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님은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동양에서 최초로 농구를 중계방송한 아나운서
입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1943년 방송현업에
떠나셨지만 1960년대 방우회를 결성, 방송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고, 모든 방송 관련단체를 하나로 모아
사단법인 한국방송회관을 출범시키면서 방송에 관한 여러 일들을 하셨습니다. 농구협회의
전무로 체육발전에도 이바지했습니다.
농구 중계방송 개척자 이 현 아나운서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현님은
경성법전을 졸업하고1938년 15:1의 공개경쟁
시험을 거쳐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927년 경성방송국이 설립되고 스포츠 중계방송을
시작한 이래 10여년간 김영팔, 박충근, 이계원등 이름있던
아나운서들이 스포츠 중계방송을 실시했지만
농구 중계방송은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워낙 워낙 경기 진행이 빨라 어려운
중계방송에 응하기가 엄청 부담 스러웠습니다.
이때 1939년 7월 세계 1, 2위를 겨루는 카나다 농구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원정경기를 갖기로 되었습니다.
이 농구중계를 못하면 나라의 채면이 걸린 문제였는데 여기에 과감하게 도전한 아나운서가
들어온지 1년밖에 안된 이현님 이어서 모두 의외로 받아 드렸고
주위에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학창시절 농구선수였음을
내세우며 해 보겠다는 뜻을 궆히지 않았습니다.
이현님은 YMCA농구단의 선수였던
고모부 심연택님의 영향을 받아 전문학교 법학부에
들어 가면서 농구부를 만들어 여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고
농구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농구 중계방송을
해 보려는 의욕을 갖게 되었습니다.
상사들이나 동료들이 불안해 하는 가운데
중계방송은 이루어져 3일간에 걸쳐 훌륭한 중계방송이 진행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현님은
동양에서 최초로 농구 중계방송을 한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이때 경기는 서울운동장 정구장에다
임시로 특설 농구장을 만들어 야간경기로
진행되었습니다. 땅바닥에 마루를 깔아 깨끗하게
꾸며진 농구장이었습니다. 연희전문과의 첫 께임은
23:26, 보성전문과의 두번째 께임은 45:49로
두께임 모두 진 께임이었지만 마지막
각팀선발 고별전에서는 29:27로
이겼다고 합니다.
이현님의 농구중계방송 성공으로
우리나라 방송계는 이현 아나운서에 이르러
모든 스포츠를 중계방송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방송국이 되었습니다.
이현님은 기량을 발휘해서 우수한 아나운서로 성장했지만 1943년의
항일 단파방송 연락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게되고
어려움을 겪은끝에 아나운서를 그만 두셨습니다.
오랜기간 사업에 정진하시던 이현님이
1960년대들어 방송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갖게 되었고
1966년 명성을 날리던 윤길구 아나운서가 세상을 뜨심에
그 장례를 방송인장으로 하면서 방우회를 결성하고
방우회 회장직을 맡으셨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방송관련단체를
총괄하는 한국방송회관을 설립을 추진해서
1967년 2월 15KBS, 방우회. 한국방송윤리 위원회,
한국민간방송협회, 전국유선방송협회,한국 방송 극작가협회,
하국성우협회, 한국방송 연출가협회,민방클럽, 대한 스포츠 방송단,
한국 여류방송인 클럽등 모든 방송관련 단체 대표들이 모여
한국방송회관 창링총회를 열고 3월 18일 사단법인
한국방송회관을 출범시켰습니다.
방우회장이던 이현님은
방송회관의 이사장을 맡아 방송문화
연구소를 설립하는등 방송에 관한 여러 활동을
벌였습니다. 방송회관 운영관리는 물론, 방송의 날
행사를 주최하고 중앙과 지방의 정기적인
방송합평회를 가졌습니다.
월간방송, 방송연감, 방송교재등
방송관련 간행물을 발간하고방송 모니터 실시,
방송용어를 심의 하는등 방송발전에 기여하셨고
농구협회 전무를 지내시는 등 스포츠발전에도
힘을 기울이시다가 2001년 1월 16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현 선생님이 쓰신 단파방송
해 . 내외연락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하던때의
옥중 방송기 한편을 올려드립니다.
1943년 2월 중순경 나는 단파사건에
말려 들어 경성방송국의 다른 아나운서와
편성과원 기술과원등 수많은방송관계자 들과 함께
경성도경 유치장 감방 여섯방에 나뉘어
같이게 되었다.
특히 아나운서 들은 따로 따로 격리시켜 놓아서
한방에 담당 아나운서( ? ) 한사람씩 있게 배치 하였다.
하도 혼이 나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 한데 동일 감방에는
내가 있었고 동 2 감방에는 송진근 아나운서, 동 3 감방에는
김준호 아나운서 서 1방에는 양재현 아나운서,서 2 방에는
박용신 아나운서,서 3방에는 손정봉 아나운서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방송기계 기술자는 각 방에
5명 내외씩 있었다. 그런데 차례로 끌려 나가 고문받고 들어오기도
지긋 지긋 한데 유치장 간수들은 갇혀있는 아나운서들을
시켜서 매일 아침 궁성 요배 ( 遙拜 )의 구령을 부르라고
하는가 하면 밤에는 심심 파적 삼아 신문을 갖다 주고는
뉴스 방송식으로 크게 읽어보라기가 일수라 아무리
강제로 목이 매어서 끌려간 강아지 신세 이기로
그 속에서 아나운서 복습을 할 기분이
날리 만무 했다.
그 때 하도 어이없고 기막혀 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 하다. 그러더니 송진근
아나운서는간수들에게 졸리다 못해 하루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축구 실황 중계 방송까지도 강요
당해서 한 일이 있었다. 아마 유치장 속에서
까지 방송(?) 해본 아나운서는 우리들
밖에는 없을 것이다.
방우회이사 이장춘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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