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방송

실록 DBS 동아 방송 18년사 그때 그 뉴스

이장춘 2010. 2. 22. 03:36

 

 

 

 

실록 DBS 동아 방송 18년사 그때 그 뉴스

 

  

동아 방송의 중심에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보는 신문 듣는 방송”

동아일보사가 동아 방송을 창설한 기본 생각

이기도 했습니다. 뉴스로부터 동아 방송의  개국방송

프로그램이  시작 되었다는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동아방송이  그만큼 보도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보도방송의 스테이션 이매이지를 부각

시켰습니다. 동아일보의 강력한 취재력의 뒷받침과

다른 지상파 방송과는 달리  TV방송을 할 수

없었던 한계를 보도를 통해서 극복 하려는

동아의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개국 시부터 하루에 13차례나

정시 뉴스를 했고 65년 16회,  68년 17회,

71년 18회 정시뉴스가 편성되었습니다. 신문을 귀로

듣는다는 생각으로 라디오 조간이나  라디오 석간이 마련

되었습니다. 스팟트 뉴스나 임시뉴스등을 통해서 필요할때

수시로 뉴스를 전달함으로서 속보성이한층 돋 보였고

또 뉴스도 재미있게 제작해서 청취자들의

관심을 더 모아갔습니다.

 

 

 

 1969년 뉴스쇼 등장은 뉴스프로금램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방송사상 획기적인 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30분간에 걸쳐 뉴스를 쇼처럼 진행한

것으로 신선 감을 주었고 뉴스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뉴스쇼의 첫 퍼스낼리티는 이정석 기자였고 이동수,

박정하, 이효식, 이웅희등 이름 있는 진행자의 등장으로 한층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이 프로를 진행하면서 진행자 인기가

 더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이정석, 오상원,

 김택환, 이용희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70년 6월에 전용 뉴스 스튜디오가

마련되면서 제작, 송출이 더 원활 해졌지만

정치 사회적 격동기에 뉴스쇼가 잠시 뉴스 퍼레이드로

 바뀌기도 했지만 2년여 만에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보도프로그램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계속 확대 되었습니다.

 

  

직제는 처음에 방송부 안에 뉴스 실을

 두었지만 64년 9월부터 편집국의 방송뉴스부로

승격시키고 1967년 11월에는 특집 제작 반을 신설해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보도프로그램 제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보도에 특집 제작 반을 둔 것은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특단의

 조치로 받아 들여 졌습니다. 특집 제작 반은 그 업무영역이

늘어나면서 1971년 11월 보도제작부로 승격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다른 방송국에서도 보도기능에

특집제작반이 생겼습니다.

 

 

 

13명의 인원으로 시작된 보도인원이

6년에는 43명으로 늘어났고 기동력에 있어서는

 하늘에 헬리콥터, 세스나기, L-S기와 지상에서 두 대의

 FM카가 현장을 찾아 신속한 활동을 벌렸습니다.

지역국을 갖지 못한 한계를 기동력으로

 커버해 나갔습니다.

 

 

 

집중보도와 심층보도의 이슈가 될 만한

 대형사건 사고 등에는 전 보도역량을 집중해서

 청취자들에게 뉴스에 대한 충족감과 신뢰감을 주면서

 방송 보도의 모델을 쌓아갔습니다.

  

 

동아 방송은 국내 뉴스뿐만 아니라

해외 뉴스도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나갔습니다.

동아일보의 해외보도망 활용과 세계적인 통신을  24시간

텔레타이프를 통해서 수신하는 외신부의 역할이 큰 힘이

 되었고 뉴욕 타임스나 영국의 더 타임스등과 뉴스

독점계약을 맺으며 해외방송의 지속적인

 청취로 그 폭을  넓혀 나갔습니다.

 

 

 

뉴스프로그램은 취재원을 해외까지

확대한DBS리포트, 뉴스해설, 라디오 기자실,

뉴스살롱등이 편성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방송 보도문장의 개선과 순화 현장감을 살린 빠르고

다양한 뉴스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1964년 2월 20일 프로개편때 등장한

라디오 석간은 저녁 9시부터 15분간 방송된 것으로

그날의 주요 뉴스를 심층취재와 다각적인 시각으로  남녀 아나운서가

더불 토크로 재미있게 진행하던 프로그램으로 그 이전까지 낮 12시 뉴스가

하루 뉴스중 가장 중요한 뉴스로 평가 되었지만 라디오 석간의 등장으로

저젹 9시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청취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라디오 석간의 첫 프로듀서였던

고 이정석 기자의 회고담을 올리먼서

오늘 글을 마치겠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라디오 석간"이라는 명칭은

최창봉부장의 작명이었고 초창기 진행은

한경희 윤미자 아나운서가 맡았습니다. 주요 뉴스의

제목을 서두에 따로 뽑은것도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었고 브리지 뮤직의 뮤직의 사용에도 뉴스의 성질에

맞추어 골라낼 만큼 신경을 많이 썼지요.

 

함께 프로그램 제작을 맡았던

홍선주, 윤명중기자는 방송제작에 경험이 

믾은 편이었지만 워낙 기사에 따른 녹음량이 많은데다가

그 진행이 복잡해 처음에는 감히 생방송을 못하고 주요 부분을

미리 녹음해서 맞추어 나갔습니다. 녹음 테잎의 편집도 어렵고

녹음구성의 제작도 힘겨워서 겨우 뉴스시간에대기도 바빴고

방송도중에 녹음 내용을 편집하느라 혼이 나갈 정도로

당황한 적도 많았습니다.  실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주간 종합뉴스.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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