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최고령, 최장수 노래자랑 사회자 송 해님!

이장춘 2009. 12. 14. 05:03

  
 

매주 일요일 낮 12시가 지나 KBS

노래자랑의 막이 오르면 한 손을 높이 들어

“전국 노래자랑!” 하고 외치면서 흥겨운 가운데

전국의 시청자와 하나 되는 장을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벌써 24년이나 되었고 그러는 사이

2009년으로 연세 83세가 되었습니다.

 
 
최고령, 최장수 노래자랑 사회자 송 해님!

 

 
 

 

 

오랜세월 다리오방송으로 이어오던

노래자랑이 TV방송돠 동시방송을 하다가

잠시 중단된 뒤 1980년 11월 11일 KBS-TV에서

그 맥을 이어온지  30년! 이 30년 기간중 26년은 송해님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천만명의 관중을모았던 이 노래자랑

시간이 돌아오면 모두 한식구가 됩니다. 시청자 뿐만

 아니라  KBS와도 한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노래자랑30년 방송 기념으로 KBS명예

사원증이 주어젔습니다.

 

 

 
 
젊은 아주머니도 학생도 오빠,
형님이라고는 해도 할아버지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북한을 포함한 전국을 누비면서 형님이고

오빠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껴안고 때로는 같이

노래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하나로모아 갑니다. 

50년 가까운 세월,      방송생활을 해 왔건만 지금도

지칠 줄 모르고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송해님의 원래 성함은 송복희님으로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50년  황해도  

해주예술학교 성악과를 나와 북한에서 도립악단에 취업

했다가 국립극단 단원이 되어 북한 전역을 돌며순회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6.25를 맞고 1. 4후퇴를 하게 되어 이때

 월남했습니다. 3년 8개월 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군 예대에 편성되어 전후방 위문공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사회도 보고 노래도 하고 악기도
 다루면서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갔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송 해님이 창공악극단에 들어가 주로
지방을 순회하면서 활약하던 중 1960년 KBS 라디오
샘터프로그램에 출연을 시작으로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963년 초 동아 방송에서 동료

박시명님과 코미디 한편씩을 하면서

동아 방송과 인연이 되어 교통프로인 ‘나는

모범운전사’를 오랫동안 진행했고  1967년

에는 국군방송 `위문열차` 사회를

맡기도 했습니다.
 
 

 
 
1970년부터 TBC라디오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가로수를 누비며” 를  담당했지만 그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22살이 된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기도
해서 그토록 교통사고 예방을 외치던 님이 마음상한 일도
 있았습니다.   위 사진은 TBC에서 가로수를 누비며
 진행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KBS에서 80년대
중반의 모습입니다.   
 
 

 
 
1976년에는 MBC 라디오 코미디쇼 DJ를
맡아서 그 부문에서도 역량을 발휘하셨습니다.
송해님은 방송국직원신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방송국의 코미디나 공개방송 사회를 맡았습니다.
 
 

 
 
 제가 송해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춘천방송국 프로듀서로 있을 때로  그때 만난

송해님은 갓 40세가 됐을 때, 체구도 적었고 머리도

스포츠 형 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몰라볼 정도로

체구도 커지고 머리도 기르시고 목소리도

 다정 다감 해 졌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KBS-TV에
출연했습니다. KBS-TV가 광고방송을 하던때는
일동제약의 ‘일동 스포츠’ 광일제약 제공의 ‘광일쇼’ 등
광고를 내는 회사의 이름을 프로그램에 붙여 방송을 할 때
광일 쇼에서 콩트를 하면서 TV화면에 선을 보인 것을
시작으로 TV에서도 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MBC TV의 ‘웃겨보세요’의 첫 공개방송때도
 출연하게 되고 TBC-TV에도 자주 등장해서 시청자들의
 친근한 벗이 되었습니다. 평생을 쉬지 않고 야외공개무대나
전파 영상매체에 출연해 왔습니다. 쉬려고 해도
쉴 수없는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1985년부터 무려 24년을 노래자랑과 함께
 해 온 님은 노래자랑과 일심동체가 되어 버렸고
수십 명의 담당 PD가 바뀌어도 님은 그 무대를 지키면서
 북한을 포함한 전국의 시청자를 친구로 하게 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과 풍속 습관이 녹아 있어 한국적 정서가
짙은 이 프로그램을 이토록 오랫동안 맡게
 된 것이 큰 자랑이라고 하십니다,
 

