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경성방송국 제2대 한국말 방송과장 김정진님

이장춘 2010. 3. 25. 06:14

 

 

경성방송국 제2대 한국말 방송과장 김정진님

 

예술가이고 언론인이면서

 

1920년대의 대표적 극작가로 꼽히던

 

운정 김정진(雲汀 金井鎭 ) 선생님이 1933년

 

11월 13일 윤백남선생님 후임으로 제 2 대 방송과장이

 

되셔서 1936년 숙환으로 세상을 뜨실때까지 계셨습니다.

 

"조선어 강좌"를 신설하셔서 우리말을 닦고 보존하는데

 

힘을 기울이셨고 문학가로서 방송극을 쓰고

 

연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님이 방송과장으로 재직하시던

1934년 연말부터 직원들이 직접출연한

특집방송극을 제작 방송했고 1935년 12월 2일에는

 연말 특집 방송극으로 김정진 과장님이 직접 극본을 쓰시고

연출을 맡은 "신안 채귀방어 (新案 債鬼防禦)가 제 2 방송과 직원

 이하윤, 이혜구, 이석훈, 남정준, 이계원님이 출연해서 제작한 작품이

방송되어 방송사애 특이한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방송은

망년회 비용을 마련키 위해 제작 했다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국 우리나라 스텦 드라마의 좋은 본보기로

기록 된 것입니다.

 

선생님이 방송국에 계시던 때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표방하면서 조선인들에게

 일본말을 배우게 하고 모든 공공 기관에서 일본어를

 써야 했으며 교과서도 일본어로 되어 우리말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기였지만 우리말 방송을 하지 않으면 방송을

 듣는 사람이 없어서 청취료를 받을 수 없고 결국은

방송국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경성방송국

 제2방송고애서만은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우리말로 방송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서

우리말을 바르게 알리는데 힘을 기울여 방송국

직원들에게는 한자풀이며, 문법이며 일본교육을 받은

젊은 방송인들이 무의식중에라도 일본식으로 하려면

이것을 바로 잡아주기도 하면서 조선 사람들이

우리말의 기본을 잃지 않도록 하는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윤백남선생님이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프로그램을 신설하려고

했지만 미쳐 실현시키지 못했던것을 그 뒤를 이은

 제2대 방송과장 김정진선생님이 "조선어강좌 시간"을 정식

프로그램으로 신설해서 방송했습니다. 그때는 조선어 강좌

같은 방송은 지금처럼 5분이나 10분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고

 30분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1주일에 30분간의 "조선어 강좌"

프로그램이 방송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프로그램이

따분하고 지루해서 듣는 분이 안게시겠지만

그 때는 이런 프로를  모두 들었습니다.

 

뒤이어 1935년 12월에는

어린이 신문프로를 신설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936년 8월 최남선 선생님을 초청해서

할머니와 호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한일이 있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도 앞에서

맘씀드린  방송극 "신안 채귀방어 (新案 債鬼防禦)를

 비롯해서 계속 글을 쓰셨습니다.

 

선생님은 키가 작으며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로 사람을

만나서 인사할 때도 허리를 궆혀 인사하는

법이 없고 오히려 허리를 뒤로 펴고 임하셨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기자로 계실때는 한, 일 두나라 융화는

 불가능하다는 기사를 써서 물의를 일으킨적도 있고 우리말이나

 일본말이나 표준말 쓰기를 기본으로 삼던  선생님은 성격이

괄괄하셔서 일본 유학시절 전차를 타고 가시던 중

교도 사투리를 쓰는 차장의 뺨을 때렸다는

얘기도 있어 여러 가지를 시사하게

해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뚜렷한 국가관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된 김정진님은 일본인과는 타협이 잘 안되었지만

조선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인자했으며 부하들에게는 아주

싹싹한 상사로서 훈훈한 가운데 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갖추어 주신 분 이었습니다.

 

 

 

김정진 과장님 시절 제 2방송과 직원들이

연말특집 방송극을  제작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김정진사진이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사진 구하기가 어려운데

2006년 범우사에서 선생님이 쓰신 기적불패라는 책을 발간 하면서

그 책의 표지로 사진이 실렸기에 활용했습니다.

