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세기 최고의 미성가수 인기가수를
꼽으라면 남인수님과, 이난영님을 꼽았습니다.
어둡고 고달팠던시절 즐거움을 주고, 희망을 주고, 마음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남인수님 님이 살던 그시절은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그 노래, 그정신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상돌아가는일을 잘 모르는 시골사람들도 남인수, 이난영,
황금심, 현인, 고복수, 신카나리아, 장소팔,고춘자의
이름은 알고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1918년 경상도 예향의 도시
진주에서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안고
태어난 님은 어려서부터 노래부르기를 좋아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진주에서 봉래 보통학교를
나온 님은 1935년 어느날, 강문수라는 이름으로
'시에론 레코드'사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고
그때부터 가수 활 동을 했습니다.
이때 부른 노래가 지금 듣고 계시는
눈물의 해협이고. 기타 반주를 해주었던 작곡가
박시춘님은 어린강문수의 재능을 인정해서 본격적으로
그 뒷 바침을 해서 노래공부를 시키면서 방송 출연이나
레코드 취입을 위해 힘을 기울여 뒷날 이
황성 옛터를 실었습니다. 동영상을
처음 불렀던 눈물의 해협은 1936년 7월
레코드로 발매되기 시작해서 팔려나갔고 그때
강문수의 장래성을 발견한 작사가 강사랑은 님을
메이저 레코드사인 오케이레코드로 끌어들였습니다.
남인수란 예명은 오케이레코드가 1936년10월
범벅서울을 내면서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님의 대표곡으로 애수의 소야곡은
님이 처음불렀던 눈물의 해협 멜로디에
이부풍님의 신작 가사를 붙여 발표한 곡이었습
니다. 1937년말에 발매되기 시작한 애수의 소야곡을
담은 음반은 님을 인기 정상으로 이끄는 첫걸음이기도
했습니다. 이 음반을 주문하려는 전국의 레코드
상들이 서울로 몰려들었습니다.
남인수님의 어려서 이름은 최창수였고
강씨 문중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가
그 이름 강문수가 되었으며 그 유명한 남인수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사용한 예명이었습니다.
저음과 고음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3옥타브의 음역을 지닌
님의 특유한 음성은 국민 모두의 심금을 울려 국민가수라고
했고 그렇게 특유한 목소리는 님이 가신지 50년가까운
세월이 뭇사람들의 귓전에 들려오는듯 합니다.
반듯한 매너에, 술, 담배를 멀리하면서
바른 생활 태도는 뭇 가수들의 모범이 됐고
진정한 '서정가요의 황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때론 나라없는 설움을 달래주기도하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들에 위안을 주기도하고
못살던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국민가수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를 생각 할 수도 없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벽에걸린 스피카가 유일의
소식원이었고 위안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그
스피카에서 날이면 날마다 흘러 나오던 노래들, 그
노래들은 지금도 5, 60년대를 살던 분들의
귓전을 울리는 듯 합니다.
애수의 소야곡과 목포의 눈물은
그시대에 최고의 애창곡이었고 그 노래를
부르던남인수님과 이난영님은 가까운 친구이자
누이동생처럼 살았으며 공연이 있을때면 같이 다니고
외로우면 같이만닜습니다. 말년에 건강이 나빠진 남인수,
6,25때남 편을 잃은 이난영은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30년대부터 최고의 가수였던 이 두분은 다
60년대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1961년에 구성된 한국연예인협회
초대 부이사장을 하던 님은 44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님은 세상을 뜨셨어도
님이 부른 1,000여곡의 노래는 길이 남고 방송에서는
날마다 님의 노래가 울려퍼지면서 못살던 그시절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님이 부른 노래가
일본 군가로 사용된적이 있다고해서 친일파라고
하는분도 계시지만 그시절에는 그런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국민들은님의 노래에 심취하고 방송국은 그 노래를 들려주며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습니다. 지금처럼저작권 시비같은것도
없던 시절이었기에부담없이 그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왼쪽사진은 1941년, 남인수 부부와
(중앙- 남인수,오른쪽- 김운화) ,백난아(당시
19세, 왼쪽)이 일본 전국순회공연 중 분장실에서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부인 김은하은 알아주는
무용가였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40년대 말 이난영,
장세정, 김정구과 국도극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1939년 오케연주단의 모습입니다.
1939년 조선 악극단시절 남인수.
멤버들의 사진 앞줄 왼쪽 부터 이난영,
서봉희, 이화자, 맨 끝이 단장 이철 가운데줄
왼쪽 부터 이봉룡, 남인수뒷줄 두번째 부터
엄재근, 송달협, 김정구님 지휘봉을
든사람 손목인
1939년 만주 신경에서 서영덕과 함께한 사진
신경은 지금의 장춘입니다.
군예대시절 남인수 (앞줄 왼쪽 )
남인수 (앞줄 왼쪽) 입니다. 다음부터
차례로, 신카나리아, 황금심, 고복수
가요계 황제-남인수, 가요계 여왕- 신카나리아
모던가수- 고운봉, 오리엔트 전속- 김용태, 가요계의
호프- 김백희 등의 광고문구가 보입니다.
1958년 국도극장 공연을
마치고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한 남인수
앞줄 영화배우 김지미님, 가수 이난영님,
뒷줄 계수남, 남인수, 이민, 고운봉,
김선영님의 모습입니다.
맨 왼쪽이 고복수, 왼쪽에서 두번째가 남인수
세번째가 김정구 오른쪽 포스터에 남인수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있습니다.
운수남자님이 남인수의 연도별 힛트송을 정리하셨습니다.
남인수님이 남긴 연도별 힛트송에 대해
정리해보면, 눈물의 해협>은 36년 7월,<흑마탄식>은
38년, <울며 헤진 부산항>은 40년,<청춘항구>,<비오는
상삼봉>은 41년,<어머님 안심하소서>는 43년,<무정천리>는
41년,<고향은 내 사랑>,<이별의 부산정거장>,<고향의
그림자>는 54년,<추억의 소야곡>은 55년에
각각 발표된 작품입니다.
남인수, 박시춘, 이난영 글 더 보기 영문자 클릭
남인수와 이난영 동영상 노래모음 망향가,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967
낙화유수 작곡가 이봉룡과 남인수의 노래 조명암작사 박남포(반야월)개사
http://blog.daum.net/jc21th/17781621
민중과 더불어 산 가요 한평생 박시춘
1935년, 남인수 데뷰곡, 눈물의 해협
동영상, 남인수님의 황성옛터
http://blog.daum.net/jc21th/17780448
박시춘과 남인수 그리고 "애수의 소야곡"
남인수님과 가장먼저만난 작곡가 박시춘님의 사진,
젊은시절 남인수님의 (맨왼쪽) 고향인 진주 촉석루래에서
작사가 구완회님 (오른쪽에서 두번째 ), 작사가 박영호님
(오른쪽) 과 함께한 사진, 그리고 이난영님과
함께한 사진을모은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