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애국지사 박용신
1942년 12월 8일!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벌리단 경성방송국 박용신 아나운서는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제일먼저 끌려가
제일 오랜 기간 예심을 받으며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감옥은 호텔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심기간은 그렇게 가혹했습니다.
1년가까운 세월을 그렇게 지냈습니디.
그리고 1943년 7월에야 기소되어 11월에
1심 형량 언도가 있었습니다.
1년 6개월의 형 언도가 있어 항고를
했고 상고심에서 형기는 6개월로 단축되었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형기단축이고 실제로는 예심기간
합해서 2년 6개월을 유치장,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해방되기 두달전에 풀려났고
해방된후 이승만박사가 돌아와 님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습니다. 미군 사령관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경성전기 (한전의 전신) 으로 옮긴후 상무로
활동했으며 취체역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님이 독립운동을 한 박용신이라는
것을 몇 사람만 알았을뿐 사람둘은 잘 몰랐습니다.
그 얘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님이
2005년 3.1절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아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강원도 홍천 (지금은 양평군이라고 함)에서
1916년 1월 25일에 태어난 박용신님은 경성 제1 고등
보통학교 (뒤날의 경기중·고) 를 거쳐 경성 법학 전문학교
(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대)나와 1940년 8월 12일
그 유명하던 민재호아나운서와 함께 경성중앙
방송국에 들어 오셨습니다.
아나운서로 활동을 하던 님은
선배 송진근 아나운서, 양제현 편성원,
또 1년 후배인 손정봉 아나운서, 그리고 기술자들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여서 단파방송에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 기술자 들이 몰래 들은 내용과 본인이 직접들은 내용을 종합,
독립운동을 벌리던 인사들을 비롯해서 본인의 주변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면서 독립운동을 돕던중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한체 1924년 12월 8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형사들에게 채포되었습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아나운서들은 거의다 채포되어 오랜기간
갖가지 고문을 받으면서 고역을 겪은끝에 결국
풀려 났지만 박용신님을 비롯해서 송진근. 손정봉
세분이 징역형을 받으셨고 또 형량
미상인 분도 있습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해당자가
출소되면 또다시 그 운동을 벌려나갈 것을 우려한
일제는 미결기간을 형기에 산입시키지 않았음은 물론
어떻게 던지 조사기간을 늘려 감옥에서 오랜 기간을 보내도록
간교한 술책을 썼고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재판 방청도
허용되지 않는 상태로 심지어 변호인의 변론도 어떤
명분으로던지 배제된 상태로 재판이 진행되었고
상고도 대부분 받아 들여지지 않고
기각되었습니다.
단파방송 연락운동에 참여 하셨던
유일한 생존자로 올해 연세 94세로 이제는
건강이 많이 쇄진 해 지셨다는 소식입니다. 은평구
응암동에서 아드님이신 박상억님과 같이 하십니다.
내내 건강 하신가운데 행복 하심을 빕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빙우회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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