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과 함께한 문시형님의 일생
1948년 KBS중앙방송국 프로 듀서로 출발한 문시형님은 KBS기자, 방송관리국 지도계장, KBS TV 초대 편성과장, 청주방송국장, 방송문화 조사 연구실장, 방송협회 상임이사, 방우회 창립 상임 이사, 명지대학교수, 광보문화 연구원장, 방우회장등 수많은 방송관련 활동을 통해서 남긴족적은 깊고 넓게 새겨져 있습니다.
정확한 판단력, 적극적인 추진력 남다른 부지런함은 하는 일마다 빛을 발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 오시던때 새롭게 출발한 대북방송을 맡게된것을 시작으로 대형 공개방송 스무고개를 맡았고, 또 노래자랑 공개방송을 했지만 6.25전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51년 1. 4후퇴로 임시수도 부산에 머물면서 제작한 결전의 모습이나 마이크 인터뷰, 녹음탐방 등 구성 프로그램은 방송의 진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부산에서 방송을 하던 때의 여러 애피소드가 있지만 다른곳에서 얘기 하겠습니다.
전쟁중 부산의 비좁은 스튜디오에서 실시되던 스무고개는 서울 환도후에도 계속되었고 임시청사 정동방송국에서 방청객을 수용 할 수없어 동화백화점 (지금의 명동 신세계 백화점) 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노래자랑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문시형님이 소장했던 그때 촬영한 사진입니다. (끝부문에 초기 공게빙송에 관한 문시형님의 체험담이 있습니다.)
스무고개는 한 고개 한 고개 넘으면서 아슬 아슬하게 정답에 접근하는 스릴을 밎보게 하면서 사회자와 출연자가 하나되어 재채와 유머로 웃음을 선사하는 프로그램으로 서명석, 장기범님 등 그 시대의 최고 인기 아나운서가 기치를 발휘하던 이 프로그램은 담당 프로듀서 문시형님의 역작으로 많은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취재감각이 뛰어난 문시형님은 1950년대 후반 기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기민한 활동으로 특종 기사를 취재하고 또 때로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 방송사상 처음으로 형사범 체포 현장을 취재한 일이나 북한 공군 정낙현소위가 속초비행장에 내려 월남 귀순했을때 광계당국에서 조차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내용이 KBS를 통해서 보도되어 관계당국을 놀라게 했던 일등은 그 좋은 실례이기도 합니다.
국가 공무원으로 기자활동을 하던 문시형님은 사무관이 되어 방송관리국 지도계장이 되었고 얼마 안있어 KBS TV가 문을 열면서 초대 편성과장을 했습니다. 1963년 청주방송 국장으로 내려간 문시형님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공무원생활을 접고 그때부터 방송국 외곽에서 방송관련활동을 했습니다.
한운사님이나 최창봉님이 하시던 방송문화 연구실장을 맡아 각종 조사활동이나 방송자료도 모았으며 방송평가도 하셨고 , 방송협회 상임이사로 재직중 방송의 별 윤길구 선생님이 새상을 떠나심에 방송인 장을 추진해서 방우회를 결성한 실질적인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방우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나라 방송을 이끌어오던 방송인들의 총 집합체였습니다. 방우회 상임이사로 활동 하면서 사단법인 방송회관 설립을 추진해서 결실을 보아 이현 방우회장 방송회관의 이사장이 되어 많은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67년부터는 방우회 일과 함께 명지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방송문화 연구소를 설립 방송문화 연구활동을 펴나갔고, 1975년 부터는 스스로 한국 광보문화 연구원을 설립 여러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86년 부터는 방우회장직을 맡아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후세에 남을 수 있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방송 기념 사업으로 1987년 방송 60주년을 맞아 정동 옛 방송 터에 첫 방송 터 유허비를 세운 일이나 1991년 KBS서측 1층 옥상에 단파수신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물망비를 세운일은 문시형님이 방우회장 시절에 이룩하신 큰 업적이시기도 합니다.
문시형님이 각종 활동을 하면서 주도적으로 펴낸 출판물도 많고 또 스스로 쓴글도 많습니다. 텔레비전 20년, 눈으로 본 텔레비전 30년, 전국방송여론조사보고서, 광고방송에 따른 문제점, 65방송연감, 77CM라이브러리, 초기의 PD들, 전국 TV 가청 구역도,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사건 방송 토론회 보고서 월간방송지 등 수많은 간행물들이 있고 , 각종 잡지나 신문에 기고한 글들도 많이 있습니다,
방송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20 여명의 방송인사 업적을 기록한 방송인물사는 귀중한 자료로 받아 들여젔고 2001년 부터 실시된 한국 방송영상 산업진흥원의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을 선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본 불로그에도 문시형님이 쓰신 13분의 방송인물사가 실려있습니다. 또한 "칼라 TV시대에 흑백 TV로 버티다" 라는 작은 논문책자가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해서 뒷날 흑백 TV시청료 폐지의 기초이론이 되었습니다.
초기 공개방송 체험담 / 문시형
문자 그대로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서울의 한 복판 소공동에 자리 잡은 공회당을 뒤흔든 것은 1950년 5월초의 일이다. 방송사상 처음으로 KBS마이크가 대중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대중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할 스무고개 공개방송이 공회당 대 강당에서 막을 올린 것이다.
공회당은 방송과 인연이 매우 깊은 곳이다. KBS가 탄생되기도 전인 1925년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공개시험방송이 실시된 곳도 역시 이 공회당이어서 그 인연이 매우 두터운 곳이라 아니할 수 없다. 30평 남짓한 정동연주소 제1스튜디오 에서 불과 4-5십 명의 방청객을 모시고 공개방송을 하던 스무고개는 최고 인기를 독점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러기에 방청객은 쇄도하고 수용능력은 없고 5월의 늦은 봄이건만 너무 더워 어름기둥을 두세 개 세워놓는 야단을 부리기도 하였으나 더 이상 스튜디어에서 스무고개 공개방송을 실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럴 때 넒은 공회당으로 옮기고 경찰악대와 어린이 합창단의 동원도 동원이지만 기마대 까지도 동원하였으니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는 제언 할 필요가 없겠다.
불행히도 6.25사변으로 단 2회의 공개방송으로 끝을 맺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1953년 정부기 수복된 후 스무고개는 또다시 스튜디오를 떠나 동화백화점 (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 4층으로 진출하여 청취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때 탄생한 프로그램이 노래자랑으로 스무고개와 파트너를 이루었다.
당시는 KBS독주 시대였음으로 장소 사용료도 없이 심지어는 쇄도하는 방청객으로 인해 유리창이 깨져도 보상함이 없이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은 인기절정을 이룩했고 일선장병 위문과 산업전사 위문에 전후방을 동분서주 하며 정열을 쏟기도 했다. 이 스무고개 공개 방송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탄생시키면서 또한 방송과 청취자의 거리도 좁히는데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1962년 원로방송인 이계원, 윤길구, 문시형, 이상만, 조경희님등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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