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광재 아나운서,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 추억

이장춘 2009. 12. 4. 03:06

 

  

 

KBS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을 위해   임택근, 이광재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김성배님을 파견했습니다.
이 글은 이때 중계방송에 참여했던 이광재아나운서가 

 2000년 2월호  KBS저널에 기고한 1960년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  회상기입니다 前 KBS 아나운서실장

이광재아나운서는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광재 아나운서,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었다.  
1960년 올림픽 중계방송차 2천년 고도인
이탈리아의 로마에 도착했다. 비행장에서 시내 중심까지
거리에 널려 있는 것이 그 옛날 화려했던 고적뿐이다.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등록을 마치고 메인스타디움을 찾아갔다. 10만명 수용

규모의 운동장.그 운동장 중앙 제일 높은 곳에 40여개의 특별 방송실이

설치되어 있고, 각 나라 방송국의아나운서들이 개회식 중계를 앞두고

 제각기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와 임택근 아나운서는 Korea라고

표지가 붙어있는 방송실을 찾아갔다.여기가 바로 우리가 앞으로

 2주간 생으로 또는 녹음으로 경기 실황을  중계방송 

해야 하는 방송 센터다.

 
가지 고 간 태극마크를 문에다 붙여 놓았다.  
개회식을 시작으로 중계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Korea의 피켓을 앞세우고 대한의 아들딸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왼쪽 가슴에   태극표지를 부착하고  일사분란하게 시작했다. 우리의

믿음직스러운 대한건아, 수륙만리 몇 만 마일이던가? 낮과 밤이 바뀐

악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승리를 조국에바치리라 맹세하고 나온

우리의 선수들 , 중앙 본부석단상을 향해 ‘우로 봐 경례’, 10만

 관중들이  동방예의지국의 나라  한국선수들에게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열을 내어 중계 방송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전파를 인공위성에
 띄워 방송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전화를 이용해서
중계방송을하던때라  음성이 마치 파도를 타는 것 같이
커졌다작아졌다 하거나 어떤 때는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이어서 KBS 본부에서는 제발 빨리 말하지 말고, 천천히
또박또박하라고  주문하는 일이 빈번했다.금메달
하나만이라도 하면서출전했던 우리의 성적은
 기대 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서 그 당시 역도 경기의 
 중계방송 모습을 소개해 본다.
 
 
중계방송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관중석의 한곳을 잡아 방송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둘러보니 다른 외국의 아나운서들은 거의 한결

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이들은 중계를 하더라도

목소리가 크지 않은데 비해 우리는 나이가 20대인데다 음성도

 유난히 커 퍽 대조적이었다.  “지금 우리 한국의 아들

선수 바벨 앞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것 같이 조용합니다.
 
드디어 우리의 아들 허리를 굽혀 바벨을 잡은
오른손 왼손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어코
들것이냐  말것이냐 귀추가 주목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쭉 어깨 위까지 올렸습니다. 머리 위로 올리느냐,
쭈욱 쭈욱 기어코 성공했습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역도장의 이탈리아
관중들은 선수는 안보고 일제히 내 얼굴만 보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내 목소리가 워낙 크니까  역도

경기장의  진행부에서 사람 하나를 배치하며 목소리가
커지면 낮추라고 손을 밑으로 흔들어댔다. 그때 출전했던

김해남 선수는 메달 감이었다. 내가 소리 높여 “김해남선수

쭈욱 쭈욱 올리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치가 않습니다.”

하는데 나를 지키는 청년 이 어깨를 툭툭 친다.

 소리를 낮추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나는 메달을 따느냐 못 따느냐 하는 긴박한
순간에 다른 것이 보일 리 없었다. 목소리를 낮추라고
 어깨에 신호가 오는 순간 팔꿈치를 뒤로 제쳤다. 그러는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쿵소리가 났다.  그가 내 팔꿈치 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고 나가떨어진 것이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안했다.
김해남 선수가 드디어 2차시기에 도전했다.
 또 담당 청년이 목소리를 낮추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말을 더듬었다. 화가 난 나는 팔꿈치를
구부리고, 그러면 그 청년은 뒤로 3m가량  쏜살같이 도망쳤다.
웃지 못 할 촌극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우리 둘은 서로 미안하다면서

악수를 했지만 그 젊은 열기와 그 목소리는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다른 나라 아나운서들은 축구면 축구, 농구면 농구하는 식으로
하나 내지 두 종목만 중계하고는 이 경기장 저 경기장하며
시간을 내는데 비해 나는 수영·다이빙·승마·육상·
마라톤 등  매 경기장을 뛰어 다니며 중계

 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었다.

 
몇 개 종목을 중계 방송하느냐고
 묻기에 16가지를 한다고 하니 모두 놀란다.
“몇 살이기에 너의 나라를 대표해서 왔느냐”하기에
“28살”이라 했더니 18살로 밖에 안 보인다며 거짓말이라
 한다. 누가 소문을 냈는지 ‘16개 종목을 중계방송 하는
 18살의 Korea 아나운서’로 알려지기 시작 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하이 꼬레아노’라고
인사를 했다. 올림픽 경기 기간 중 어느 날 나는
 다이빙을 중계하러 수영장에 가서 진을 쳤다. “다음은
 우리 한국 선수의 출전입니다.새까만 수영복에 왼쪽 가슴엔
우리의 상징인태극표지를 달고 늠름하게 다이빙대를
높게 오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동안 닦은 기술과 필승의 정신으로
기어코 좋은 성적을 조국에 바치고 민족에 받쳐 주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드디어 호흡을 가다듬는 우리의 호프,
 심판의 점수를 많이 받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두 손을
 앞가슴 앞으로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위까지
치켜 올리면서 점핑!” 한 바퀴 돌면서 수면으로
들어갔다… 하는 순간  말이 꽉 막혔다.
 
다이빙은 머리부터 들어가야 하는데
몸체가 옆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정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소리 높여 중계 방송하던 나는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고 도망치다시피 수영장에 빠져 나왔다.
 
나중에 코치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제때에 물을 갈아주지 않아 누렇게 물이 썩은
 서울 운동장 다이빙장에서 연습하던 선수가 최신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펄쩍 뛰어 한 바퀴 도는데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물인지 구분이 안가 실수한 것이라고 한다.
  실수를 나라의 가난 탓으로  돌렸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의 얘기이다.
 

 

 

 

방우회 정항구 이사는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의
회선구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오셨습니다,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회선 구성은 한국에서 국제전신국을

 통해 일본 KDD(일본국제전신전화국)에 접속 KDD가 독일의

 전화국을 그리고 ITALY 로마를 연결 했습니다. 특히 한일간

에는 SSB(Single Side Band = 단측파대역)라는 

System을 사용 음색이 아주 나뻤습니다.(당시

 KBS남산 주조정실  현업 담당

 

 

 

호랑이 선생님 글

 

 

그때 그시절 생중계하던 시절이

이제는 추억으로 떠오르는군요. 임택근

 아나운서는 깔끔한 맑은 목소리였고, 이광재

 아나운서는 실감나는 스포츠 생중계방송을 멋지게

했지요. 두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방우회 춘하추방송

 

 

Olympic_Hymn.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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