 


 
한 프로그램을 한 사람의 사회자가
그토록 오래도록 이끌어간 경우도 없고 또
연세 많은 현업방송인도 없어서 주위에서는
기네스북에 올리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님과 친분이 있었던 님은
그분의 삶을 보면서 좋은 본보기를 삼기도 하신

 답니다. 누구든지 좋아하고, 또 누구에게든 편안하게

대하다보니저절로 사람이 모이더라는 말씀과 함께 이것이

 부자 된 마음라면서 늘 바쁘셔도 마음은 편히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1999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을 비롯

 해서수상경력도 다양합니다.

 
 

 
 
요즈음 음악 앨범도 내
원로연예인모임인 상록회 회장일 을 맡아
기도 합니다. 건강한 가운데 오래 오래
즐거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은 송해님 글이 있어 옮깁니다.  시간 나시면 읽어 보셔요.

  

 

 

방송인 송해(85세)와 6.25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 짧은 인사가 마지막일 줄은…….

폭격·총격 뚫고 가까스로 피란 내려와 통신부대 입대… 내가  휴전 전보

첫 타전 나는 연백평야로 유명한 황해도 재령에서 3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끼 많고 노래 부르기 좋아했던 나를 부모님은 1949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보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합창단원으로 평양의 모란봉 극장 무대에 섰다.

 

솔직히 그때 난 이념이나 분단 등을 잘 몰랐다.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고, 동네는 아수라장이 됐다.

낮에는 쌕쌕이가 폭격을 퍼부었고,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이후에도

 밤에는 구월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꽹과리를 치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젊은 청년들은 이들을 피해 다녔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의 또래 30 여명이 함께 피란을 다녔다.

며칠씩 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한동안 반복됐다.

 

◆ 구사일생으로 혈혈단신 월남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12월 7일쯤이었나.

쌕쌕이가 기승을 부리던 날 우리는 또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대문에 서서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하고 외쳤다.

누이동생이 마루 끝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 서서"조심하라"고만

 하셨다. 예닐곱 번 그 짓(피란)을 했으니 어머니도 금방돌아올 거라 믿었을

게다. 짧은 당부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방송인 송해씨가 6·25 전쟁 발발 이후 파란만장했던

 인생 스토리를들려주고 있다.

 

 

송 씨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선 말을 잇지 못하고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거리엔 피란민들이 많았다. 피란민 무리에 중공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쌕쌕이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하얀 눈 위에시체들이

 가득했다. 벌써 이곳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은 경포(輕砲)를다리에 설치해놓고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에 맞거나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도 다리에서 떨어졌지만 철근 더미에 매달려 가까스로 살았다.보름 만에

해주 항에 도착했을 땐 우리 일행 30 여 명 중 6 ~ 7 명만 남아 있었다.

 

해주 항에는 작은 배 하나가 있었다. 우리를 포함한

피란민 30 여명이 서둘러 그배를 타고 연평도까지 갔고, 거기에서

연합군의 LST (상륙함)를 탈 수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 3,000 여명이

 그물을 타고 배에 올랐다. 피란민들이셔츠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통을 매단 후 바닷물을

 길어 올려 밥을 지었다.배 위에 올라서서 까만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내 이름 복혜를

바다 해 (海)로바꿨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학교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뒤 육군 통신부대에

배치됐다.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수신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모스부호를 쳤다. 들어온 암호 머리에 'ㅂ'자가 붙어 있으면'보통전보', 'ㄱ'자가

 붙어 있으면 '긴급 전보'란 뜻이었다. 새벽에 졸다가 '오보'를 내면 불려가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다.가족들이 면회 오는 동기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그들의 부모 형제가 가져다준 누룽지를 얻어먹으며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전쟁 종식 사실을 가장 먼저

타전한 것은 내 최고의 자랑거리다.

 

1953년 7 월 날아온 암호 머리에 'o'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보는 거라 뭐냐고 물었더니 '휴전 전보'라고 했다. 휴전 협정 사실을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이어 전언 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 종식을알릴 수 있었다

 3 년 8 개월 복무를 마치고 1955 년 제대하자마자'창공 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생에 대한 애착이 없어졌다. 피란 와서

 군 생활을 하고,유랑극단 생활을 하며 늘 앞날을 알 수 없는 떠돌이였다.

