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 방송의 별 윤길구님

이장춘 2009. 12. 26. 19:23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 방송의 별 윤길구님
 

 

 

윤길구!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방송의 중추적인물이고 아나운서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아나운서가 방송국의 간판 격이던 시절, 뉴-스,

논평, 스포츠, 중계방송 등을  통해서윤길구님은 그 시대를

사시던 분들의  친한 벗이었습니다. 아나운서 최고 직책이었던

방송관, 보도와 아나운서실 등의 책임을 맡는 방송과장, 부산

방송국장을 거쳐, KBS 국제방송국장,  두 차례의 중앙

방송국장을 지내시면서 님의 발자취는 넓고 깊습

니다. 인품이 훌륭하고 부하직원들을 사랑하며

동지들과 늘 친근하게 지내면서

끈끈한 정을 맺었습니다.

 

 

   방송과장시절 윤길구님 (왼쪽에서 네번째분)옛 정동 KBS방송국 앞에서

 보도실장 한영섭,방송관리과장 김재연, 보도실 기자 박상진, 보도실 기자 한기욱,
방송문화 연구실 정순일님이 함게 한 자리입니다.
 
 
 

 

 
1960년대 중반에 마지못해 방송과는
 무관한 국립극장장을 맞게 되면서 그리도 아끼던
 방송을 못 잊어 병을 얻고 이 병으로 해서 49세의 젊은 날에
 아쉬움을 안고 세상을 떠나심에 장례는 방송인들의 뜻을 모아
처음으로 방송인장을 거행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방송인들의
 모임이 이루어져 그 모임이 4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온
 사단법인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 )입니다. 오늘 글은
윤길구선생님과 같이 방송국에 들어오셔서 방송기자
1호가 되신 문제안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1916년 10월 3일 해주에서 태어나
1940년 혜화전문 ( 현 동국대학교 전신 )
불교과를 나온 윤길구선생님이 방송국에 들어오신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던 국내 지하 독립운동 단파방송연락운동으로 많은 방송인들이 

감옥으로 가거나 방송국을 물러나면서다섯 사람의 아나운서를 공개모집

하게 되어이때 방송에 발을 들여 놓으셨습니다.  1943년 방송국에

들어오셔서2년이 지나 해방을 맞자 모든 방송이 일시에 우리

손으로 넘어오게 되고 이때부터 님은 방송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셨습니다.

 
그 전부터 계시던 아나운서 이계원님과
 민재호님이 방송과장이나, 계장의 직책을 맞게 되고,
윤길구님과 같이 들어오신 다섯 분 가운데 문제안님은 방송기자가

되시면서 윤길구님과 이덕근님은함께 아나운서 주임이 되셨습니다.  충청남도

 홍성에 가 교편생활을하신적도 있으셨지만 이것은  잠시이고 6.25가 일어나 오래된

 아나운서들이 VUNC나 VOA로 옮겨야만 했고, 또  현역아나운서들  여러명이 북에

끌려가  아나운서  공백상태가 됨에 님은 다시 방송국에서 방송계장이 되었습니다. 

부산피난시절을 거치면서 님은 단순한 뉴스의 전달자 뿐만 아니라 윤철상이라는

이름의 뉴스해설가와 논평가가 되어 복잡하게 얽혀가는 뉴스를 알기 쉽게

 해설하는 등  뉴스해설, 논평가로  자리를 굳혀 가면서 방송계장

으로서  아나운서실을  이끌어 갔습니다

 

 

 

노정팔님은 한국방송과 50년 자서전에서

"순수하고 소탈한 성품과 같이 방송도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하여 구수하고 시원 시원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는 뉴스등 행사중계등 모든 방송을 담당해 왔으나

그 중에서도 야구중계에 뛰어나 이때 야구중계방송은 혼자 도맡아

하였다. 전국에 야구팬이 많아 언젠가 대구지방으로 각도자랑

녹음방송을 갔다가 크게 환대를 받으며 야구중계방송을 한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일도 있다.  그는 후배 양성에도

 힘써 최승주, 황우겸, 박종세 아나운서 들에게

야구중계방송의 바톤을 이어받게

했다" 고 했습니다.

 

1953년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오면서
정부 직제상 중앙부처의 과장이 서기관일
수밖에 없던 시절에 아나운서 전문직을 육성해야
된다는 필요성으로 직책은 계장이되 직급은 과장급인
방송관 제도가 생기고 첫 방송관이 되셨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시사해설은 계속되어
당시의 이름 있는 해설가들과 어깨를 겨루었습니다.
1956년 6개월간의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방송과장이
되어 명실 공히 방송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셨습니다.
 

