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님은 1913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일본 오사카(大阪)중앙음악학원을 수료했습니다.
국내에 돌아와 1929년부터 아리랑가무단 음악부에
근무했고 1931년 18살의 젊은 나이로 OK레코드 전속
작곡가가 되었고 해방된뒤의 KBS 초대 전속 경음악단
악단장을 지내는 등 일생을 통해서 작곡 활동을
하면서 국민의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를
펴 냈고 수많은 가수를 길렀습니다.
민중과 더불어 산 가요 한평생 박시춘
우리나라 대중가요 효시는 아무래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83년에 들어서서 한국 가요 역사는 꼭 62년을 맞이하는 샘이다.
그중에서 작곡가 박시춘 대중가요 역사는 금년으로 52년을 장식한다.
박 씨의 작곡사와 우리나라 가요 역사가 10년 차이밖에 안 된다.
원로작곡가 박시춘이 지난 82년 10월 20일
정부에서 주는 국민훈장 보관장을 받았을 때 연예계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모든 가요계 종사자들은
자기네 일처럼이나 반가워했고 흐뭇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가요와 함께
한 평생을 살아온 박시춘 자신 또한 국민훈장 보관장이라는
정부의 따뜻한 배려에 대해 무엇보다도 보람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물론이다.
박시춘에게 주어지는 국민훈장 보관장은
가요계에서 유일한 수상자일 뿐만 아니라 가요 반세기를
통틀어 박 씨에게 가장 감회가 깊은 의미 있는 상이었기 때문이다.
박시춘은 이 상을 받으면서 “온 국민이 주는 훈장이기 때문에
늙은 고목에 무궁화 꽃이 피어난 기분” 이라며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했다.
가요생활 한 평생을 기리는 정부의 배려에 대해
자만보다는 감읍하는 박 씨의 자세가 박시춘의 인생을
바로 관조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박시춘의 이 훈장에 대한 감격은
곧이어 12월 30일에 시상된 KBS가요대상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이
주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늙은 고목”을 잊지 않고 알아주는
주변의 배려에 새로운 감회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시춘의 작곡생활 52년은 어쩌면 우리 가요계의
살아있는 역사라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박 씨가 작곡한
6천여 곡의 노래들은 흔히들 주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물론
이 표현대로 그의 노래는 모두 5천만 겨레의 가슴에 파고들어
시름을 달래주고 희망을 심어 주는 것들이었다.
박시춘의 가요생활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져 왔는데 일제 때는 애수의 소야곡(노래 남인수)
인생출발 (노래 남인수) 과 같은 노래가 6.25때는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임 계신 전선, 등이, 서울 수복 무렵에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인생은 나그네, 청춘고백,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물새우는 강 언덕, 등이
시대별로 구분될 수 있는 가요들이다.
박시춘은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의 울분을 담은
노래를 많이 작곡 하였고 그중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애수의 소야곡과 인생출발 등이다. 특히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옥중에서 설날을 맞이하고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며 한없이
울었다는 문예진흥원장 송지영씨의 회고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감회 깊은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장명등 무르익은 층층다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죄를 빌었소.
울면서 떠난 님 만날 길 없는
운명의 쇠사슬을 어이 합니까.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인생 출발은 평양 금천 대좌에서 공연 하면서 박 씨가
일제에게 크게 온이 날 곡 중의 하나 평양의“금천대좌”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남인수와 함께 일경에 붙들려 하룻밤을 새우며
곤욕을 당한 이 노래는 가사 중에서 운명의 쇠사슬이라는 문구 때문에
발단이 된 것이었다. 그만큼 일제는 도둑이 제발 저리듯 단순한 가사 하나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의 박시춘이 가요계 원로로서
국민의 사랑과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일제의 잔악한 압제 하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꿋꿋한
자세를 견지 해 온 때문이다.
또 민족의 수난기를 맞이해서 나라 잃은
백성에게 민족의 심금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달래주고
고무 해 주었다는 공로는 대중 예술계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년나이 71세, 그토록 즐겨하던 바다낚시도
83년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수난과 함께
생활 해 온 박시춘 특유의 동안, 헤어스타일, 해 맑은 미소, 유모어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도 변함이 없다. 선율로 달래주고 읊어주던
6천여 곡의 노래들, 52년의 가요생활을 통틀어 그와 비견되는
작곡가는 존재 하지도 않지만 그가 이 땅에 끼친 공로
또한 모두가 한결같이 큰 업적들이다.
사단법인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회장(56년)
사단법인 한국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61년) 예술문화 단체
총 연합회 부회장(65년) 한국 연예인 협회 이사장 ( 4, 5, 6, 7대 72년 )
사단법인 한국 음악 저작권 협회(현 종신 명예 회장) 등 등 박 씨의
족적은 바로 우리 가요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박씨는 1951년 육군 제 1훈련소 군예대장으로
종군하면서 여러 군가를 작곡 하였는데 남인수를 비롯해서
신 카나리아, 구봉서, 주선태, 김봉명, 김용태, 극작가 유호씨등 30여명과
위문공연을 벌렸다. 전쟁에 시달린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이 당시에 작곡된 승리의 용사 전우여 잘 자라 등의 노래는 아직도
우리의 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들이다.
