각하엿다고 한다.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 뱃꽃같이 하얀 살결
 동그스럼한 그에 얼골, 호리호리한 몸 맵시 명랑한 목소리는
그 때의 방송국 안 여러 사람들의 눈을 황홀케 한 때가 많었다고 한다.
그 후 氏는 한 어린이의 어머니로 될 숙명적 운명에 닥다렷스니
그는 하는 수없이 가정의 복음자리로 다시금
들어가고야 말았다.
 
지금의 李玉景씨는 廬씨와 단란한 가정을 일우워
 5 남매의 귀여운 어린 것들의 재롱을 벗하여 그날 그날
주부로서의 현모양처로 지낸다고 한다. 李玉景씨가 JODK에서
자태를 감추게 된 뒤에는 그 누가 다시금 여자 아나운써-로서
 나섯슬 것인가, 그 다음에 나온 이는 馬賢卿양이다.
 
 
 
李玉景씨가 JODK에서 자태를 감추게 된 뒤에는
 그 누가 다시금 여자 아나운써-로서 나섯슬 것인가, 그 다음에
나온 이는 馬賢卿양이다. 이 馬양의 고향은  咸北 城津이니 南男北女라고
 이르는 조선에서, 北岳摩天嶺의 정긔를 타고 낫슴인지 그의 미모는
 남달니 빼낫스며 北鮮女의 기질이 그냥 있는 처녀이였다.
 
孃은 城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여 서울로
 올나와서 京城 女子 高等 普通學校에 입학하엿섯으니
그의 우수한 학력을 가히 짐작할 수 가 있다. 그는
공부에만 재조가 있을 뿐 아니라 孃은 또한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젓섯다.
 
그가 같은 동무들과 놀때면 늘 꾀꼴새같은
 명랑한 노래를 부를때가 중중하엿다고 한다. 그의 미모와
재조와 고흔 목소리는 학교 시절의 여러 동무들에게서
많은  羡慕를 남달니 한 몸에 모으고 잇섯다.
 
그러하든 孃이 女高를 졸업하자
바로 李玉景씨의 뒤를 이여 경성 방송국에 들어감도
 그리 우연한 일은 않이엿다. 그러나 學窓에서 「女王」의 소리를
 들든 그이기로니 한 번 마이크로폰-앞에 나서서는 과연  많은
 사람들 앞에 얼마나한 성공을 할넌지 방송국원들의
초조하든 일이엿다.
 
그러나 첫 번 나슨 그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약간 미소를 띄우며 세련된 목소리를 내엿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첫 번 마이크로폰-앞에 나스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노력과 꾸준한 연습을 애끼지 않었다고 하니
 馬양이 얼마나 가슴을 조리며 땀발이 솟앗슬까는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孃의 그 때의 나의 21세이엿다고 하니
한 번 마이크로폰 앞에 나서서는 멫 십만, 멫 백만
청취자들의 귀염을 바덧섯고, 한 번 사무실 책상 앞에
돌아와서는 여러 국원들의 귀염을 바덧다고 한다.
 
 
그러튼 馬양도 昭和 5년에 방송국의 사업이
 일시 정지되여 여자 아나운써-를 두지 못하게 될
사정에 일으매 하는 수 업시 골살을 집흐리며 우울한 얼골로
몸을 도리켜 고향 城津으로 내려간 다음에는 그 후의  孃의 소식을
도무지 알어 들을 수가 없다고 하니 짐작컨댄 孃은 그 후 白鷗가 떠도는
 동해 바다ㅅ가에서 거세게 처드러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멫 번이나
 애수에 가득찬 노래를 불넛슬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은 사랑의
짝을 차저 행복된 가정을 일우웟슬 늣도 하나 그 후의
 孃은 그야말로 「一去無消息」이다.
 
 
그 후 昭和 8년 4월에는 새로히 2중 방송을
하기로 작정하고 제2 방송과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새로히 여자 아나운써- 2명을 채용하게 되였다. 경성 방송국이 생겨
 근 7, 8년의 역사을 거러오는 동안 조선 사람들의 청취자도 날로
 증가되여 이에 비로서 2중 방송의 필요를 늣꼇든 모양이다.
 
