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방송

DBS 동아방송의 수난 앵무새 사건

이장춘 2010. 2. 23. 05:40

 

 

 

 DBS 동아방송의 수난 앵무새 사건

 


1960년대 중반 앵무새가 세상을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시사칼럼 앵무새는 방송시간은 비록
5분이었지만  수위 높게 외쳐대던 말소리가  전파를 타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지만 한편에서는 그 말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나라 일을 하시던 분들이 주로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 앵무새의 말을 전파에 실려 보낸 동아 방송은

설립 1년 남짓되던 1964년 6월 어려움을 겪게되고  한동안 세상사람

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5.16후 군정이 민정으로 넘어

왔지만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런가운데 경제개발이 급선무였던
정부로서는 한. 일협약을 채결하고 보상금을

받아 나라일에 쓰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굴욕 외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웨쳤습니다.

생각이다른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시위가 계속

되면서 세상은 시끄러웠습니다.    마침내 1964년 6월

3일을 기해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기에 이르러 언론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방송국은  계엄군이 지켰습니다. 

 비상계엄이 있던  다음날인 6월 4일 기관원들이

동아방송 방송인들을 연행 해 갔습니다.

 

 

 

 

 DBS방송부장 최창봉님과
뉴스실장 고재언님,  편성과장 이윤하님이
일차로 연행되고  오후에는  제작과장 조동화님,
담당 PD 김영효님이 연행됨과 동시에  앵무새 원고와
이 무렵에 방송된  방송대본,  뉴스원고를 압수 해 갔습니다. 

다음날에는 앵무새 집필자인  동아일보 외신부장 이종구님도

연행되었습니다. 6월 15일 반공법과 특정범죄 처벌에 관한 임시

특별법 등의 위반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 되었습니다.  1964년

7월 28일 계엄이 해제되고 민간법원으로  이관되어 66년

 11월 19일 6명 모두에게 징역 3년이 구형 되었지만 

 29일에 열린 선고 공판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 되었습니다.

 

 

 

 

찰이 항고한후 오랜기간 재판이
연기되다가 1969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또 무죄가선고 되고 검찰이 공소를 포기해서

5년 6개월만에 무죄로 확정 되었습니다.

 
 
 
판결문의 요지
 

 

 

피고인들이 신문이나 잡지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예민한 반응을 주는 전파를 통해
좀 지나친 보도(뉴스)나논평(앵무새)을 한 것은
인정되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비난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형법에 규정된 내란죄와  적극적인 범죄를
했다고는 몰 수 없으며 내란 사전 선동까지의
 행위에는 이르지  못했으므로 무죄........
 
이렇게 해서 이 사건은 법률적으로는
종결 되었지만  그간에 최창봉님, 조동화님,
이윤하님은 40일간, 그리고 고재언, 이종구,
김영효님은 64일간에 걸쳐감옥 생활을
하시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앵무새사건 당사자 들이
연행되던 때를 전후해서 동아방송에는
여러 해괴한 일들이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6월 6일새벽에는 공수특전단 소속
장교들이 동아일보에 난입했고  9월에는
남북어부귀환 기자회견 중 중계선
절단사건이 있었습니다.
 
1965년 9월 7일에는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대리 집 폭탄 테러사건,
조동화 제작과장에 대한 납치테러가 감행 되기도
 했습니다. 최창봉 방송부장님의 집에는 협박전화가
이어졌고 김영효님은 이사할 때 마다 파출소의
감시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앵무새 사건이 일어난 배경
 

 

 뉴스실장 고재언님 글
 

 

 
 
 
동아방송 뉴스와 일부 프러그렘
내용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요소가 강했던
것은 사실이고 동아일보의 사시와 동아방송 주지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봐서 비판적인 경향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던것도 사실이었다. 정부는 이같은 비판적인 태도를

 지나치다고 판단해서 적극적으로 제재를 가한것이 이른바 앵무새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앵무새 사건이라고 붙혀진것은 앵무새 프로그램이  그  제재의 

 대상에 들어 있어서 편의상 보도용으로  명명한 것이고 사실은 뉴스를 

비롯한 동아방송의 전반적인 논조가 그 표적이 된것이다.

동아방송류의 언론활동에 물질적인 제동을 걸자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고재언님의 글에서 옮겼습니다.
 
 
 
 

 

앵무새사건  공소장 내용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3.24 한일 회담성토대회, 4.19영현 추도식,
4.20,  4.21 활동시위로 민심을 교란하고 반정부적
감정과 무질서 상태가 조장 되고 있는 때에 이에 동조해서
반정부 의식과 전시 불법데모를 확대케 할 의도하에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등 등 죄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앵무새 프로그램의  방송 내용
 

 

앵무새의 문제된 원고는 
 당시 압수당한 이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계엄사 수사 당국이 증거로
제시한 1964년 4월 2일자 앵무새는 김종필-
오히라메모” 내용으로 그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오히라의 메모를 서울시내
32개 대학생 대표5 8명에게 몰래 공개
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보도는 급기야 국내외에
당연한 파문을 일으켜 놓고 말았어요. 이건 결국 정부의
위신이 여지없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이번 3.24 학생데모의
 수한 의의에 결과적으로 적잖은 허물이 되고 만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 같아 씁쓸해요.
 