 

 살면서 지금까지3 년 이상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왜냐면 여기 이 생활은 임시 이니까,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기다리시는 고향 집으로 가서 살 것이니까,그래도 울퉁불퉁한

자갈길 인생을 비틀거리면서도 주욱 걸어왔다.

 

◆ 북한 땅을 밟다

 

환갑이 넘은 1988 년부터 '전국 노래 자랑'을 진행해온

나는1998년 11월 드디어 북한 땅을 밟게 됐다. 유람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

 금강산 장전항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는 것은 금방

허락되지 않았다. 50 여년 만에 고향 땅을밟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출발했는데,

조선일보 기자와 나는 입국이 거부됐다.그들은 내가 왜 남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북한 출신반역자라는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창밖으로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보며

혹시나잡혀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사흘 만에 금강산 관람이 허락됐다. 만물상 바위를

지나는데 안내원이 " 눈을 감고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생각하세요. 눈을 뜨면

그분이 보일 겁니다. " 라고 했다. 10 초간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어머니 얼굴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날 허겁지겁 헤어진 후 꿈에서조차 보지 못했던 어머니 얼굴이

거짓말처럼그곳에 있었다. 2003 년에는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북쪽에선 전성희, 이쪽에선 내가 공동 사회로 하기로 결정이 됐다.둘이

무대에 나가야 하는데 서로 얘기도 못하게 했다. 전성희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아바디(아버지), 나는 (고향이) 송화야요" 라고 속삭였다.

송화는 내 고향 재령에서 불과 30 리 떨어진 곳이다.

 

 

▲ 지난 2003년 8월 11일 평양 모란봉공원 야외 무대에서 열린 ‘특별기획

평양 노래자랑’에서 송해씨가 한 북한 출연자와 함께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북한에 두 번 다녀오면서 깨달았다. 우리 생에서

 편안한 남북시대는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간

그곳에서 절벽과 낭떠러지를 봤다.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게

제약이었다. 이 모든 비극이 6·25전쟁이남긴 것이다. 몇 년 전 세종 문화회관에서

 열 계획으로 '이것이 6·25다'라는극을 준비 했었는데 정부에서 못하게 했다.

 남북 해빙 무드인데 분위기를흐리는 일이라며 못하게 했다.

이제 내 나이 여든이 넘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부모님 생각이 더 절실하다.

생사 여부를 몰라 그동안 제사도 못 지냈는데 5년 전부터는 추석 때

부모님 제사를 지낸다. 대학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놈도 한쪽에 같이

 올린다. 통일되면 고향인 북한 재령에서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꿈이다.

그날이 죽기 전에 오기는 할까.요즘 가수 김양의 노래 '우지마라'를 들으면

가사가딱 내 얘기 같아 눈물이 핑 돈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 정해진 운명이야 팔자라 거니…."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다음 글은 옮긴 글 입니다.

 

 

방송인 송해(84세)선생과 6.25

 

 

나는 연백평야로 유명한 황해도 재령에서

 3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끼 많고

노래 부르기 좋아했던 나를부모님은 1949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보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합창단원으로 평양의 모란봉 극장 무대에 섰다..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고, 동네는 아수라장이 됐다.낮에는 쌕쌕이가 폭격을

퍼부었고,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이후에도 밤에는 구월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꽹과리를 치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젊은 청년들은 이들을

피해 다녔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의 또래 30 여명이

 함께 피란을 다녔다.며칠씩 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한동안 반복됐다.

 

 

◆ 구사일생으로 혈혈단신 월남

 

 

쌕쌕이가 기승을 부리던 날 우리는 또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대문에 서서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하고

외쳤다. 누이동생이 마루 끝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 서서
"조심하라"고만 하셨다. 예닐곱번 그 짓(피란)을 했으니 어머니도

금방돌아올 거라 믿었을 게다.짧은 당부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리엔 피란민들이 많았다. 피란민 무리에

중공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쌕쌕이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눈 위에 시체들이 가득했다.  
벌써 이곳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은 경포(輕砲)를다리에

설치해놓고 마구잡이로 쏘아댔다.수많은 사람들이 포에 맞거나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도 다리에서 떨어졌지만 철근 더미에

매달려 가까스로 살았다.보름 만에 해주항에 도착했을 땐  우리 일행

 30 여명 중 6 ~ 7 명만 남아 있었다.해주항에는 작은 배 하나가 있었다. 