 
 
 
1958년 4월부터 부산방송국장으로 계시다가
5.16군사정부에서 대북방송과 해외방송 강화를 위해
국제방송국을 새로 신설하면서 국제방송국장이 되시고 
얼마 안되어 중앙방송국장이 되셨습니다. 중앙방송국장시절
TV방송국장을 겸임하신적도 있으므로 남산, KBS삼국의
국장을 두루 거치신 샘입니다.
 
1963년에 잠시 중앙공보관장을 하셨지만
그 해 5월에  두 번째의 중앙방송국장이 되셨습니다. 또
 얼마 안되어 방송과는 거리가 먼  국립극장장으로 자리를
옮기심에 마음상한 님은 그로부터 건강이 나빠져
1966년 5월 16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장례식은 모든 방송인들의 마음이 모아졌고
 사단법인 방우회 (한국 방송인 동우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유해는 그리도 잊지 못하던
 남산 방송 촌에서 머물다가 떠나셨습니다.
 
어려워도 어렵다 하지 않고,
호주머니에 돈 한푼 없어도 걱정하지 않고
 집에서 끼니 끌일 것이 없던 때도 세상이 다 그런
것이라면서 낙천적이시던 님이건만 방송을 떠나심에는
 괴로움을  감추지  못하시고  그로 얻으신 병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님은 49세의 젊은연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님을 아끼고 또 따르던 동료,   또는 후배  방송인들은
지금도 님의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합니다.
 

1966년 5월 장례식장에 나온 방송인들의 모습입니다. 
 

  

 

윤길구님은 스포츠 중계방송도 잘 하셨지만
스포츠를 즐기시기도 하셔서 사내 스포츠팀을 운영하던 시절
야구나, 농구주장을 맡아 사내, 외의 팀과 경기를 갖는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1958년 중앙방송국 농구팀의 모습이고
 앞줄 가운데 분이주장 윤길구님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송석두,
한영식, 윤길구, 장기범, 강찬선,뒷줄 오른쪽부터 임택근,
최두헌 황우겸, 세분건너 맨왼쪽 김석야님입니다.
 
아래 사진의 뒷줄 남방차림이 윤길구님입니다.
 
  
  
님이 8.15해방을 맞던날의 방송국 분위기를
 
써 놓으신 글 한편을 옮기면서 글을 마칩니다.
 
 
일본인 아나운서 등정(藤井)은 낡아빠진
긴 칼에 기름을 바르며 “이제 쓸 때가 올 것 같다”
혼잣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는 소위 대본영 발표의
거짓 전황이 오기만 하면 “이기고 말해. 이기고 말이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당시 일본어 방송과장 대사(大飼)는
“너도 일본인이냐” 하고   꾸짖었는데  그것은  상사로서의
말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화살이었다. 그러나 등정(藤井)은
일본인이든 아니든 간에 일본이 손을 들게 된 게
 아니냐고 대들곤 했다.
 
마침내 8.15 ! 나는 당시 직업 탓인지
일본 천황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
한국어 방송과장이던 이혜구씨는 일본인은  우리의
손님이 되었으니 한민족의 금도와 관용을 보이자는 말을
강조했다. 이 말을 할때 그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힘찼었다.
그래서 등정(藤井)의 칼은 쓸모가 없게 됐다. 그는 해방 후
난동에 대비코자 칼을 매 만졌던 것이다. 그는 해방 전
일본인에게만 주는 특배품의 하나인 담배를 나에게
곧잘 대주곤 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제 담배는
 네가 대라고 하기에 내가 대 주었다.
 
일본인들은 9월까지 머물러 있다가 갔으나
아나운서 나카무라만은 군정청의 요청에 의해
그 해 12월 초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그가 하는 일본어
방송은 뉴스에 한했는데 나는 그 번역을 구술로 해 주곤 했다.
 내가 일본 천황 히로히또는 ........하면 그는 하이하고
 원고에 적고는 방송을 할때는 “ 천황폐하께
옵서는 .....” 하는 것이었다.

 
  관련 사진 모음   

 

 
 

 1947년 11월의사진으로앞줄 왼쪽 세번째분이

윤길구님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문제안선생님, 이계원
방송과장, 윤길구, 민재호, 전인국님. 뒷줄 왼쪽부터  이덕근,

 

한사람건너 강문수, 또 한사람건너 편용호, 강준원,
이진섭, 홍준, 이성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부산피난시절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로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분이 윤길구님입니다.
앞에 스신 세분 왼쪽부터 최창숙, 김순철, 정순형.뒷줄
왼쪽부터 강찬선, 강익수, 양재현, 양대석, 윤길구,
이수열, 임택근, 한희동님 입니다.
  
