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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린 올릭픽 영화(동영상) 민족의 제전과 손기정선수 글

이장춘 2009. 12. 3. 02:13

 

 

 

배를린 올릭픽 영화(동영상) 민족의 제전과 손기정선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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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 얼린 배를린 올림픽은

히틀러의 나치독일이 올림픽을 통해서 국력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야욕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  

10만명을 수용할 수있는 대형 매인스타디움을 비롯해서

2만명을 수용할 수있는 수영장을 만드는등 심혈을

기울였고 새로은 매체 텔리비젼으로 세계

최초로 장내중계방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서 아리안인의 미와 힘을 담은

불후의 명작 다큐맨타리 <민족의 제전> 영화를 제작해서

세계 각국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해 8월 26일부터

상영된 것으로 전해진 이 영화는 스포츠 기록 영화로 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부문에서도  불후의 명작으로 손 꼽히는작품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여인의 도약 누드가 영화의 서막을 장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동영상은 리펜스탈 감독,

 민족의 제전  그때 그 작품중에서 손기정선수가

주요부문을 발췌. 편집한것으로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글은 손기정선수가 1940년 6월

 1일자 삼천리지에 올린 글을 옮겼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伯林 올림픽 映畵 『民族의 祭典』을 보고」

 

孫基禎,, 『삼천리』 제12권 제6호(1940년 06월 1일자) 

 

昭和 11년(1936년), 분에 넘는
故土 여러분의 성원을 받자와, 伯林에서 열린
제11회 오림픽 대회에 출정하여 영예의 월계관을
획득하였던 일은 나로서도 눈물겨웠던 감격이거니와,
이제 4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나는 그 때의 광경을
필림을 통하여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또한 한
새로운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마디 말씀드리고저 하는 것은

 만일 금년에 제12회 올림픽 대회가 열리게 된다면 나는

취직은 무론, 결혼까지 하지 않을 결심이였었으며, 재차

출정하여서 연승을 꿈꾸었던 것이 제2차 歐洲 大戰의

 발발로 도저히 제12회 올림픽 대회가 열릴 것

같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취직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내 불 붙던 야망은 그만 수포로

 돌아갔음은 섭섭하기 짝이 없는 일이나 나는 다시

앞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제11회 오림픽 영화는 제1부, 제2부로,

노니여 있는데 제1부는 『民族의 祭典』이고,

 제2부는 『美의 祭典』입니다.

 

이 올림피아 영화는 獨逸 정부에서

 레-니·리-펜슈타-루 여사를 제작 수반으로 하여

 올림피아 영화 협회를 결성하여 대회 기록의 영화

 채록에 전력을 다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獨逸 영화계가 총동원하였으며,

 촬영만도 제1선의 카메라맨이 44명이라 합니다.

특히 현대 獨逸의 카메라의 정수를 다한 것으로,  그 수록으로부더

 편집에까지 레-니·리-펜슈타-루 여사는 1개여 년이란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44명의 카메라맨은 총동원하여 모든

 입체적 각도에서<132> 촬영한 것이외다.

 

『民族의 祭典』(Fest der Volker)은

전 12권으로 올림피아·쿠-로스丘의 성화로부더

시작하여 육상 경기 전부와 마라손의 결승으로 막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촬영 중에는 기구에 의하여

 공중 촬영, 즉 俯瞰 촬영도 있습니다.

 

음악가 安炳昭씨가 귀국하기 전에 獨逸에서

 두 번이나 보았는데 그도 매우 좋더라고 말하며,

金源權형도 작년 歐洲 필랜드에 원정갔다가 보았는데

 매우 좋더라고 합디다. 그것은 무론 같은 동포의 勝戰 장면이

 있어서 감격했던 까닭도 있겠지요.

 

어쨌든 나로서도 감격을 不禁하는 바이며,

이 감격 속에는 여러분의 넘치는 『사랑』이 잠재하여서

 그 때나 이 때나 늘 나를 격려하여 주고 있음을

 잊을 길 없습니다.