그래 우리 학생들의 이번시위가
 이처럼도 그 지도이념이 정치질서를 무시할 만큼
성급했고 또한 자신의 행동한계에 대한 지각이 이처럼도
 없었나 하는 안타까움과   나아가서는 국가의  헌법구조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본일이 없는 것 같은  젊은이들인가
하는 의아심과 도대체 현 행정부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때 묻은
짓을 했기에 백주에   만천하 국민의 눈이  또렷하게  떠 있는
자리에서 정치상식 이하의 수법으로 젊은 후배들의 혈기를
 무마 하려는 것인지, 뜻있는 국민의 마음에 도저히
 달랠 수 없는 슬픔을 빚어 냈어요.
 
당시의 앵무새는 내용도 내용

이러니와 이 원고를 낭송하던 이은미씨의

목소리가 매섭고  당찬 것이어서더 강열한 내용으로

 비춰 졌고  TV시대가 도래 하기 전 라디오방송의

위력이 대단했기에 그 영향력은  컸습니다.

 

 

 

 

 앵무새 담당 PD 김영효님은
2001년에 발행된 한국의 방송인 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동안 사태의 추이와 동아언론
 (신문, 방송) 의 논조를 예의 주시 해 오던
박 정권은 6.3사태를 계기로 즉각 동아방송 간부들을
연행한 것이다.  관련자 6명에 대한 연행, 구속집행은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일사분란 했다. 우리는 연행된지 10일만인 

15일 계엄사령부에 의해 반공법, 형법 등의 위반혐의로 제6관구 보통

 군법회의에 구속, 송치되었다. 계업사령부는 17일 이를 공표하여

 연행된지  13일만에 보도기관을 통해 비로로 세상에 알려

졌다.관련자 6명에 대한 험의 내용은 어마 어마 했다.

 
군법회의에 송치된 공소장에 따르면
 (1) 반공법 4조 1항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2) 형법 90조 2항 (내란 선전선동)
 (3) 특정 범죄 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3조 3항
 (허위사실 유포, 정부비방)
(4) 집회 시위에 관한법율 3조 2항
(붕법 집회의 선동) 의 위반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어마 어마한 범죄를
6명이 이심전심으로 공모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심전심이라는 표현은 당시 유행어가 될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리면 유명해지기도 했다. 방송사는

이 사건을 방송의 특정 프로 내용과 관련해서 현직 방송인

 6명이 투옥된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의빙송 언론 탄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앵무새사건은 과거의 이야기다. 1960년대를

무심하게 살았던 이들에게는 짧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담당 PD로서 64일간의

옥고를 치른 나에게는 긴 이야기로 남아

그 여운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전파매체로서

라디오의 사회적 기능과 방송 PD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역사가 격랑을 만나고 정국이

 격화 되면 방송도 곤욕을치르게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앵무새 담당 PD김영효님의 글이었습니다.
  

 앵무새사건 관련자 인적사항
 
 
최창봉님 (동아방송국장 대리) 
 
HLKZ, 서울MBC,  KBS-TV 개국책임,  
동아방송국 개국책임, 동아방송국장,
 KBS중앙방송국장, 한국방송공사 부사장, 
MBC사장,  방송위원 
 

 
김영효님 (앵무새 담당 PD)
 
 1958년 부산 MBC에서 출발,

서울 MBC를 거쳐 동아방송근무 중

양무새 사건이 일어났고 1980년 방송 톤폐합때
KBS에 와 15년을 근무 하셨습니다. 제가 중앙방송국
 대공과에 근무했던 인연으로 김영효님과는 자주 만나는
사이입니다.  제가 동아방송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하니 여러가지 자료를 제공 해 주셨습니다.
오늘 글은 김영효님이 보내주신 자료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이윤하님 (편성과장)
 
공보부 방송문화 연구실에서
일하시다가 동아방송으로 옮겨 개국시
편성과장을 맡아 보셨고 동아방송국
부국장을 하셨습니다.
 

 

조동화님 (제작과장)
 
출판사를 하시다가 동아방송국때
제작과장을 하셨습니다. 이 일로 방송국을

뒤로하고 풀판시업을 하다가 2014년 4월

17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고재언님(뉴스실장)

 

 동아일보사에서 문화부 차장
재직중 동아방송국 뉴스실장을 거쳐
부국장을  하셨습니다. 이종구님은 교수로

  재직하다가 동아일보 외신부장을 하면서

 앵무새를 집필 했습니다.  이 사건후 

 다시 강단으로 갔습니다.

 
  

 

 

이경희 (스무고개 박사) 선생님 글

 

 

춘하추동방송 잘 읽었습니다.

이번 소식중,' 보통군법회의에서 일차

공판 때' 사진에서 맨오른쪽 분이 조동화입니다.

이종구와 조동화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동아방송 제작부장시절 앵무새 푸로를 만드신 조동화

선생이 작년 4월17일에 작고 하셔서 몇일 후 17일에

 1주년 추모모임을 춤평론가회 주최로 동숭동

문예진흥원 예술의 집에서 갖는다는

 연락을 몇일전 받아서 알립니다.

 

조동화선생은 동아일보사건으로

퇴직당한 후 1976년에 '춤'전문 잡지를

 발간하여 현재까지 40년간 발행하시다가 작고

하셨습니다. 최창봉사장님의 '방송과 나'도  춤잡지에

 연재한 글로 출판된 책입니다. 저의 '李京姬 기행수필' 책도

춤잡지에 13년간 매달 연재된 글로 엮어진 책입니다.

방송과 관련된 이야기라 말씀드리다가 저의

이야기도 첨부했음을 양해바랍니다.  

 

이경희 드림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