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경성방송국 이중방송과 한국어 전담방송실시

이장춘 2010. 3. 23. 05:52

 

 

 

경성방송국 이중방송과 한국어 전담방송실시

 

1933년 4월 26 일! 경성방송국에서

 

한국어방송 전담 새로운 채널이 탄생한 날 입니다. 

제2방송이라고 불리던 출력 10Kw, 주파수 610Kz 이 채널은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를 지키고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우리말 사용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우리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곳이 경성방송국 제 2 방송과였습니다.

 

 

1927년 2월 16일!  라디오 1400대정도가 보급되었던 시절에 방송을 처음으로 내 보냈습니다. 기도와 그 주변에서만 청취할 수 있었던 1Kw출력의 방송으로 청취범위가 제한되었고 또 일본어를 우선으로 한 방송편성으로는 우리 동포들이 방송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라디오 값 턱없이 비싸고 청취료도 비싸니 일반인은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러도 라디오 보급은 미미했고 청취료로 운영하던 방송국은 존폐의 위기에 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1929년 말에 라디오 10,000대 시대를 맞았지만 그 청취료로는 방송국 운영에 턱없이 모자라는 돈이었습니다.

 

 

이를 타개코자 하는 획기적인 대책으로 우리말 방송을 독립 채널로 하면서 1Kw출력을 10Kw로 늘리고 지방에도 방송국을 세운다는 방침을  내 놓았습니다.      50만원의 기채를 얻어서 송신소를 짓고 기계를  들여오기로 해서  1932년  한강 가 허허벌판이던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 136번지, 속칭  연희궁 잔다리에 17000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공사를 추진해서 그해 12월 준공을 보고 4월 초부터 시험방송을 거쳐 4월 26일부터 역사적인 한국어방송 독립채널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이중방송 실시를 계기로 1932년사단법인 조선방송 협회를 구성하고 종전의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경성 중앙방송국이 되었습니다. 한국말 방송을 전담하기 위해서 당시 문화 예술계에서 최고 반열에 계셨던 윤백남님을 제2방송과장(처음에는 제2방송부장 조건으로 선임했다고 함)으로 선임하고  이혜구, 최아지(최정석) 김문경을 공개시험으로 채용해서 제2방송과 진용을 갖추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1933년 4월 26일은 일본방송의 곁방살이를 하던 우리말 방송이 본집을 같게 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윤백남 제 2 방송과장을 정점으로새로 들어온 이혜구님과 이하윤님이 편성과 제작을 맡았고 최아지, 김문경 아나운서가 충원되어 박충근, 남정준님과

2교대로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송시간은 8시간에서 15시간이 넘게 편성되어   

우리말 강좌등 우리말 방송을 바로 전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스포츠 실황 중계 방송이 대폭 늘어 났으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민요와 국악, 때마침 들어 오기 시작한 현대음악,  유행가, 방송극, 동요, 어린이 방송 등이 우리 취향에 맞게 편성되었습니다.그때 방송국에서 일 하셨던 이혜구 선생님은 1970년에 발간된  文債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습니다.

 

 

이 기사는 (위에 있는 조선일보 기사를 말함) 방송국이 수에 제한 있는 재한 일본인을 말짱 청취자로 삼켜 버리곤 우굴 우굴 있는 한국인 청취자 감을 보고 입을 딱 벌린듯한데 아닌 게 아니라 실제 그랬을 것이다. 그때 당국은 어쨌든 간에   한국인 청취자는 이중방송으로  인하야  처음으로 하루저녁을 우리말 방송을 즐길 수가 있었다. 마치 돌 섞인 밥을 먹다가 石拔米의 밥을 맛본 듯하였다. 이혜구 선생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이중방송의 실시는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활기를 불러 넣어 주었고 라디오 보급은 빨라졌습니다. 한국방송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중방송 실시는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활기를 불러 넣어 주었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이나 협회로서는 우리말 제2방송의 설치 목적이라 하여 心田開發, 農村振興, 婦女敎育의 3대 방침을 수립하고 직접 간접으로 사상개조, 황국 신민화 운동을 프로그램 속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제2방송의 독립 탄생은 그 당시로서는 한국인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방송 시간도 1일 16시간으로 크게 늘었으며 방송인들에게도 새로운 의욕을 불러 넣어 주었다.

 

양악과 야외 실황방송 같은 프로그램은 아나운서만 따로 놓고 방송하거나 혹은 마이크 두 개를 놓고 한. 일 양쪽 아나운서가 유선중계를 하였으며 라디오 체조와 경제 시황은 제1방송에서 전담하였다.

 

그 밖의 프로그램은 제2방송이 독자적으로 다채롭게 편성 平行방송하였다. 반면에 제1방송은 주로 도쿄방송의 중계를 위주로 편성 방송 하였다. 한국방송사에서 인용했습니다.

 

 

 

 출력이 강화되어 지방에서도 방송청취가 가능해져

"지방도시의 밤"이라는 새로운 현지 중계밥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평양, 인천, 부산, 대전, 대구 등 대도시에 마이크를 옮겨

각 지역 특성을 살리는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1935년부터 지방 대도시에

차례로 차레로 방송국이 설칟되어 점차적으로 청취가능지역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제2차대전 전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해 나갔습니다.

 전쟁으로  우리말 방송은 많이 위축되었어도  1945년 해방 될때까지

우리말 방송은 중단되지 않아서 언제던지 우리말 방송을 들으면서

애환을 같이 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방송을 통해서  해방의 소식을  들었고 해방된 땅에서 우리 손으로 우리방송을 가꾸워 왔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지금 들려오는 노래는 왕수복의 인생의 봄입니다.

 

 

02 인생의 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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