 

지면 관계로 三千里社에서 부탁한 올림피아 영화

 『民族의 祭典』의 감상기와, 伯林 대회 원정 여행 회상기를

 다 함께 쓸 수가 없어서 금회는 伯林 대회 원정 여행기를 쓰기로 하고,

『民族의 祭典』 감상기는 차호로 밀리기로 합니다.

 

漢陽아 잘 있거라

滿洲里의 國境 風景

 

 

그것이 昭和 11년 6월 4일이었다.

 나는 그날 오후 3시 여러 선생과 사회 인사 다수의

성대한 전별을 받으면서 먼먼 伯林行의 길에 올났다.

京城 출발시 내 胸裏에 오르내리는 감회와 눈물겨운 감격 받은

 일이 한 두 가지 아니었으나 앞을 재촉하는 기술인지라

여기에 이로 기록할 수 없고 그저 「북으로 북으로

심장을 고동시키며 떠났노라」하고저 한다.

 

그날 밤 열 한시 가로수에 早夏의

금음달빛이 어리우는 것을 보면서 내 고향

新義州에 당도했다. 기차 관계상 나는 그냥 安東縣까지

가서 차에 내리니 거기서 정차장까지 전송으로 나온 가족과

 동무들을 맛나고 그 이듬날 아츰 奉天에 하차하여 시가와

北陵 등을 구경한 뒤 다시 哈爾賓으로 향하였다.

 

도중 新京(주:지금의 장춘입니다)에서

성대한 환영이 있었다. 이리하여 각지의 환영은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오직 우리들은 책임이 중한 것을

 통절히 느끼었다.

 

哈爾賓서 일박하고 연습을 조곰 하고 난 뒤

다시 滿洲里에 향하였다. 沿線에는 점점을 찍은 듯한

 조고만 산들이 보이고 사막도<133> 處處에

보이고 있었다.

 

기차가 滿洲里에 가까워 감에 따라

국경 기분이 차츰 농후하여 왔다. 기차에는

수비병이 동승하고 밤에는 카-덴을 모다 내리였다.

 滿洲里에 도착하기는 9일 아츰이었다. 여관에

 少憩한 뒤 우리들은 시외에 나가서

연습을 하었는데 그 때 감상은

더 말할 수 없었다.

 

겨우 數哩를 격하여 滿蘇 兩國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더욱 白系 露人들은 고국을 목전에 보면서

돌아가지 못하는 터이라 한다.

 

婦人 勞働者가 多數

鐵路 修繕하는 西伯利亞

 

9일밤 滿洲里에서 국경을 넘어서

 西伯利亞에 들어갔다. 露西亞의 기차는 滿洲里까지

 오기로 되었으나 국경 세관의 검사는

 실로 엄중하였다.

 

이로부터 5일간 西伯利亞 평원을 횡단하는

 단조스러운 여행이 계속되는데 망막한 평원이 한없이

 계속되고 있는 삼림은 오직 놀날 밖에 도리가 없었다.

處處에 있는 대도시의 외에는 沿線에는 그리 많이

 민가가 보이지 않으나 풀밭에는 도처에

 소, 말, 양떼들이 있었다.

 

철도는 朝鮮 것보다 몹시 廣軌로

규모도 컷스나 시간을 잘 지켜주지 않는 데는

 기마켰다. 어뜬 데서는 30분도 정차하는 까닭에

풀랬트 홈에 내려 연습할 수 있었다.

 

냉수를 먹을 수 없음으로 기차가 정차장에

 도착되기를 기다려 큰 병에다가 茶물 가질너

 가든 모양은 몹시 珍妙하었다.

 

이렇게 시간을 잘 지킬 수 없었음은 선로가

납바서 생각대로 속력을 낼 수 없었든 관계라고 한다.

또 西伯利亞 철도에는 객차는 적고 일반으로 화물차가 많었다.

「옴스크」를 지낸 것은 12일 오후 2시었다. 역시 가도가도

大西伯利亞의 無人之境 같은 광막한 평야 뿐으로

朝鮮의 京釜, 京義線 같이 산이라고

 볼라야 볼 수 없었다.

