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과 송진근아나운서
아나운서 중에서 제일먼저
단파방송에 접하신분은 송진근님
이었습니다. 단파방송으로 얻어진 정보에
관심이 많았고 동료들이나 관련 인사에게
전하는데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송진근님은 1936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이계원 아나운서와 함께 쌍벽을
이루던 인기 아나우서였고 아나운서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할때 일본인 기술과장이
출근하지 않는 야간에는 아나운서와 엔지니어들
모두 우리방송인끼리 모여 단파라디오를 통해
해외방송을 듣고 얘기를 나눌 수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기술차석으로 야간 기술책임을 맡던
이남용, 미국에서 살다가 온 엔지니어 이이덕,
아나운서주임 송진근은 일찍부터 해외방송을 들어왔고
그런 얘기들이 우리 방송인들간에 알려져 다른 기술자들과
아나운서들도 차츰 그 단파방송을 들었고 야간에
우리 방송인들이 모이면 그 방송을 듣고
남모르는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1942년 개성에 방송소가 문을 열면서
개성이 고향이던 님은 같은 고향 동료였던
양제현님과 함께 평소에 잘 알던 개성방송소장
이이덕님을 비롯해서 성기석, 김동하가 근무하던
개성방송소를 찾아 근무자들을 위로도 하고
단파방송으로 들은 해외소식을
교환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은 송남헌.
홍익범님을 통해서 독립운동진영에
모두 전달되어 독립운동에 뜻있는분들에
의해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국에 퍼져 나갔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그 근원을 잦아 나셨고 1942년
12월 일본 경찰이 그 일을 벌렸습니다.
송진근님이 붙들려 간것은
1943년 2월 초였고 예심기간동안
갖은 고초를 겪다가 육군 형법 99조,
해군형법 100조 안졍질서 위반죄를 적용,
1년 징역형을 받고 예심기간을 포함 2년여를
유치장이나 감옥에서 고초를 겪다가
해방될 무렵 감옥을 나왔습니다.
징역형 언도를 받은 아나운서
세분중 한분이었던 님은그때 방송국을
떠나 다시 방송국에는 돌아
오시지 않았습니다.
송진근, 이계원아나운서에 관한 이혜구선생님 글
이혜구 선생님
이계원 아나운서의 능숙한 말씨와
송진근 아나운서의 깨끗한 말씨는 각기
팬을 끌었고 이계원 아나운서의 자질구레한
말과 송진근 아나운서의 맥맥한 말씨는
각각 반대의 구실을주었다.
또 좋고 싫은 것은 듣는 사람들의
식성에 달린 것이지만 하여간 아나운서가
시중의 화제에오른 것만은 전에 없던 사실이었고
현암 이계원은 연회석상에서기생한테서 소리가
아니라 뜻밖에 아나운서를 하라고 졸리어 매우
난처하였다는 것을 자랑 반 불평반
이야기 한 일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송진근 보존사료
방우회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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