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애국지사 조종국님과 딸 조문자 아나운서

이장춘 2009. 9. 20. 20:05



 

 



단파수신기 제작능력의 보유자!

단파수신기를 스스로 만들고    또 그

제조방법을 가르쳐주어 해외 정세를 파악하고

전파해서 독립운동에     기여 하셨던 조종국님!

미결수기간 8개월간의 고통 끝에 1년형을 언도받아

1년 8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한 님은  1990년 항일

단파방송연락운동으로 성기석님, 홍익범님과

함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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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훈장을 받으신 세분가운데

두 분은 이미 세상을 뜨셔서 훈장이

추서 되었고 조종국님은 훈장을 가슴에

직접 달았습니다.  2005년 3.1절에 훈장을

받으신 박용신님을 포함해서 항일 단파방송

연락 운동으로 지금까지 훈장을 받으신 모두

네 분입니다.     (그 뒤 몇분이 포상을

받으셔서 지금은 9분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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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세분은 방송국에

계셨던 분이고 한분은 동아일보 기자로

계시다가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 되면서

독립운동을 돕는 일에 열중 하던 중 방송국

직원들과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셨던 홍익범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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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애국지사 조종국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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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국님은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던 그해에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39년 배제 보통 고등학교를

나와 경성방송국 사업부 공사과에 들어오셨습니다.

라디오 보급도 하고,   청취로도 받고, 라디오를

설치해주고   고쳐주는 일을    담당하던

부서가 사업부였습니다.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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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국님은 인문학교를 나왔지만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어서 이런 부서가

적성이 맞아 들어오셨는데   얼마 안 있다가

외국선교사를 추방하고 국내에서 단파라디오

수신을 금지하고 이미 가지고 있던   단파

라디오 수신기는 몰수해서 외부세계와

차단 시켜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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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이미 가지고 있던

단파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면 죄가 되고

버리자니 비싼 라디오를 버릴 수는 없어서

단파수신기능을 몰래 제거하고 중파만 

듣는 라디오로 개조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조종국님이

 이런 일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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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파수신기능을 제거하는 기술을

갖는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 기능을

넣어서  제작 할 수 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몰래 단파라디오를 만들어 외국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사업부 안에    친한 친구가 그것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만들어도 주고    다른 사람이

만들겠다고 하면   지도도 해주고 이러다 보니 사업부

안에 있던 직원들은 단파라디오를 듣고 또 암암리에

이웃 아는 사람에게도 전하고 바다 밖 소식은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잘 몰랐지만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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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 본영의 엉터리 발표가

잘 먹혀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경찰의

시선은 사업부에도 집중되었습니다. 아나운서들이

잡혀 들어가고 그리고 2-3일 후부터 기술자들이 잡혀

들어가고, 또 한 두 달 후에는 사업부 직원들도

끌려갔으며 지방방송국이나 부속품상회까지

온통 수사망이 확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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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도 잡혀 들어가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1943년 한 해가 온통

이 사건으로 들끓고    이런 속에서 방송인들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경성방송국

엔지니어 열 세 사람 중에 열사람 또 아나운서

 대부분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감옥 속에

 있었으니   방송국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독립 애국지사들의 독립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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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런 속에서 1943년 2월 22일

그 눈 많이 오던 추운 날 25살의 젊은

조종국님은 볼 상 사나운 모습으로 끌려가

미결수기간 8개월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만을 유지한 체   그해 9월 1년 징역형

언도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셨습니다.

미결수기간까지 1년 8개월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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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기 전 만기 출소해서

방송인들과 만나기도 하고 방송인들의

행사에도 자주 나오셨지만 방송국에 다시

근무 한일은 없었고 세월이 흘러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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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을 받으시던 날 1990년 8월 15일

조종국 열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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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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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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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기간

1919. 9.2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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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경기 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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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애족장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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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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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43년 2월 경성방송협회(京城放送協會)

사업부 재직중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양상과  해외정보를    국내 정치지도자들에게

알려주겠다는   결심으로   비밀리에  단파(短波)