 

철도 沿線에는 다수한 노동자가 일하는

 것이 보였는데 그 중에도 부녀자가 철로 레-루

수선을 하고 있는 모양에는 오직 놀났다.

 

莫斯科 求景

그로부터 戰地 伯林으로

 

14일 밤 莫斯科에 도착 車室에서 일박하고

 翌朝 대사관을 찾어 안내를 청하여 시가 구경을 하였다.

모스코는 쏘비엣 露西亞의 수도이니만치 여러 가지의 근대적 설비가

 훌륭이 되어 있었다. 대건축과 도로의 완비에는 더욱 놀나게 하였다.

 구레무린 궁전, 각종의 사원 소문에 듣든 赤廣場 등

 모다 장대한 것이었다.

 

공원에 화초로써 이 나라 정치가의

 얼굴을 만들고 있는 것은 더욱 눈에 걸니였다.

오후 11시에 莫斯科를 출발하여 波蘭으로 향하였다.

蘇波 국경은 翌 16일 정오에 통과하였는데 역시 엄중한

검사를 하였다. 波蘭의 수도 「왈소」에 도착하기는 그날

오후 8시었다. 약 2시간 자동차를 타고 대강 구경을 끝마친 뒤

정작 戰地인 伯林으로 향하여 우리들은 긴장하여지는

 가슴을 안은 채로 떠났다.

 

大統領에 對한 崇拜熱

數萬 群衆이 如狂如醉

 

波蘭과 獨逸의 국경을 꿈속에 지내고

이듬날 날이 밝으니 17일 아츰 아홉시 끗끗내 伯林에 도착

 대사관의 안내로 곧 여관에 들어갔다. 코-스의 실지 답사,

시가 구경 등으로 수일을 지내고, 6월 21일에 아조

 올림픽村에 들어가기로 작정이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까 대회에 대한

 일말의 불안의 念이 더 커가며 조곰치도 안정이

되지 않어서 시가 구경도 잘 하여낼 수 없었다. 올림픽村은

실로 유쾌한 곳이었다. 연습장(400米)를 위시하여 키네마관

목욕장 등이 완비되어 있고 외국 선수와의 쾌활한

교제 등으로 모다 유쾌한 일뿐이었다.

 

더구나 숙사는 뒷날 兵營用으로서 이번에

신축한 것인 모양으로 매우 편리하였다. 이리하여

올림픽村의 유쾌한 생활에 습관 되어 나서 이제는 조곰씩

연습을 행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伯林으로부터

 올림픽村까지 뻐스로 40분이 걸린다.

 

거기에서 伯林까지 와서 당분 緣을 끊고

이 村에 드려 잠기어 다만 대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8월 1일 개회식, 9일 마라손, 16일 폐회식 등과 대회

푸로그람은 순조로 진행되었으나 대회에 대하여는

 이미 신문 영화 등에 의하여 상세히 보도되었을

것임으로 여기서는 略한다.

 

마라손이 다 끝난 뒤 겨우 重荷를 버서

버리고 난 듯한 기분이 나서<135> 백림 시가로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국가 통제의 下에 마치 한 개의

 기계가 움지기 듯 움지기고 있는 것은 아마 獨逸의

 일대 특색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설비도

 이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시가지 곳곳마다 너르고 대규모의 공원이

시설되어 있고 도로의 설비는 가장 규칙이 정확하여서

 모다 보행차, 말탄 이, 자동차, 마차, 전차가 모다 各異한

 길을 것고 있는 것은 실로 이상적이었다.

 

또 오후 7시가 되면 모든 상점이 모다 문을

다치고 휴업하는 것도 他處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獨逸의 특색으로 더 한 가지 헤려하는 것은 국민간에

히틀러 총통의 숭배열이 왕성한 것이다.

 

개인간의 인사에도 「하일 히틀러」를 부름은 물론,

스타지움에 히틀러가 한번 나타나면 실로 굉장하다. 장내를

덥고 있는 수만의 군중이 오른편 손을 높이 들어 큰 소리로

「하일, 히틀러!」를 부르는 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丁抹서 對抗 競技하다

飛行機를 타고, 구름 속을 날아

 

8월 19일 오전 10시 伯林 비행장으로 가서

 5, 6명의 동료 선수들 함께 丁抹로 향하였다. 하늘

공기 높이 구름 속을 지나서 미지의 나라로 가는 것은

실로 상쾌하였다. 약 2시간 공중을 나른 뒤 정오경

首府 코벤하-겐에 착륙하였다.

