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과 이남용님

이장춘 2009. 9. 20. 02:50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과 이남용님
 
 
이남용님이 방송국과 인연을 맺은것은
1929년 부터이고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있던 시절에는 경성방송국의 우리 방송기술인으로는
선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님의 선배로 한덕봉님이
계셨지만  1940년 함흥방송국 기술과장을 거쳐 단파방송으로
 시끄러워 졌을때는 평양방송국 기술과장으로  재직 중이어서
단파방송 연락운동이  일어날 무렵,  이남용님은 경성방송국
기술 차석으로 기술실무의 총괄적인 업무를 담당했고 
야간에는 방송기술의 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단파방송으로 들은 내용이 외부로
전달되는것은 잘 몰랐다 할지라도 내부의 일은
 종합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벌어졌을때
 이남용님도 채포대상이 되어서 경찰에서 연행해 갔지만
님이 빠지면  방송을 할 수 없었기에 심한
고초는 겪지 않했습니다.
 
님이 써 놓으신 기록을 보면
 
"나는 처음에 방송국 개조를 빙자로
요행히 투옥은 면했으나 이현씨를 비롯하여
고병한, 엄상선, 민병설, 이주호, 성기석씨등이 붙들려가
고생을 하였다. 그들은 상해 임정과의 관련을 생각한 모양이나
 사실은 우연히 전파가 잡혀 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내게도 꼬리를 잡으려고 연행을
해 갔으나 내가 없으면 스튜디오를 다섯개로
늘리고  각종 전기배선 2,000여가닥을 주물러야 하는
공사를 할 수없어 투옥만은 면하면서
 심문은 계속 받았다.
 
그래서 일부러 150장이나 되는 도면을
 후리 랜드로 그려 내가 없으면 남이 그 도면만
가지고는 공사를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국방부
자리인 일본 제 5공군 병기 수리창에서 항공기 내부의
특수 통신 기계를 수리 해 달라는 요청이 오고 연달아
 경성 헌병에서 전파 탐지 부속 기계가 고장 났다고
수리 의뢰를 나한테 해 왔다.
 
그런데도 고등계 형사들은 나를
놔 주지 않고 계속 신문을 하는통에 군, 경간에
 실갱이가 오갔다. 경찰에서는 "적국의 방송을 들은
 국사범이니 이런놈이 고치는 병기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신성한 천황폐하를 모독하는일"이다. 라고 주장하고  군도를
 뽑아 드는등 험악한 분위기를 빚어냈으나 결국 무마된 샘인지
 마지막으로 격검대로 두들겨 맞고 재판엔 회부되지
 않았다.  옥고를 치룬 염준모씨 등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이상은 이남용님이 기록한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 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남용님이  생전에 “단파사건의 진상”
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 전문을 여기에 옮깁니다.
 

 

 

 
우리 한국방송사에서 그 유명했던
개성방송소의 단파사건이 터진 것은 1942년
소위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갈 막바지
때였다. 일본군은 재빨리 헌병, 경찰을 동원해서 일반
시민들의 고급수상기를 압수하는 한편 무허가
라디오 수신도 단속을 강화 하였다.
 
뜻있는 우리나라 인사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고독감을 안겨
주었다.그러나 당시 한직장만이 외국 소식을
눈치껏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방송국이었다.
 
이당시 방송국에 근무하는 기술자들은
으레 방송이 끝나면 숙직이 있기 마련이었다.
조기 방송이나 불시방송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숙직을 한때는 예외 없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혼성조직이었다.
 
 한국인 기술자들은 숙직만 하게 되면
 밤중에 몰래 일어나 단파방송을 듣기위하여
성능이 제일 좋은 RCA 9구식 전파수신기인
 중계용 단파수신기의 불을 켰다.
 
물론 자기만이 듣는 감도가 제일 좋은
 헤드폰을 골라 쓴다. 이 단파방송을 그렇게
듣게 된 연유는 어느 날 일본의 나고야송신소의 단파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의
전파가 잡혀서였다. 알고 보니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클이 바로 나고야송신소
 바로 옆자리였다.
 