 

 

 

 

선생님은 1886년, 명망 있는 집안에서

 테어나 어린시절 한학공부를 했고  열두 살 되던

1898년 사립 보흥학교에 입학, 1903년 이 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사립 일본어학당 일본어과에 입학,

1905년 수료하셨습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는

동경수학원에서 공부하셨고, 1908년 4월

일본 도쿄 사립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

1909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하다 동경 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윤백남 선생님과 이 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졸업후 1917년부터 당시 일본

신극 운동의 선구자인 시마무라 호오게츠에게 1920년까지 4년 동안 신극 수업을

받았습니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여러가지 기법을 실험한 훌륭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윤백남선생님과  민중극단에 참여, 전속 작가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사상 운동과 연극, 연극의 기원과 희랍극의 고찰과 같은  평문을 발표하는 등 

연극 비평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랜 일본 생활로  ‘일본말을

일본사람보다도 더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국내에 오셔서 희곡, 평론,수필, 소설 등을

쓰시던중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34세의

나이로 제일 나이많은 기자가 되셨습니다.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선생님이 29세, 주간 장덕수 26세, 편집국장 이상협27세 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선생님은 누구 못지않은 열혈 사회부 기자였었다고 합니다.

 1923년 ‘페허’ 동인지발간을 위해   잠시  동아일보에서 나온후 시대일보

(3대 민족지로 뒤에 중앙일보가 되었음)창간때 지방부장이 되셨고 뒤에

조사부장이  되셨습니다.    호치신문(報知新聞) 경성 특파원으로

근무하시다가  방송국에는  1933년에  오셨으니 이때 47세가

되셨고  50세가 되던 1936년 12월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선생님이이 남기신 작품은 희곡 11편과

 13편의 평론,수필, 소설 등을 남겨 후세분들에게

훌륭한 문집으로 평가받으며 서구생활 양식과 자본주의에서

 파생되는 이기주의와 배금주의 사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많이 쓰셨

습니다. 전변, 약수풍경, 잔설 등 전통적 인습을 비판한 작품군과

 기적 불 때, 15분간, 찬우슴 등 식민지의 궁핍한 현실과

사회적 모순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작품군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20년대의 대표적인 희곡작가로서

비교적 건실한 작가의식을 지니고 '인습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과 '식민지 조국의 헐벗은 삶의

 드러냄'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작품 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동야일보 창간호에 실린 선생님이 쓴 기사입니다,

 

 

1969년 4월 11일자 기자협회보에

 유광렬선생님이 쓰신 글, ‘한국의 기자상

 – 김정진 선생’을 인용합니다.

 

“그(김정진)와 필자(유광렬)는 동아일보

 창간호를 낼 때에 함께 사회부 기자로 일하였었다.

그에게 특색이 있다면 일본말을 일본사람보다도 더 잘하는

 것이었다. 오래 일본에 유학하였으므로 일어에 능할 수는 있으나

 그것도 지나치게 잘하는 것이다. 내내 그를 일본인인줄 알았던

 경성부 관리들은 ‘동아일보 같은 민족주의 신문에도

일본인 기자가 있다.’고 수근대기도 했다.

 

그의 이름 또한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인 이름과 비슷하여 일본 관리들이

그를 ‘가나이(金井)상’이라고 불렀다가 그에게

 호되게 호령을 들은 일도 있었다.”

 

 

 

 

범우사에서 기적 불 때 를 발간하면서 쓴 글

 

 예술인에서 기자로, 그리고 식민지

지배당국에 분노하여 힘없고 궁핍한 조선 민중의

 권익을 수호해주기 위해 싸운 투사로!  구한말 조선의

시스템이 붕괴하고 ‘근대적’이라는 명분 하에 민중의 

삶을 더욱 척박하게 만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기자적 고발. 

 

 현실을 두루 관찰할 수 있는 기자라는

 직업은 현실 세계에서의 삶의 모습을 예술과 결합시켜

 기자이자 작가인 김정진으로 하여금 문학사적

신기원을 이룩하게 했다.

 

운정 김정진은 1920년대의 대표적

극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주로 사실적인 극작술을

 구사하며 동시대의 다양한 삶의 모습에 주목한 그의 작품 세계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과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다성적 텍스트다.

김정진의 희곡은 정교한 무대 묘사와 개연성 있는 사건 등,

특출한 드라마투르기로 자연주의적 현실의 재현에

있어 주목할 만한 문학사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특출한 현실재현은 신문기자로서의

 산문의식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었으며, 일차적으로

 이러한 재현을 문학적 욕망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김정진의 후천적인 의식적 노력과 성찰이 근대

지향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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