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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중의 올림픽 출전과 중계방송

이장춘 2009. 11. 30. 00:56
 
 
 
6.25전쟁중의 올림픽 출전과 중계방송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포성이 멈추지 않고

수도마저 피난길에서 온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던

1952년 7월 19일!구라파 중에서도 저 북쪽 멀고 먼 나라

핀란드 헬싱키! 그 어렵던 잿더미에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대한민국 선수단이 제15회 올림픽이 열리는 이곳을

찾아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한사람이기는

했지만 방송단도 파견해서 현지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6.25전란 중이었지만 임원 20명과
남자선수 20명, 여자선수 1명등 44명의
선수단이 헬싱키 선수촌에 태극기를 올리고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
전쟁 뉴스를  통해서 익혀온  한국 선수들은
어느 선수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가는곳마다 사인공세가 이어졌고
기록보다도 참가의 의의를 통해 한국의
이메이지를 심은 대회였습니다. 경기에서도 복싱·
역도·사이클·승마·레슬링 종목에 참가, 복싱과
역도에서 1개씩의 동메달을 따내 실의에 찬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김성집선수는 지난 런던대회에 이어

이 대회에셔도 값진 동매달을 따 냈습니다.

피난지 부산의 근무처 해군 사관학교 공터에서

꾸준히 훈련을 싸아온 김성집선수는 382.5Kg을

들어올려 연속 동메달을 획득함으로서 2회에 걸친

메달리스트로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자였고

역도한국을 세계에 알리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전란중 군인의 신분으로 출전한

겅준호선수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적도 없지만

타고난 소질과 끈질긴 집념으로 강력한 우승후보 미국의

무어선수를 물리치고 동메달을 따냄으로서 지난대회

한수안선수의 동메달과 더불어 복싱한국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부산 피난시절 서명석 아나운서는

이 대회의 중계방송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983년 8월 방송월보에 서명석님이 남기신 글이 있어

 여기에 옮겨 그때의 일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52년 6월 중순까지 나는 용감하게도 (?)
금주를 단행했다. 술좌석에서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술은 끝까지 마시지 않았다. 그래 6월 초에
핀란드 올림픽 대회에 중게방송차 파견되는 것이 결정되고
수속절차를 밟느라고 매일같이 동부서주 했다.
 
출발하기 전날인 6월 20일 당시
공보부장관 이철원 박사가 경상남도 지사관저를
임시 경무대로 쓰고 있던 곳으로 데리고 갔다. 외화 사용결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받기 위함이다. 나는 경무대 경찰서장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3찬달라 가까운 외화사용승인은 당시 대통령이
 직접 재가 할 대이다.   오후 늦게 결재를 받아   한국은행에서
 외환을 바꾸고 방송국에온 시간이 6시경 노창성 국장이하
 간부들과 동료들이 환송회를 열어 주었다.
 
닭표 브랜디가 수십병, 오징어와
마른안주 여러 사람에게서 술잔이 한잔씩
들어오니 수개월 금주했던 나의 내장은 순식간에
 만취가 되어 버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 빈속이 어찌 되었겠는가? 나는 완전히 인사불성이 됐다.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방송국의 공용물인 시계가 없어지고
임시여권과 외환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채로
 다음날 10시에야 초량동 숙소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정말로 다행스럽게 여행서류와
 외환을 그 당시 어느 동료 직원이 잘 보관 하였다가
 되 돌려준 것이다. 이런 상태로 그날 오후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동경에 도착하고 UN군 사령부에서 대 이북방송을
담당하던 작가 김영수, 아나운서 위진록, 유덕훈, 세분의
 도움으로 겨우 며칠 만에 식사를 한 샘이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해서는
양식으로는 속이 편치를 않아 가지고 갔다 고추장과
 날 오이로 비위를 가라 앉혀야만 했다.  올림픽경기가 시작되기
전날 그곳 방송국장 최초로 각국 방송 팀을 위한 환영 리셉션이
있었다. 각국 방송 팀의 단장만을 부른 모양이다.
 
주최 측 인사와 합해서 약 80명 정도,
물론 나는 한국인 유니폼으로 정장을 하고 참석하였다.
그런데 립셉션 데스크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실레지만 당신이
 한국 방송 팀의 단장이십니까? 그런데요!”증명서를 가지고 계십니까?
ID카드 사진을 보고 내 얼굴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는 죄송하다고 하면서
나를 연회장으로 안내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방송 팀으로는 나 혼자만 갔으니 내가 단장이요, 총무요,
 아나운서요, 기술자일 수밖에 너무 젊은 사람이 한 나라의
 중계방송 팀의 단장 자격으로 참석했으니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사전 곡절을 파티 장에
 들어가서야 더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50전후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 가운데 26세의 한국의 젊은 청년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  소련,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태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각국 대표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환담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신문기자와 카메라맨이 내 옆에 다가왔다.
 

코리아에서 오셨나요?” “그렇습니다.”

“ 코리아에서는 중국어, 또는 일본어중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십니까?”

 

영어로 묻는 그자의 말투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사람도 아니고 소련 사람이 아닌 것도
 분명한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자에게 반문했다. “우선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당신은 어느 나라분인지 모르겠지만 귀국에서는 영어와
러시아어 중에서 어느 말을 사용하십니까? 했더니 천만에요. 우리는
서전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죠.” 하고 펄펄 뛰는 시늉이다.
“실례지만 한국의 세종대왕을 아시나요?” “모르는 데요”
“그 분이  500년 전에   한국 글을  제정하신
우리의 문화 창달의 대왕이셨지요.
 
한국에서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어느 사람도 발음 할 수 없는 한국 사람들의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오고 가고 옆에 있던 여러 나라 대표가
 한국문화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을 던져왔다.
 
다음날 신문에 한국의 고유한 문화라는
 기사가 실리고 나는 방송 팀 단장들의 리셉숀에서
얘기치 않았던 부산물의 얻은 샘이 됐다. 이 신문을
나는 방송국과 공보부 장관실에 보내고 귀국 후
대단히 칭찬을 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범아고 말았다.
입장식 실황을 중계방송 할 때는 너무도 피로하고
흥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연일 1인 2역 자연 삼역을
 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만 탓이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잠시 후에

약 60여명의 대한의 아들과 딸들이 참가한 제 15회

올림픽 대회의 개회식이 시작 되겠습니다.

 

여기는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입니다.

 
이 무슨 소린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이지
 헬싱키의 수도 핀란드가 무슨 소린가. 그것도 양념으로
두 번씩이나…….순간적으로 아차하고 이마를 쳤다.  물론
이마 치는 소리는 중계방송으로 안 나갔지만……. 이
얘기는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얘깃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강준호 선수가 권투에서 태극기를
올렸다던 지 김성집선수가 역도에서 태극기를 올린
 순간을 중계방송 할 때는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는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부터 특히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에
열중했다.    농구, 축구, 권투를 비롯한 각종 경기를 …….
그래서  스포츠 관계  인사나 그 당시 선수들을 거의 다
 알게 되었다. 지금은 60이 거의 가까운 노인들이지만
서로 만나면 그분들이 지난날에 활약하던
모습을 회상 해 보기도 한다.

서명석님은 1956년 HLKZ로
가셨다가 HLKZ가 문을 닫으면서
방송계에서 떠나셨습니다. 서명석님,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
 

 

런던대회 달리기 800m우승자 미국의

알빈 윗트필드는  한국전쟁의 폭격기 조종사로

참가해서 27회나 출격했지만 이 대회에서도 감격의

2연패를 달성 관심을 모았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