 

同地는 섬 한쪽 편에 쌓어진 항구로

모든 것이 째이어진 아름다운 도회었다.

丁抹이 모범 농업국이라 함은 이미 들어온 일이나

조합이나 농장, 학교 등을 실지로 보고 다시

그 조직적인 방법에 놀났다.

 

 8월 21일에 丁抹과의 대항, 경기가 있었고

 翌 22일 오전 11시 반 코-벤하-겐의 비행장을 출발하여

 우리는 巴里로 향하였다.

 

奢侈없는 「巴里」

다시 도-바 海峽 건너 倫敦에

 

코벤, 하-겐을 출발한 뒤 중도에 漢堡에서

 잠시 휴게하고, 동일 오후 5시 반 巴里에 도착하였다.

 巴里서도 대사관의 안내로 시가의<136> 중요한 곳을

 구경하였는데 놀나운 것은 전부터 드러오든

 거와 몹시 그 情趨가 달나진 것이다.

 

巴里는 그저 사치를 몹시 한 화려한

도시라고만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침착스러운 곳이었다. 전후 2차나 巴里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대개 일홈 있는 명소는 모다

구경하였는데 그 중에도 엡펠탑, 개선문의

 장대함에는 오직 놀났었다.

 

巴里서 23일 日佛 대항 경기를 끝내고,

翌朝 7시, 巴里를 출발, 一路 倫敦으로 향하였다.

佛蘭西의 카레港까지 기차로 5시간 도-바 해협은 기선으로

 두 시간이 걸리었다. 英吉利의 도-바港에 상륙하여 기차로

 약 한 시간 가면 倫敦에 도착된다. 우리들은 오후 3시

 倫敦에 하차하여  날 시가 구경을 끝 마추고

翌朝 9시에 倫敦을 출발하였다.

 

倫敦은 그야말로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인 만치 그 규모의 큰 것에는 오직 감격할

 밖에 없었다. 쥄스河, 倫敦塔, 국회 의사당, 웨드민스타 사원,

박물관 등 유력한 곳은 모다 대개 구경하였다.

 

倫敦의 특색은 歐羅巴의 다른 도시가

우측 통행을 하는데 朝鮮 모양으로 좌측 통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도시 계획도 우수하여 歐洲의

 대개의 도회가 모다 그러하지만 倫敦만은 그 중에도

 청결이 잘 되어 있었다. 예정과 같이 倫敦을 출발하여

 도-바카레과의 往路를 고처 그날 오후 5시에 다시

 우리들은 巴里로 귀착하였다.

 

그리운 옛 文明이여

大羅馬 時代의 歷歷한 자최

 

8월 27일 아츰 6시 巴里發의 기차로

 伊太利에 향하였다. 佛利 국경을 넘은 것은

그날 오후 6시 반경 이 부근 일대는 알푸스 산맥에

마키여 국경은 기차로 약 20분이 걸리는

 턴넬이 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8시경 토리노-에 도착, 즉시

호텔에 들어갔다. 9월 1일 아츰 10시 토리노-發

기차로 首府 「羅馬」로 향하였다. 동일 오후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하여 그 이듬날 대사관의 안내로 시가 구경을

시작하였다. 市中 도처에 엣날 大羅馬 시대의 웅대한 건축물이

보이며 또 천주교의 사원이 많은 것은 羅馬의

일대 특색을 짓고 있었다.

 

더욱 「유-롭」의 장대한 품은

羅馬의 문명이 어떻게나 찬란하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137> 9월 3일 아츰 열시 羅馬를 출발하여 오후에

나포리 항구에 도착하여 小憩하고 오후 3시

자동차로 폼페이에 향하였다.