 

뒤에 서 계시는 오른쪽분이 윤길구님입니다.
1952년 1월 부산에서 우문현답 프로그램 녹음을 마치고
 담소하고 있는모습으로 노천명, 조풍연님이 출연하고
강익수아나운서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1954년 4월 29일  제 2회 아시아 경기대회 중계방송반으로 오른쪽이 윤길구님입니다.
 

1956년 호주 멜본 대회 중계방송반 환송을 위해 공항에 나온 윤길구님입니다.( 뒷줄 왼쪽 )
  

 왼쪽문이 윤길구 님입니다.

 

 

1956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 6개월간의

 연수유학을 마치고 돌아 오시던중 같이 연수를 받은

한기선님, 조남사님과 함께 일본에 있던 VUNC에 들려위진록
아나운서,연예인 김복자님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윤길구선생님 손주 윤병주선생님 글

 

윤길구 선생님 큰 아들 윤형일님은

KBS 제1기 탤런트를 하는등 방송과 인연을

맺어오셨지만 일찌기 돌아 가셨고 둘재아들 윤남일

(윤남원)님은 2011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윤남일님의 아들 윤병주님이 아버지가 소장한 사진을

정리하면서 할아버지 윤길구 선생님 사진을

보내 주셨습니다

 

한번도 뵙지못한 친 할아버지십니다.

아버지가 중학교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때문

이지요.. 예전에 저도 한번 할아버지가 어떤분이셨는가

 자료를 찾아봤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이런블로그가 없었는데,
다시한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하는 좋은 글 감사

합니다. 못보던 사진도 많네요^^ 

 

 

     춘하추동방송 답글

    고맙습니다. 윤길구 선생님

    아드님이  KBS 탤런트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요즈음은 연락이 안됩니다.
    제가 병주님의 글을 보고 윤용노선생님 자제분 그리고

     손주분과 통화 했습니다. 아버님 성함이 형일씨라면서 한 집에서

     사셨다더군요. 저에게 전화한번 해 주셔요. 제 프로필에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가 있습니다. 010-9123-3807로 전화 하시면 어트때든지

     받을 수있습니다. 옛날부터 제가 엠파스에서 글을 쓰고 있었고

     그때도 글은 올려져 있었습니다. 엠파스가 폐쇠되고

    그 글이 싸이월드로 옮겨졌습니다. 싸이월드

    에는 옛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이후에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셔서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드렸는데 2013년 3월 20일 KBS사이버 테러로

    이메일 주소가 모두 사라져 연락을 할 수가 없게되었

    습니다. 다시한번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연락 주셔요. 주소, 전화번호, 메일주소를 주시면

     자주  메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1년 8월 3일

    윤길구님의 손주 윤병주님이 보내주신

     사진으로 방송사적 측면에서나 그 시절의 환경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진들이어서 우선 여기에

    올리고 관련 글을 쓸때 활용코저 합니다.

     

 

위 사진은 1943년 그해 방송국에 들어 오던 그해에 촬영한

사진으로. 일제강점기 경성방송국의 방송실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사진입니다. 아래는 1945년 해방될 무렵의 사진입니다.

 

  

옷차림으로 보아서 6.25피난시절의 사진이라고 추정됩니다.

윤길구님은 이 옷을 겨울에도 여름에도 입으셨다고 합니다. 왜? 여여름에도

그런 옷을 입느냐고 물으면 "여름에도 두터운 옷을 입어야 더운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 면서 유므러스하게 넘기곤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실은 입을만한 옷이 없던 시절에...........

 

1948년 서울 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야구를 중계하는 모습입니다.

이 무렵에는 야구를 할 수 있는 야구장은 서울운동장이 유일했습니다.

 

  195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야구대회 실황을 중계방송 하는 모습입니다.

황우겸 아나운서와 박능상 엔지니어의 모습이 보입니다.  

 

 

위 아래사진은 1956년 미국 유학시절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윤길구님은 6,25후 최초로 6개월간의 미국 유학연수를 다녀 오신분으로 

미국 유학연수는  선진방송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1952년으로 추정되는 담양 죽물시장을 찾았을때의 사진입니다.

6.25전쟁중 담양 죽물시장도 함께 볼 수있는 귀한 사진입니다.

 

 

가족이 함께한 사진으로 윤갈구님은 형일, 남일을 비롯해서 5남매를 두셨습니다.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김수환 아배마리아 임형주.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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