송수신기를   제작하여   중국 중경  (重慶)   소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선전방송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歐美委員部) 방송의

'자유의 소리    (V·O·A)'를   청취하고

그 내용을 국내 정치   지도자들에게

제공하는 등 활동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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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3년 9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무선통신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註·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短波放送海外連結事件(1988. 9月刊, 放友會)

1·35面 ·新東亞(1988. 3月號) 595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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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supportEmptyParas]--> <!--[endif]-->  왼쪽부터 조종국, 송남헌, 서기원 KBS사장님등이 함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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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세한 내용은 유병은 선생님의

저서 단파방송 연락운동 -일제하 경성방송국-

글을 올린다.       1943년 엔지니어로 방송국에

들어오셔서 평생을  단파방송 사건 기록을 모으고

정리해서 이를 집대성한 분으로 아래 글은 기록과

조종국 열사 얘기를 직접 듣고 쓴 글입니다.











조종국 열사 딸 조문자 아나운서






조문자 아나운서는 RSB 라디오서울

1기 아나운서이고 오늘날은 서예활동을

하고 있다. RSB 라디오서울 1964년 개국을

앞두고 그해 4월 1일 조문자님을 비롯해서 구박,

김동만, 서기원, 남정우, 박병학, 권귀순, 최귀정,

김경실, 박혜자, 아나운서를 고개모집했다. 이분

들이    라디오 서울 1기생으로 불린다.  위

사진은 1기를 모집하기 전     특채된

아나운서들과 함께 촬영했다.



 

 

위 사진은 청와대를 방문한  아나운서들이

 육영수 여사와 기념 촬영한 사진으로 뒷줄 왼쪽부터

이장우, 박노설, 황인용, 박병학, 박종세, 조문자, 이성화,

장세덕, 윤미자, 남정우, 길종휘, 앞줄 육영수 여사  좌 우로 

김동건, 성대석 아나운서이고   아래사진은 TBC  여자

 아나운서들이 여류방송인들과 청와대를 방문하고

육영수여사와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이성화, 최귀정, 장세덕, 주수광, 조문자, 조봉남, 유욱자아나운서

 




조문자 아나운서는 선배

이성화 아나운서의 알선으로

이장춘과 알게되었고, 2019년 5월

24일 관악방송에서 아버지 조종국 열사님

방송을 함께 녹음해서 6월 17일 방송 할

예정이다. 그때 만남의 현장에서의

사진이고 또 서예작품도

함께 올렸다









이계진아나운서님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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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춘 대표님....!

잘 봤습니다. 귀한 사료와 함께

끈기와 열정으로 지속적으로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춘하추동방송은 기존의

방송들이 하지 못하는 구석까지 챙기셔서

이제는   방송역사의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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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화 최초 상업민영라디오 아나운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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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국장님의

상세한   육성 설명은     글로 보며

이해하던 심정과 다르게   애국 열사 분

들께 진정으로 깊은 위로와 감사의 심정을

갖게 됨을 느꼈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국장님의       귀한 목소리도 방송 역사에

보존 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녹음한 날의    보람을 갖겠습니다.

감사드리면서     건강을 오래

지켜 가시기 기원합니다.




경성방송국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 실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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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머리 동영상의

내용을 글로 써 이성화 아나운서

블로그 「푸른하늘」에 올린

글을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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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아름다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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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오늘 스튜디오에 모신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국장님, 관악공동체라디오 안병천 대표님

은 세 번째 오시게됐는데요, 오늘은 단파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이장춘 국장님 블로그에서 보고 여기서 한번 이장춘 국장님의 

 음성으로 들어보고싶었습니다. 그 내용중에 조종국선생님의

따님 조문자 아나운서가 생각나서 마주 앉으셔서 

  대화의 시간을 갖고싶었습니다. 어서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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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관악라디오 안병천 대표. 그 옆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대표.

이장춘 ; 제가 그 내용을 많이 거듭 하다보니까 이제는 제 머릿속에

  다 있습니다. 하 하 이; 그 따님이 지금 여기 오셨어요.

조문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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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 아나운서 서예작가 조문자 여사.

