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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할머니 복혜숙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배우, 성우

이장춘 2010. 4. 27. 02:26

 

 

 

 

 

 

 

 

방송할머니 복혜숙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배우

   

  
방송가에서 방송 할머니로 통하는 복혜숙님 !
방송인으로, 연극인으로, 영화인으로, 일생을 통해서 그토록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분도 드물 것 같습니다. 1959년 방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로운 방송문화상을  받았고 1962년 후배 영화인들이  총출연하는
 님의 40주년 기념  스타의 밤 공연이 있었을 때 화려한 인생역정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1981년 “ 낮은 데로 임 하소서 ”
영화에 출연하면서 할 수 는 일을 다 하고  1982년 세상을
뜨셨습니다.  떠나신지 30년이 다 되었어도
님의 족적은 길이 빛납니다. 
  
 
들려오는 노래는 복혜숙 방송 할머니가
 부른  "그대 그립다" 입니다. 
 

 
 
 죽어서 태어난 아이가 삶을 찾아 생을 이어가고,
국내에서 배움의 양이 안차 스스로 돈을 벌어 일본유학을 가고,
객지에 나가 못된 짓 한다고 일본에서 아버지에게 끌려오고, 시골 일본어
 교사생활이 불만족해서  집을 뛰쳐나오고, 극장가 돌아다니며  배우 시켜 달라
 사정하고, 온갖 고생 끝에 배우가 되건만 또 여의치 않아  기생이 되고, 모두가
 선망하는 최고의 인기 여배우, 방송극 출연자, 연극인 되었건만  생활비가 없어
 다방을 경영하고,  길고긴 삶에,  화려한 불꽃을 피우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복혜숙님!   그  인생역정에 얽힌 극히 일부에 불과한
얘기일지라도 글을 써 보려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깁니다.
 
 
본명은 마리(馬利). 충청남도 대천(大川) 출생.
1919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수예선생이 되려고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가셨지만
극장가를 돌아다니다보니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일본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집에 대려다가 스스로 새우신 강원도의 금화여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한
 복혜숙님은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와서 1920년 신파극이라고
 부르던 신 극좌(新劇座)에 입단하셨습니다.
 
신파극은 전성기를 지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직접 작품을 쓰시고 그 연극무대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공부도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20년대 중반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극인, 영화인이 되셨습니다.
 
 
복혜숙님은 1920년대에만 해도
 데뷰작 농중조를 비롯해서 홍련비련,
 낙화유수,  세 동무,  지나가의 비밀 등의 
작품에서 여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님은 신일선님과 함께 20년대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바로 그 무렵 1924년 말부터 이 땅에서
 방송시험전파가 발사되고 연극계에서 같이 
활동하시던  최승일님이 시험방송을 참여 하게
되었으므로 자연스럽게방송에도 참여하게
되셨습니다.   그때는 방송극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연극무대를 마련하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청취자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상황설명을 하면서 연극을 하면  그것이 바로
방송극이었습니다. 방송극은 1925년 6월부터
 매주 또는 격주로 정례화 되었습니다.
 
 
 시험방송이기는 했어도 정규방송처럼
방송 되어 출연자는 정규방송이나 시험방송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처음나간 방송극은 “새벽종”이었습니다.
 소설가요, 사회운동가였던 최승일님은 연극계의 동지들과  이 프로그램을
 같이 했습니다. 방송국 개국 전후시기부터  방송극은 중요시 되어
1926년 6월에는 최승일님이 이경손, 김영팔님 등과 같이
라디오 극 연구회를 창립하면서 라디오 극은 더
활성화 되고  복혜숙님의 역할은
더 중요시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방송극과, 영화와, 연극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연극계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토월회”가 방송극에 본격적으로 참여
하면서 복혜숙님은 토월회 구성원으로서도
방송극에 적극 참여 하셨습니다.
 
그때 이름 있던 방송극 “혈육” 이나
 “이 대감 망할 대감 “ 등이 토월회에서 참여한
작품이었습니다. 또 이 무렵 뒤에 경성방송국 우리말
방송과장을 하시게 되는 윤백남님이 영화에 출연 할 것을
권유하면서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셨습니다.
 
이 영화가 바로 1926년에 상영된 농중조
새장안의 새라는 영화였습니다.  뒷날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나운규님과 함께 출연한 이 영화가
 장안의 회재가 되면서 그 인기는 치솟았습니다.
 
