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주역 양제현아나운서

이장춘 2009. 9. 23. 19:38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주역 양제현아나운서
 

방송국에서 단파 라디오로 들은
미국, 중국등에서 들어온 해외소식은
양제현( 楊濟賢 )아나운서 (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시절은  편성원)이 수집해서
송남헌, 홍익범전해지고 그 내용는 
 독립운동가 진영에 전해졌습니다.  
 
1936년 비슷한 시기에 방송국에
 들어온 송진근,  김준호 아나운서는 같은
개성 사람으로  개성 방송소에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어서 거기서 들은 소식을 용이하게 
수집할 수 있었고 편성원으로  어린이 프로그램을
 담당 하던터라 어린이 프로그램을 집필하던 
독립 운동가 진영의 송남헌님과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눌 수있었습니다.
 
이렇게 독립운동가 진영에
전딜된 소식은 독립운동의 전략수립
 기초자료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서 동시
다발적으로 퍼져 일본의 일방적인
선전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양제현아나운서는  1939년 제 2방송부가
 세로 발족하면서 편성과로   옮겨 어린이 방송과
주부방송을 맡아서 하셨습니다.  아나운서들이나  편성원
 기술자 등 방송국 안에 동료들과 친분이   깊어  성기석,   
이이덕,   염준모,   이남용님을  비롯해서 자연스럽게
애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고  그때마다
은밀한 얘기들은 오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이덕님이 개성으로 옮긴 뒤에는
 개성이 고향인 송진근님과 또 개성분 김준호님과 함께
 개성 방송소에 들려 그런 얘기들을 했습니다. 개성은 워낙
 반일 감정이 강한 곳이라 일본인들이 가기를 꺼려 우리
기술자만 세 사람이 근무했기 때문에 활동하기가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개성방송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단파방송 정보 수집은 1942년 12월 27일
개성방송소가 급습당하고 직원 세 명이 모두
채포되면서  막을 내렸고 양제현님은 1943년  
2월 8일 채포되어 1943년 8월 10일  육군형법
 제 99조, 해군형법 제 100조와 안녕질서
위반죄를 적용해서 1년 징역형이
언도 되었습니다.
 
양제현님은 1912년에 태어나 황해도
 송화 공립 보통학교를  거쳐 진남포 상업학교글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早稻田) 대학
정경학과를 나오셨습니다.  홍익범님의
이 대학 후배이기도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명동성당의
성도로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채포 될 때는  32세였습니다.   그의 삼촌 양우조님과
 최선화님은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로 양우조님은 1999년
 9월 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혔고
최선화님은 1991년 광복절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받으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들은 중경에서
 방송을 하시던 분블이었습니다. 
 
양제현님은 최남선선생님과 공무로나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일제에 협조 하지마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남선님은 일제 말에  마지못한
상황에서 언행이 친일이었다는 이유로 때로는 친일파로 몰리기도
하시지만 3, 1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실 정도로 독립에
앞장 스셨던 분이라 맥맥이 흐르는 독립정신은
살아 있으셨으리라 믿어집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