우리를 포함한 피란민 30 여명이 서둘러 그 배를 타고 연평도까지 갔고,  

 거기에서 연합군의 LST (상륙함)를 탈 수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 3,000 여명이 그물을 타고 배에 올랐다.  피란민들이

셔츠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통을 매단 후 바닷물을

 길어올려 밥을 지었다.  배 위에 올라서서 까만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내 이름 송복희를

 바다 송해 (海)로 바꿨다.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통신학교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뒤 육군 통신부대에 배치됐다.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수신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부호를 쳤다. 가족들이 면회 오는 동기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그들의 부모 형제가 가져다준 누룽지를 얻어먹으며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전쟁 종식 사실을 가장 먼저 타전한 것은 내 최고의

자랑거리다.  1953년 7 월 날아온 암호 머리에 'o'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처음 보는 거라 뭐냐고 물었더니 '휴전 전보'라고 했다.

 
휴전 협정 사실을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이어 전언 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 종식을

 알릴 수 있었다.3 년 8 개월 복무를 마치고 1955 년 제대하자마자
'창공 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생에 대한 애착이 없어졌다.  피란 와서 군 생활을 하고,유랑극단 생활을 하며

늘 앞날을 알 수 없는 떠돌이였다. 살면서 지금까지 3 년 이상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왜냐면 여기 이 생활은 임시 이니까,지금이라도 할수만 있다면

 어머니 기다리시는 고향 집으로 가서 살 것이니까,

 

◆ 북한 땅을 밟다


환갑이 넘은 1988 년부터 '전국 노래 자랑'을

진행해온 나는1998년 11월 드디어 북한 땅을 밟게 됐다.
 유람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 금강산 장전항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는 것은 금방 허락되지 않았다.

 50 여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출발했는데,
조선일보 기자와 나는 입국이 거부됐다. 그들은 내가 왜 남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북한 출신 반역자라는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창밖으로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보며 혹시나

 잡혀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사흘 만에 금강산 관람이 허락됐다. 

 만물상 바위를 가는데 안내원이  "눈을 감고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생각하세요. 눈을 뜨면 그분이 보일 겁니다 "

 라고 했다.  10 초간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어머니

 얼굴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날 허겁지겁 헤어진후 꿈에서조차 보지못했던

어머니 얼굴이   거짓말처럼 그곳에있었다.  2003 년에는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 북쪽에선 전성희,

이쪽에선 내가 공동 사회로 하기로 결정이 됐다. 둘이 무대에 나가야

하는데 서로 얘기도 못하게 했다. 전성희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아바디(아버지), 나는 (고향이) 송화야요" 라고 속삭였다.
송화는 내 고향 재령에서 불과 30 리 떨어진 곳이다.

 

▲ 지난 2003년 8월 11일 평양 모란봉공원

야외 무대에서 열린 ‘특별기획 평양 노래자랑’에서

 송해씨가 한 북한 출연자와 함께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북한에 두 번 다녀오면서 깨달았다.  우리 생에서 편안한 남북시대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간 그곳에서 절벽과

낭떠러지를 봤다. 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모든게 제약이었다.   이 모든 비극이

 6·25전쟁이 남긴 것이다.  몇년 전 세종 문화회관에서

열 계획으로 '이것이 6·25다'라는 극을 준비했었는데 노무현정부에서

 못하게 했다.  남북 해빙 무드인데 분위기를 흐리는 일이라며 못하게 했다.  

이제 내 나이 여든이 넘었다.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부모님 생각이

 더 절실하다. 통일되면 고향인 북한 재령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꿈이다.

 

 

사회 송해님과 악단 지휘자 김인협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올 9월 26일 오랜세월 KBS 노래자랑 악단장을 맡았전 김인협님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무렵 오랜세월 김인협님과 노래자랑을 함께 해

오셨던송해님이 건강이 나빠지셨습니다. 올해 86세의(2012년)

송해님이 오랜세월 방송과 함께 하셨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평양 모란봉.mp3

평양 모란봉.mp3
2.58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