이 ; 안병천 대표님, 지금 이 관악방송은 FM 과

 스마트 폰으로 듣는거로 알고있는데요. 일반적으로

 방송 청취에서 단파 방송은 우리가 모르는데요.


안병천 ; ​단파를 한마디로 말하면

전파 기술적인 얘기라서 . . . 그냥 단순히 FM보다

 짧은 . . AM보다 짧은 전파로. . 할 수있고 스마트 폰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는데요.


이 ; 우리는 그냥 무심히 청취만 하고있다가 . .


이장춘 ; 옛날에는 다 방송을 무심히 들었죠. 

  이 단파는 짧은 주파로 멀리 갑니다. 여기서 외국으로

가기도 하고, 외국에서 여기로 오기도 하고요. 그 기술을

 옛날에 가지신 분이 조종국 선생님이셨는데 이 단파라는 것이 산을 넘고

물은 건너 멀리 멀리 대기층과 작용을 하면서 중파나 FM 주파가 갈 수 없는

지구상의 거리를 오고가는것이지요. 일제 시대 독립운동사에 아주 큰 역할이지요.

   상해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던가.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것을 단파로 전할 때 

  목숨을 걸고 하는거예요., 그거 아주 대단한것입니다.


이 분들이 단파방송을 안들었으면 소식을 모르는거죠. 

  일본경찰이 알고싶으면 끌어다가 고문하고 . 상상해보면  옆방에서

고문받는 비명이 들려오고하는 자기 차례가오면 얼 마나 또 고통을 당하겠습니까. 

 조종국선생님은 건국훈장을 다른 세분과 함게 받으셨어요.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죠.


조종국 선생님

조문자 ; 아버님이 감옥에 계실대 어머니가

옥바라지하실 때  제 아래 어린 남동생을 놓지셨답니다.

1990년 8월15일 광복절 독립유공자 서훈 전수식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기념 사진.따님 조문자 아나운서


이장춘 ; ​좀 얘기하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니까 이상하다 해서 방송국을 갑자기

에우 ㅓ싸고 350명을 잡아가고 얼마나 악랄하게 고문했겠어요.

한가지 내용 나오면 또 족치고. 조문자 ; ​단파에 대해서 들었지만

오늘 더 알게돼서 감사하구요. 아버지가 그당시 일본에서 하는 말이

 거짓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단파방송을 통해서 올바로 알게 하신

 일이라는데 아버지가 단파방송 기계의 원조라는 사실을 저는

어렸기 때문에 몰랐구요. 370명 이상이 잡혀가고 8명이

옥사 당한 일을 크면서 알게됐어요.


그 사건이 비밀로 감춰졌기 때문에 민족지인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도 오랜 후에나 알게된 사실을

알게되면서 저희 5남매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요.

 물론 아버님은 고생이 크셨지만요.


이 ; 이런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런 대담 시간도 갖게됍니다.


이장춘 ; ​그때의 세상을 알아야하는데요.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유로웠는데 사람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경성방송국을 통해서 선전만 하는데 일본이 

 절대 지지않을것같이 알려주는데 단파방송을 몰래 들으면 그게 아니니까

 그 정황 시실을 몰래 몰래 전해진 것을 일본 경찰이 수상하게

생각하게됀것이지요. 도데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는것일까 하구요.


그리고 잡혀가면 얼마나 고초가 심한지 . .

최남선 선생님도 얼마나 고초가 심했으면 마지막에 전향을 했겠습니까.


이 ; 그런 전문 기술이 필요한 단파 방송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도움을 주다가 고초를 겪으신분 들중에서

지금 따님 조문자 아나운서와 함께 대화 하십니다.


조문자 ; ​제가 아나운서 되기 전에 이성화 선배언니의

 공개방송을 들으면서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만나고있는데요. 얼마전에 그런 아버지 내용을 듣고 놀랜거예요.

이 ; 그래서 이렇게 관악방송을 통해서 그런 옛 사실도

 알게되면서 대화 하니까 좋은것이죠.


안병천 ; ​그런데 단파방송을...그런거 다해봤는데

 듣고보니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의 소중한 내용을 알게돼네요.