이윽고 한밤중에 우리나라 애국가가
울려나오고 자유의 종소리가 흐느끼듯 울려 퍼지면서
“ 고국에 계시는 동포여러분 ! 지금부터 미국에서 보내드리는
 자유의 소리 방송을 조국에 계시는 여러분에게.......” 하는
서투른 우리말 발음으로 방송이 시작되고 곧이어
 그 유명한 이숭만 박사의 “ 이천만 동포에게
 고한다. "라는 방송이 들여왔다.
 
참으로 간절했던 새로운 소식이었다.
30분이란 시간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흥분이 가라않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래저래 시간을 보내노라면
새벽 방송시간이 다가왔다.충혈된  벌건
눈으로 방송준비를 했다.
 
이때 일본인이 잠깨어 일어나면
내가 조정할 테니  더 잠자라고 선심을 써서
 대신 하기도 했다.  때로는 간밤의 주파수를  
돌려놓지 않아 NHK이른 아침 방송을 수신 하는 척
하면서  돌려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엄청난 모험을
 하면서도이 해외 단파방송 수신은 한국인
기술자 대부분이 숙직하는 날의
 일과처럼 되었다.
 
처음에는 조정실의 기술자들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민병설(납북)이라는 기술자가 당시의
아나운서인 양재현, 이계원, 민재호 제씨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 직원들은 그 방송을 가슴을  두근거리며
들었고  그 말은 은근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아나운서들이 프로그램 편성을
유선으로 알려주면서 단파수신기의 다이얼을
KGE 1 ( 미국의 소리 콜싸인 ) 으로 로 돌리면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들을 수 있다고 모두에게 알려준 것이다.
 
일본인들도 호기심이 나서 그랬는지
가끔 조정실에 올라와서 듣고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방송이 끝나면 일본에서 하는 “ 70-74 ” 라는 오페라
중계 프로그램을 미국에서 묘하게 변조해서 일종의
까싶 프로그램  식으로 방송하여 일본인들도
 재미있게 듣곤 했었다. 그러니까 일본말로
들려오면 일본인들이 듣고 우리말로
들려오면 우리들이 듣곤 했었다.
 
이 사건이 일경에게 발견된 계기는
양제현이라는 아나운서가 스포츠 중계를 마치고
요리정인 국일관에서 환담을 나누던중 그 이야기가 나와
옆방에서 숨어서 옅 듣던 일본인 고등계 형사에게
눈차채게 되어 사건이 터졌디.
 
개성 송신소 소장 이이덕씨는 너무 고문을
심하게 받아  폐결핵으로 해방되던 해에 죽었고
그 부인도 남편이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놀라 그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이때 정동 방송국 한국인 기술직원 13명중
10명이 잡혀 들어가고 나와 다른 동료 두 명은 전쟁수행
 방송 기술요원이라고 해서 6개월간은 모면되고
전국적으로 아나운서 편성부원까지 합쳐
약 150명가량이 잡혀 들어갔다.
 
결국 6개월의 긴 재판으로 일부는
풀려 나오고 징역 간 성기석씨는 징역 중에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2년 경성방송국 주주정실에서
그때 근무하던 기술진이 같이 한 사진입니다.
그때 경성방송국의 우리 기술진은 모두 13분이었습니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분이 이남용님이고 뒷줄 오른쪽분이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주역 이이덕 님입니다.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습니다.
 
위의 사진을 찍을 때는 한덕봉님은
평양방송국 기술과장으로 계셔서 경성방송국에서는
이남용님이 우리 기술인 선두에 계셨고 야간에는 기술
책임자였습니다.   이남용님도 단파사건에 연루 되셨지만
이때   경성방송국  엔지니어   13명중  10명이   이 일로  
끌려갔고 또 이남용님이    없는 방송은 생각  할 수조차  
없는 상황하에서   관계당국의  갈등을  겪으면서
재판은  면하셨습니다.
 
이남용님은 해방후 조정과장을 하시다가
 국립 경찰 찰설에기여하셨고 경무관을 거쳐
시민회관 관장재직중 화재로 순직
하셨습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