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역사적인 경성방송국의 개국과 한국방송사

이장춘 2010. 3. 11. 04:01

 

 

 

역사적인 경성방송국의 개국과 한국방송사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이 땅에서 역사적인

 방송전파를 내보냈습니다.  이날 오후 1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정동 1번지! 이씨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사랑하던 강비가 세상을 뜸에 왕궁

경복궁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능을 마련하고 정릉이라

 했던 곳, 유서 깊은 정동 1번지에서 이왕직의 땅

190평을 빌려 경성방송국을 짓고 

정규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송을 시작하던 날의 기록을 찾아보려고

 신문이나 관련 서적을 보았지만 신문에는 이상하게도

그날 한시에 방송을  할 것이라는 간단한 예고기사와 그날의

프로그램만 실렸고 개국식에 관한 기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조선총독이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1997년에  한국방송협회에서 발행한

한국방송 70년사에 따르면 좀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이책의 P89. 를 보면 ......"거행된 개국식에는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간부들이자리를 가득 메웠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표해서는

 김옥균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박영효가 인사를 했다.

 박영효는 오랫동안총재가 없는 조선방송협회의

부총재로 있었다." 고 썼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확인해야 할 부문이 있습

니다.조선 총독이 참여했다는 부문과 경성방송국에

부총재라는 직책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부총재의 위상은

어떤 것인지? 등 이런 내용들이 확인되는데로 얘기를

수정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예기가 없어서 부득이 조방회가

 1981년에 발행한 JODK 조선방송협회 회상기에서

경성방송국 개국으로부터 해방 될 때 까지 근무했던

 뱃쇼님의 글 한 토막을 옮겼습니다.

 

"그동안 기기 조정업무는 날이면 날마다

기술부원들이 총동원되어 만반의 준비를 해서

 1927년 2월 16일을 기해서 방송을 내 보내게 되었다.

이날의 스타는 미쓰나카 방송부 주임이었는데 그는 연미복에

 실크 모자를 쓴 정장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고 조용히 마이크로폰

앞으로 나아가 JODK콜사인 제1성을 전파에 실어 내 보냈다.

이어서 조선어 방송은 노창성씨 부인 이옥경씨가

한 것으로 생각된다."

 

뱃쇼님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그때의 방송출력 1Kw, 파장 367M

 (뒤에 345M로 바뀜 * 그때는 주파수를 M로 했음)

라디오 보급대수 약 1,400대,  쌀 한가마니에 6원 정도

하던 시절에 미국제라면 라디오 한 대에 200원내외,

월 청취료 2원, 방송을 듣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신비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방송국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서울의 명소가 되면서 방송국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그때의 아나운서는 길거리를 마음대로 다닐 수

없을 만큼 귀한 사람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동 방송국이라고도 불리던 경성방송국은

1945년 해방되면서 KBS중앙방송국으로 바뀌어 1950년

 6.25로 폭파 될 때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방송시설이 폭파된 뒤에는

 1937년에 건립한 조선방송협회 사무동을 방송실로 개조해서 방송연주실로

사용하다가 1957년 남산에 새로운 방송국을 세워 제1방송을 옮겼습니다.

정동에 남아 있던 제2방송과는 5.16후에 국제방송국으로 새로 태어

나면서 남산방송국 옆에 있던 원자력원 건물을 인수해서

기존의 남산 연주실과 연결해서 사용하고 또 그 무렵

TV방송을 새로 시작하면서 모름지기 방송의

남산시대를 열었습니다.

 

 

 

정동의 옛터에는 경성방송국 시절부터

이 나라 방송을 지켜온 원로방송인들의 모임

 방우회가 1987년에  첫 방송 터 유허비를

세우고  해마다 그곳을 찾습니다.

 

 

 

 

한국방송사와 경성방송국

 

경성방송국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방송국이라

할지라도 우리방송인들이 우리문화와 우리말을 지키면서

길러왔습니다.  우리국민들은 18년간그 방송을 들으며 희노애락을

같이 해 왔고 해방소식을  그 방송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방송국의 터전 위에서 우리방송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경성방송국은

우리 방송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성방송국은 우리 동포들이 참여해서 건립했고 

그 안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방송 초기에 일본어와 우리말을 함께

 방송하면서 우리말이 차별을 받을 때 우리 국민은

 경성방송국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은 방송은

그 의미도 없었으려니와 방송국 운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1933년 4월부터 우리말을

 독립시켜 방송해야 했습니다. 우리말 방송을 위해서

방송국에 들어오신 분들은 우리문화를 지키고 우리말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1936년부터 우리말 방송을 맡은

제3대 제2방송과장 심우섭 선생님은 우리말 방송에

일본어를 섞어 방송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외부세계와 소식이 단절되어 암흑세계가 되어

 독립운동가들 마저 손발이 묶였을 때 우리방송인들은

단파수신기로 외부에서 오는 소식을 몰래들어 독립 운동가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전해서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가

많은 방송인들이 옥살이를 하고 또 옥중애서

숨진 인사들도 있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방송국!

 

우리가 가꾸어온 방송국!

 

우리겨래가 애환을 같이했던

경성방송국!을 우리 방송사가

아니라고 하면 일제 강점기

우리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정동 방송 터의 유래

 

정동일대 옛 지명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능리라 했습니다. 이 태조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던 해

즉위 3년 계비 강 씨를 현비로 책봉 했다가 5년 8월 13일, 질병으로

세상을 뜨자 10일간 朝市를 정지케 하면서 애통해 하다가 다음해

1월 3일 이곳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정릉이라 정하면서 이 일대를

정릉이라 했고 후에 약칭 정동이 되었습니다. 이 정능리에서도

신덕왕후의 정릉과 그 동측 정릉의供養寺로 새워진

흥천사가 있는 정동언덕 일대는 따로

皇華坊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