한 번 방송국에서 여자 아나운써-를 모집한다하니
많은 여자들이 이에 응모하여 왔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즉
두 분의 여자가 뽑혓스니 그 이들은 崔兒只양과 金文卿양의 두 젊은
 여자이엿다. 많은 여자들 중에서 오즉 이 두 사람의 여자가 뽑혓스니
 그들의 학식이 남달니 빼남도 잇기는 잇스나 오로지 진주를
구을니는 것 같은 고흔 목소리의 소유자이엿든 까닭이였다.
 
 崔兒只孃은 그 해에 바로 경성여자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로서 졸업 직후에 아나운써-로
 들어오게 되엿스며, 또 지금까지 계속하여 꾸준히 나아가는
金文卿孃은 昭和 8년 3월 경성 숙명여자고보를 우수하게
졸업하는 즉시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역시
아나운써-로 나스게 되엿다고 한다.
 
 
崔양은 한 번 마이크로폰- 앞에 나서면
청산유수같이 졸졸 흘으는 말소리는 늘 많은 청취자들의
마음을 보드랍게 하엿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자긔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늘 학창시대붙어 질겨 공부하든 문학에 온 정신을
 기우려 문학서적을 眈讀하며 때로는 그 영롱한 눈동자를
말끄럼이 하여 예술적 명상의 세게를 머리속에
그리는 때가 중중 하엿다고 한다.
 
또한 때로는 원고지에 붓을 달여  멫 줄의
시를 쓰고는 혼자 읊으곤 하는 때도 있엇다고 한다. 어째든
최양은 예술의 세계를 퍽으나 동경하엿든 것만은 사실이다.그의
아련한 얼골에는 늘 보아야 로맨틕한 정서가 아롱아롱 떠돌앗스니
嫀이 일년 반의 쩌른 동안을 마이크로폰-앞에 스고는 앗갑게도 자최를
사르시 감초여 버린 다음 그는 어느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잇는
 모 청년과 남모르는 사희에 사랑의 실마리를 매저, 지금은 시내
어느 한 모통이에 깨끗한 행복의 복음자리를 꾸며놓고
현모양처의 가정 생활을 계속한다고 한다.
 
 
 
 金양은 8년 3월붙어 오늘날까지
꾸준히 내려오며 그 곱고 깨끗한 말소리로
매듸 매듸 고저장단이 잇게 똑똑 꺽어서 보드럽게
매끈매끈하게 늘 마이크로 폰- 앞에 서서 市井의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되니 아마 그는 市井人에겐 없지
 못할 「天使」일 것이다.
 
 孃은 그 얼골에도 역역히 나타난 거와 같이
 그의 취미는 고상한 것이다. 짬짬이 틈만 나면 늘 자수놓기를
겨을니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수예에 대한 기질만 보드래도
그의 성격이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다운가는 알 수가 있다.
 
그것은 한 편 그의 가정의 영향됨도 많으려니,
그의 오라버니되시는 분은 현재 육군 소좌로서 龍山 제20사단
 육군 보병대의 현역으로 단이신다고 하니 그 가정이 얼마나
 엄격하고 고결함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잇다.
 
孃은 마이크로폰-앞에 나슬 때마다 많은
청취자를 대하기를 한 집안 가족과 같은 감정으로
 대한다고 하니 멫 만, 멫 십만의 청취자들에게 얼마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밧고 잇는가를 알 수 있다.
 
방송국 조선어 방송과장으로 잇는 金雲汀씨는
말하되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마이크로폰 앞에 나서서
간단한 인사의 말과 소개의 말을 하는 것이 아주 쉬운 일같지마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않이야요, 아무리 말 잘하고 구변이 좋은 사람이라도
 한 번 마이크로폰 앞에 턱 나스면 말이  잘 않나오는 법이고, 또 아무리 말이
 잘 나오드래도  말의 고저장단과 호흡 한 번 잘못하여도 청취자가 말을
잘못알아 들는 페단이 퍽으나 많은데 아즉까지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아나운써-로 더욱 어려운 것은 어떻게 하면 모든 청취자를
한 가족과  같이  친하게 맨들가 하는 것인데    여긔에  대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않이야요...   여하튼 지금 있는 金文卿양은
 퍽 재조잇는 녀자이지요.」 하는 氏의 말을 들어도 金양이 
얼마나 재조가 빼난  녀자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것은 孃의 이지적인 이마와 영그러운 눈동자
로서도  넉넉히 알아 볼 만하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올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