조문자; ​저도 들으면서 알게되니까 아버지에 대해서 자부심이

 더 생기네요.아버지께사 고생이 많았사실만 알았지 이렇게

 상세히 알게되니까 자부심이 생기네요.


이 ; 그래서 후세가 알 수있도록 기록이 중요합니다.

이장춘 ; 당시 소문으로만 들을때 그러니까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했잔슴니까.그런 것을 몰래 단파로 들어서 몰래 몰래

소문이 퍼져나가고 그런것이죠. 당시는 상상을 못해요. 목숨을 걸고

 한 일이예요. 경찰들이 수색을 하는데 . .


이 ; 그 시절 정황이 연상됍니다. 노래 하나 들으세요.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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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자님의 희망곡- 최백호 - 아름다운 시간

이 ; 이장춘 춘하추동방송국장님의 블로그에

정리돼 있는 방대한 사료가 보배입니다.


이장춘 ;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니 얼마나

조마조마한 일입니까? 미국에서 들었다 하지 . ..

중국에서 들리지 . . 그런데 이런 방송을 방송인들만 듣고

말았더라면 독립운동의 연결이 어려웠을 수있데 몰래몰래

 퍼뜨리니까 일본 형사들이 방송국을 에워싸고 단파방송을

하신분들이 잡혀가서 얼만 고초를 당했으면 그중 8분이 옥사하고.


안병천 ; 저도 라디오를 하는데 아까도

느낌을 말씀드렸지만 기술이라는 것은 다 몰라요. 이렇게

기술과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술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구나

하는 인식이 새삼드네요. 사실 방송 일을 하고있으니까 경성방국

 얘기가 있어도 그간에는 흥미가 없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알게되니까 정말 기록이 앞으로 역사가돼고 소중하구나

하고 앞으로 여기의 역사도 사실을 보존하는

일에도 다시 생각하게되네요.


조문자 ; ​저는 아버지가 단말기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뒷받침 했다는데 주변에 몰래

보급한 일을 잘몰랐는데 이런 방송을 통해서더 알게돼구요.

국민이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알아야하는데 저도

국민의 한사람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장춘 ; 그래서 나라에서 조종국선생게

 건국훈장을 드렸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아버지가 25살 때 눈이 많이 내리는날 인데 단말기를 만들어

보급하면서 독립은동 하시는 분들게 연락하고 그러셨대요.


이 ; 이런 얘기도 나올 수있게 방송 사료에 많은 역사를

축적해 오셔서 이장춘 춘하푸동방송국장님도 다른 이름의 훈장을

받으셧어요. 젊은 안병천 관악공동체라디오 대표님도 먼 앞날에

훈장 수준에 올라가는 방송으로 진전 있기를바라게되네요.


조문자 ; ​저도 이런 자리에서 이장춘 국장님의

말씀 들으면서 더 알게되는데 지난날 집에서 보면 아버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잘 안하시려고한것같아요. 너무 괴로운 기억이라서

그러신것같고 어머님은 그당시 제 바로아래 남동생을 떠나보내셨어요.

그당시 아버님 옥고치르실 때 애기를 돌보지못하서 잃어버리셨대요.


이 ; 부모님은 당신의 괴로운 말씀을 자식에게

 잘 안하고싶으신거죠. 우리는 역사를 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인정하게되는 시간을 가졌네요.


오늘 이장춘 춘하추동방송국장님,

안병천 관악공동체라디오 대표님, 아나운서면서

 서예작가 조종국 독립투사의 따님 조문님 오셔서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장춘 국장님의 희망곡하나 듣겠습니다.

독립운동과 관련됀 봉선화를 김천애 노래로 듣지요.

오늘의 끝노래 홀로 아리랑-부활

지금까지 기획, 진행 이성화 . 기술 ,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이 방송은 방송통신위원회와 시청자미디어재단으

 후원으로 제작됐습니다.[출처] 2019년6월17일.조문자 서예작가님,이장춘

춘하추동방송국장님.안병천 관악공동체라디오대표님

 출연|작성자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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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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