그로부터 영화출연도 자주 있었지만
출연자에게 개런티가 없던 시기인지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비너스 다방의 얼굴 마담으로 나섰다가
 다방의 경영주가 되어 8년 동안 그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생활수단이고
 방송과 영화, 연극이 본업이었습니다. 1933년
우리말 방송인  제 2 방송이 따로 채널을 확보 하면서부터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기까지 방송극은 더 활성화 되었습니다.
 성우가 따로 없던 그 시절에 주요 방송극 배역진이나 낭독에는
 의례히 복혜숙님의 명단이 올랐고 날마다 방송국을
드나드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1939년부터 KBS방송극을 비롯해 글을 쓰신
방인근님은 회고담에서   “ 방송작품은 작가와 낭독자가
서로 호흡이 맞아야 했다.  그런 호흡은 복혜숙 여사가 잘 맞추어
주었고 내 작품을 제일 많이 방송 해 주었다. 여사가 읽으면
안심할 수가 있었다 .어떤 분은 낭독을 잘 못해서 작품을
잡치고 죽여 버리는 수 도 있었다 ” 하셨습니다.
 
복혜숙님은 60년대까지 쉴 사이 없는
 활동을 하셨고 최고의 방송연기인이고, 영화인이고,
연극인이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길에서는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시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 장식물을 만들며 세월을
보냈지만 1981년까지 영화에 출연하시는 등  생이  다 할 때까지
하시던 일에 삶을 불살랐고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선각자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복혜숙님은 1982년
 10월 5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생전에 영화평론가 이영일님과의
인터뷰내용을 중심으로 복혜숙님의 초기 얘기를
 좀 더 하고 끝내겠습니다.
 
“ 그동안에 사는 고생은 말도 못해.
그땐 배우도 개런티니 뭐 그런 거 없어. 그때는
하루에 10전을 줘. 교통비 하라고. 그럼 그거 5전으로
 호떡을 하나 사서 두 끼를 먹고 또 5전으로는 전차타고 다니고.
내가 나중에 ‘비너스’ 할 때 커피 10전 하구, 홍차 8전을 했으니
 알 만하지. 배우학교에 다닐 때 이서구씨가 와서 토월회  ( 1923년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극단체. 주로 번역극을
소개. 복혜숙은 토월회 전성기인 1925년부터 활동했습니다)
하자 그래. 그때 토월회가 광무대를 썼는데 난 일 년 내내
거기 서 있었지. 연기는 여기서 다 배왔어.
 
<춘향전>을 제일 많이 했지. 장기공연에 재상연에
 전국 순회공연에. 그때 광무대 그 언저리 여관들이 전부
돈벌었다 그래. 시굴서 가식(가족- 필자주)끼리 모두 올라와서
보구 묵느라구들. 연극하고  이렇게 댕길 적에 윤백남씨가 오셔서
 “영화를 하나 맡았는데 너 나와서 좀 해라” 그러더라구.
그게 인제 <농중조>(籠中鳥)야.“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의 통속극, 농중조에서
 복혜숙님의 역은 여주인공 마화숙이었습니다. 젊은 남녀의
자유연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나운규님이 조연으로
나와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영화였습니다.
 
19330년대부터는 레코드 음반도 제작 판매해서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목장의 노래 등을 직접 불러 
유행가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목장의 노래" 가사를 올렸습니다. 
 
1. 보리나무숲 그늘 푸르고
찔레꽃 봉우리에 이슬 맺힐 때에
아기시의 노니는 사랑을 따라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2. 포푸라 나무 숲 그늘 끝없는 저쪽
 불그레한 노녁놀 넘어 갈 때에
아가씨의 들기는 바다 푸르니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복혜숙님 관련글 보기 (아래 영문자 클릭)

 

 

복혜숙 회고록, 최초의 영화배우, 최초의 방송성우, 방송할머니

http://blog.daum.net/jc21th/17781195

 

방송 할머니 복혜숙님의 시험방송 출연 체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391

 

 

강남달, 이정숙이 부른 1927년 낙화유수! 최초의 영화 주제곡

http://blog.daum.net/jc21th/17780586

 

 

복혜숙님이 시험방송시절 처음 출연하신 새벽종 장면 입니다. 
이백수,  변기종, 권일청님, 이경환님이 함께 했습니다. 

 

 

1933년 방송극 출연자들이 함께 한 자리입니다.
서월영, 김연실, 김선영, 강석연, 박진,  김용규,
이운방 박재형, 김선초, 윤성묘(무)님입니다. 
 
  

 

TBC-TV에서 돌풍을 일으킨 아씨 주인공에 대한 시상식에 선 복혜숙님-1971년-

 

1958년에 찍은 복혜숙님 가족사진입니다.  사위 성낙응님과
딸 김진영님입니다. 외손주는 영경,  철경이라고 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복혜숙_육성.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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