박씨가 9.28수복 32년을 맞이하면서
6.25종군 연예인 표창을 받은 것은 그가 국민과
군에 끼친 공로를 말 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곡생활 52년을
맞이하는 박씨는 6천여 곡의 가요와 함께 수많은 가수를 배출 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가수가 바로 빼어난 미성의 주인공 남인수, 이난영, 이 밖에도
박 씨의 곡을 빛낸 가수로는 현인, 황금심, 최병호, 송달엽, 이화자, 박향림,
고운봉, 금사향, 박재홍, 박재란, 신세영, 이미자, 원방현, 한명숙,
장세정, 김정구, 황정자, 이인권, 백년설, 박경원, 백난아,
한복남, 백설희, 남진, 최숙자. 나훈아, 김부자, 최희준,
불루밸스등 이루 해아 릴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1973년 10월 17일부터 4일간
한국연예협회 주최로 대한극장에서 회갑기념 작곡 생활 42주년
박시춘 SHOW는 가요 반세기 역사와 함께 한 평생을 살아온 박시춘의
발자취를 일제히 경하하는 행사로 발전했다. 어쩌면 사랑과,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우리 가요계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OK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입사 하면서 시작된 작곡 생활과 괴를 같이 할 것이었다.
박시춘에게 주어진 국민훈장 보관장이나
KBS가요상 특별 공로상 못지않게 감회를 준 것은 회갑기념
작곡생활 42주년 박시춘 SHOW 이 당시 모든 연예인들은 가요계의
산 증인 박시춘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이 행사를 하나의 축전으로
몰고 갔고 사심 없이 협조하는 미덕을 보여 주었기에
그는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때 행사는 박 씨로 하여금 후배들에게 대한
영원한 감사를 남겨 주었고, 후배들은 그들대로 사심 없는
이 행사가 거룩한 축전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억을 되살려 주는 것은 정동 중앙방송국의 초대 악단 장을 맡으면서부터
건전 가요를 만들었다는 사실, 박 씨는 이때 고향초, 신라의 달밤등을
작곡 하면서 한국적인 가요의 토착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박시춘의 작곡정신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가릭이었고 그 가락은 우리의 노래가 되곤 하였다. 첫 작품인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서 6천여 곡의 노래는 하나의 우리 민족의
애환이고 전진하는 국민의 찬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가요계의 원로인 박시춘과 얼마 전에
작고한 일본의 고가 마사오를 견주어 보면 그에 대한 대접은
소홀한 점이 없지 않다. 박 씨와 경력이나 연령이 비슷한 고가 마사 오는
박시춘과 마찬가지로 훈장을 받았지만 생전에 연간 6억 여앤의 저작권 수입이
있었고 그의 재산이 4백억 앤이나 된다고 한다. 박시춘이 저작권료를 받은 것은
연간 약 2백만 원 정도, 이러한 액수는 박 씨를 제외하면 없을 것이라는
한국 저작권 협회 관계자의 귀띔,
박 씨가 얼마 전부터 작곡생활에 손을
때다시피 한 원인중 하나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작사 한편이면 시나리오 한편이 되었지.......”
요즈음 가요 작사가 처음부터 “사랑합니다…….” 로 시작 되는 것이
너무 의미가 없다는 박시춘은 하나의 시나리오도 가능했던
지난날의 수준 높은 가사를 되돌리지 못하는 풍토가
못내 아쉽다고 털어 놓는다.
즐겨 찾던 바다낚시도 건강 때문에 뜻대로
못 하지만 즐겨 술을 마시면서 52년의 가요생활 추억을
되살리는 원로 작곡가 박시춘-- “그래도 부위기가 조성되면
작곡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노익장의 바램은 저작권법의 올바른
시행을 힘 있게 주장 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 분위기…….” 라는 말은 바로 저작권법의 올바른 시행을
촉구하는 말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는것.
국민 문화 훈장 보관장을 받고 고목에 무
궁화 꽃이 피어난 듯 자랑스럽다는 박시춘은 이 훈장을
가보로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말해 준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
해 맑은 웃음을 짓는 박 씨 특유의 동안의 모습에서 71세의 나이답지 않은
풋풋한 인간성을 발견 할 수 있다. 온 국민이 주는 훈당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박시춘시는 그만큼 국민의 사랑을 고맙게 여기고 그 고마움을
후배의 보살핌으로 되돌리는 가요 반세기의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이 글은 1983년 월간 방송 2월호에 길주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가요무대 1345회 박시춘 명곡선
1956년 우리나라 최초 TV, HLKZ에 출연한 박시춘님(왼쪽에서 세번째)
이난영님 ( 왼쪽 )과 차례로 계수남, 박시춘, 고운봉. ( 사회 ) 황문평, 최대수님입니다.
가요무대에 나온 계수남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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