 

폼페이는 부근 화산의 폭발에 의하여

 기원 1세기경에 매몰되었든 도시로 근래는 거지반

모다 발굴되어 舊態를 남기고 있어, 당시의 문화를 목전에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 쓰이고 있든 水道가 그대로

남기여 있는 것도 희한한 것이었다. 도시의 저쪽에는

아직도 화산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약 2시간의 폼페이 구경을 내끊고 자동차로

「나포리」에 돌아온 것은 오후 7시경이었다.

 

印度洋上의 六日

歐洲선 가을이 여기는 여름

 

나포리에서 하로 밤을 밝힌 뒤 9월 4일

오후 3시, 아조 나포리 출범의 伊太利 기선 곤데로-스號를

타고 귀국의 길에 올렀다. 그로부터 3일간의 地中海 航行을

끝 마추고 7일 夜 埃及의 뽀-드, 사이드에 寄港, 일박하고

翌朝 다시 출범, 스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8일

夜 스에즈港에 도착하였다.

 

스에즈 운하는 全長 161粁라 하는데

수심이 엿기 까닭에 십분 속력을 낼 수 없고

통과에 17시간을 요한다고 한다. 스에즈에 1박하고

 9일 朝 同港을 출범, 13일 夜 紅海의 입구 아덴에 寄港,

다시 6일간의 印度洋 航行을 마친 뒤 9월 17일 아츰,

印度 孟買港에 입항하였다. 중도의 여행은 사면이

모다 망망한 대양으로 실로 단조를 극하였든

 것이나 특히 記코저 하는 것은 아마 紅海 及

 印度洋의 더위일 줄 생각한다.

 

이런 더위는 나는 나서 처음의 경험이었다.

歐羅巴를 출발할 때에 이미 가을 같아였는데 여기서는

아조 盛夏 白畫에는 103도까지 올나 가고 있었다. 적은 선실에

 4개의 선풍기를 놓고도 땀이 작고 흘렀다. 갑판에 나와서

더운 열풍이 바다로 부러 오는 것이 무에라고

말 할 수 없이 괴로웠다.

 

砲臺 많은 香港 風景

印度 文化를 두루두루 본 뒤

 

孟買에선 기선의 고장 때문에 1주간

 체류하기로 되어 하로라도 속히<138> 고국에

돌아가려 하는 우리들에게는 여간 실망이 아니었으나

 그 대신 孟買의 구경은 거지반 완전히 끝내었다.

 

印度는 대체에 있어 朝鮮보다도 문화 정도가

 나즌 듯이 보였다. 거리거리에는 비교적 큰 건축도 있었으나

 상점 등은 대개 빠락式이었다. 도시 설비는 英國人의 경영이니

 만치 매우 진보된 듯 하였다. 여기서는 더위 때문에

극장 등은 오후 10시경부터 오전 2, 3시까지의

사이에 開演한다고 한다.

 

약 1주일 체재 후 기선의 고장도

 다 수선되었음으로, 9월 24일 아츰, 孟買를

출범하여, 중도 코롬보에 寄港하여 27일 오후 8시

싱가폴에 입항하였다. 거기에서 간단한 시가 구경과

 환영회에 임한 뒤 오후 12시 다시 新*坡를

출발하여 香港으로 향하였다.

 

香港에 도착된 것은 10월 1일 아츰 早朝,

 여기서도 환영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도처에 포대가 나열하여 있고, 또 많은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上海서 마즈막 一泊

서울에는 飛行機로 돌아오다

 

香港을 그날 오후 3시 출발 3일 오후 2시

上海에 상륙하여 하로 밤 자고 4일 오후 11시 카나다

 기선을 타고 6일 아츰 長崎에 상륙하였다. 거기에서

환영회에 갔다가 오후 5시 長崎發 7일

 夜 6시 神戶 입항.

 

8일 오전 9시, 아조 東京에 도착,

 解團式은 그날 있었다. 나는 16일 東京을 떠나

비행기로서 17일 오후 2시 그리운 京城으로 돌아왔다.

이것으로 나의 4개월에 및이는 여행을 대강 기록했는데

다른 기회 보아 좀 더 자세히 쓰고저 하노라.<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