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1930년대의 방송국 생활 / 김문경 아나운서 회상기

이장춘 2010. 6. 9. 06:35

 

 

 

 1930년대의 방송국 생활 / 김문경 아나운서 회상기 

 

 

이 글은 1932년부터 1938년까지

경성방송국 우리말 방송인 제2방송과에

 근무하셨던 김문경 아나운서가 그때의 얘기를 써서

1960년 6월호 방송지에 오른 글입니다. 그때의

 방송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되어 전문을 올립니다.

 

 

 

 

 마이크 앞을 떠난지 어언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라디오를 떼어놓지 못하고 듣고 있는

 저에게 어느 날 방송지 편집자는 지나간 아나운서 생활을

얘기 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식으로

 건축된 청사에서  떳떳한 우리말로  국님에게  전해주는

젊은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를 들을 적마다  지난날을

회상하게 되고 지금의 아나운서들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부탁에 과거를

그려야 한다니요.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아직도 교복을 벗지 않은 나는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젊은이에게는 선망의 직업이었던 고로 나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시업을 치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행히도

합격의 통지를 받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나는 마침내 여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와 막상

방송 사업에 종사하고 보니 이렇게 어려운 일은

또다시 없는 듯싶었습니다.

 

그 당시 방송국은 이중방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일본어방송을 제1방송,

우리말방송을 제2방송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입국해서

우리말 낭독법, 표준어의 사용 등등을 여러 선배의 지도하에

테스트기간을 거쳤습니다. 이때 여자 아나운서로는 최아지씨,

남자 아나운서에 박충근, 남정준제씨가 계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스튜디오에 들어가

 텅 빈 방안에 설치된 스위치를 돌렸고 그때는 자못

긴장과 흥분 속에 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두 마디

 나오기 시작하니 어디선지 자신이 생기고 대담 해 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날이 흐르는 가운데 어린이 시간에는 제법 재미있게

하느라고 애교와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열심히 방송한 다음 스튜디오를

나오면 웬일인지 쑥스럽고, 부끄럽고 보다 더

잘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기도  

곧 잘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아나운서가 방송해야 할

어린이를 스튜디오에 안내 하기도하고 어린이극이

있을 경우 음향효과 도구등도 사전에 준비하고 어린이 신문 원고도

 읽어 봐야하고 방송이 끝나면 사례금까지 나누어 주어야 하니 바쁘다는 건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허둥지둥 어린이 프로를

치룬 다음에는 저녁 7시 뉴스 다음에 있을 이기예보의

부호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때는 전문부호를 적어온 일기예보이기에

이를 방송문장으로 고쳐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하루는 이렇게 바쁜 가운데 기분도 좋지 않아 스위치를

잘 못 돌려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기술 부원에게

말을 듣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체신부에 시말서도

제출했던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도 혼이 났었는지

사건 전후가 지금도 모호하여 그냥 실수를

했었다는 기억뿐 자세한 것은 잊고 말았습니다. 이밖에도

 주부시간이나 강연시간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녹음방송을

실시하고 있어 방송아 중단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마는  

그때는 생방송인데다가 시간이 되어도 강사가 오지 않는 경우

 아나운서는 그야말로 허겁을 떨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일반 청취자에게 미안한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고 대신 레코드를 틀어야만 하는데

이 곡명도 즉시 체신부에 통고하여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골치 아픈 일은 거의 남자가 하는 일이었지요. 지금은 6.25전란으로

 자취도 없어진 전 청사에는 스튜디오가 세 개밖에 없어 제1, 제2방송이

 겹치는 경우에는 제2방송인 우리말 방송은 언제나 양보 해야만 하며

 국악이나 창도 좁다란 스튜디오에서 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아나운서가 둘이어서 주, 야로

 교대로 근무했는데 후에 저 혼자 남게 되어 야간 근무를

많이 했습니다. 이렇듯 어렵고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마는

이와 반대로 즐거웠던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여자가

나 혼자여서 귀여움도 많이 받고 청취자에게서 온 편지를

 받는 것도 즐거운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낮에는 방송시간이 별로 없어

따뜻한 양지쪽을 찾아 봄을 즐긴 때도 있었고

어느 날엔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민가에서는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일로 흐뭇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마이크와

고락을 같이 하던 나는 아나운서 생활 6년 만에 이별을

 고했으나 지금도 라디오는 나의 벗이요

위안이기도 합니다.

 

그 언재 예쁘다고 했던 내 얼굴에는

주름지고 희망에 벅찼던 그런 과거는 사라졌으나

 또 한 번서보고 싶다는 의욕은 내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방송에 관한 것이라면 어느 부문이든

 잡고 싶기에 무진 애썼고 이런 보람 있어 아나운서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고 없이 방송을 마친 날만이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었던 그 날만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이라고

돌려야 할런지요. 오늘도 금년에 여학교에 입학한 딸의

 등교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은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내나라 내 민족을 위한 아나운서가 되어 달라고,

이는 일제하에 얽매어 부자유스러운 방송을 했던

나의 반항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남인수 황성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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