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파방송 연락운동 주역 성기석님
한국 방송사는 물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은 성기석님
으로부터 비롯되어 이 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았고
가장 긴 기간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1942년
12월 28일 경찰에 끌려가 1년 가까운 세월을
미결수로 있으면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년형을 언도받았습습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옥사했고
또 형을 언도받으신 다른분은 해방전에 감옥을
나왔지만 성기석님은 해방되던 날까지 감옥에
있다가 해방된 다음날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형무소에서 풀려 났습니다.
성기석님은 단파라디오 3대를
스스로 만들어 한대로는 1941년 이른
여름부터 중국의 중경방송을 통해 임시정부
김구주석, 김규식선생님의 방송을 비롯한 해외
뉴스를 들어 그 내용이 독립 운동가를 비롯한
뜻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져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추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단파라디오 석대중
한 대는 친구 박형완에게 주었고 또 한 대는
이이덕님의 사위 고한균님에게 주어 단파방송을
듣게 했으며 그들 나름대로 단파방송내용을
뜻있는 인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3년 가까운 세월 감옥에서 지내던
성기석님은 해방된 뒤 다시 방송국에 돌아오셔서
6.25때는 이리방송국 방송과장 겸 기술과장을 하셨고
그 뒤 연희송신소장, 수원송신소장, 남양송신소장으로
계시다가 1975년 정년퇴임하셨습니다.
재직중이던 1959년 8월 제2회
방송문화상을 받으셨고, 1990년 4월 7일
세상을 뜨신후 1990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방송 역사를 연구하신
유병은선생님이 쓰시고 1991년
KBS 문화사업단이 발행한 “단파방송
연락운동” 에 성기석님에 관한 자세한글이 있어서 그 일부를 인용 했습니다.
성기석의 반일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1920년 1월 15일 경기도파주군 원룡면 내표리 농촌에서 태어났다.모친이 그를 임신 중이었을 때 3.1 독립만세를 국수 봉에서 부른 후 경찰의눈을 피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으니 그는 모태에서 부터 애국하면서 출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어의 공립 보통학교 ( 효제 초등학교) 에다닐 때 원남동 56번지에 살았다. 그리고 학교길 에 경신학교와보성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는 구호 중에 일본 놈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일본 경찰기마대의 난폭한 행동으로조선 학생들이 쫓겨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또 경신학교에서 만세를 삼창하면
정신학교에서도 만세를 따라 부르는 결사적인
광경도 목격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경신학교 담을 넘어
도망 온 학생들을 부친이 숨겨주고 보호해 주는 것을 보고13살의 성기석은 애국심에 불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청량리에 전차를 타고 가다가 보성전문학교 ( 현 고려대학교) 학생과 경성제국대학교 예과 학생들의 잦은 충돌도 모두 애국적인
시각에서 보아진 것이다.
먹을 양식이 없어 만주로 떠나는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던 서울역 대합실의 참상도
모두 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데 족하였다. 또 북청물장수의
아들이 서울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상관계로 경찰에 채포되어간일 등은모두 일본 식민지하의 폭압정치를 말해 주는 것이며 이런 생활을해 온 성기석은 단파방송 밀청을 하게 된 사건을 가리켜 암흑세계에서 광명의 세계로 나오는 것과 같은것이라고 그의 회고록에서 적고 있다. 성기석은 1938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한
사람으로 단파사건에서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였던홍익범과미국의 시민권 소유자인 이이덕 독립운동가인 송남헌,그리고 방송국 편성과 직원이었던 양제헌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물 5인중의 한사람이었다. 성기석은 1942년 12월 28일 개성방송송소에서 현업 근무 중에 한국인 사상범만 다루는 부서인 고등계 형사반장으로 악명 높던 사이가 시치로라는 민완형사에게 채포되었다.
채포되던 날은 개성경찰서 유치장에서 일박하고 밤새도록 고문을
받으며 뜬 눔으로 꼬박 세웠다. 그는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그것도 부족해서 오랏줄로 두 손을 뒤로 돌려 묶고
용수를 씌워 처참한 꼴로 붙잡혀 같다.
성기석은 단파수신기를 3대 만들었다.
그중 한 대는 자신이 밀청하였는데 이것은 채포당시
압수되었다, 나머지 두 대는 각각 한 대씩 다른 사람에게
주어 그 들 나름대로 클럽을 만들도록 지도 해 준 것이다. “ 발 없는말이 천리를 간다.”는 격으로서울 장안과 개성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심심치 않게유포되어 일본 경찰들과 육군 헌병들을 초긴장시킨 것이다. 성기석은 압수된 수신기로 미국, 중경등과 상호 교신을했다는 간첩혐의를
뒤집어 씌우려는 흉계에 말려들어 유치장에서 남달리 모진 매질과 각종 극심한고문을 당해야 했는데 고문은 심야에만 자행되었다. 그래서 채포되어 인도되기 까지 10개월 가까이 걸린 긴 세월을 미결수로 구치되어 갖은곤욕을 치러야 했다. 만일 그때 성기석, 홍익범, 이이덕, 송남헌등이 간첩죄가 성림되었다고 가정을 해 보면 때가 전시인지라 전시중의 간첩은 사형 당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으로 추리된다. 이것은 성기석과의 인터뷰에서 솔직한 심정을
전해들은 것이다. 성기석은 1943년 7월 29일에 기소되어
미결수로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고 죄수번호 56번의 딱지가
가슴에 붙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지긋 지긋한 유치장
생활보다 마음이 편한 것이었다고 한다.
변호인이 선임되어도 아무 소용없는
변호사 무용의 형식적인 재판이며 기족까지도
엄격히 방청이 금지된 공판을 강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도 후에 불복 상고하는 것은 모두 기각 해 버리는
참으로 암담한 시대였다. 그래서 1943년 10월 21일에 있었던
결심공판에서 2년형의 언도를 받고도 불복상고를
포기 해 버린 것은 가슴 아픈 것이었다.
성기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를 악물고
옥중에서도 흉악범 취급을 당하며 갖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이를 참아 넘겨야만 되었다. 그러나 성기석은 단파방송을 누구보다도
오래 또 조직적으로 밀청하여 왔으므로 머지않은 장래에 무슨 깜짝 놀랄
희소식이 있을 것임을 내심 기다리며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다. 그러던 중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서대문 형무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기석은 형기만료일 65일을 남겨둔 채 1945년 8월 16일
악몽의 옥중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사진에서 기를 높이 들어 올리신 분이 성기석님입니다.
1945년 8월 16일 해방다음날 서대문 형무소가 열리면서
단파방송 연락운동 의 주역 성기석님을 선두로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를 나오는 모습을 매일신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등 독립운동가들의 출옥장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이기도 합니다.
성기석님과 유병은님은 같이 경성전기학교를 나오셨습니다.
성기석님은 1938년 학교를 나오시면서
바로 방송국에 들어오셨고 유병은님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빈자리에 들어오신
분입니다. 유병은님은 일생을 통해서 방송 자료를 모으고
방송사 연구를 하셨으며 특히 단파방송 연락운동의
모든 지료를 찾아 그 실제를 규명하시고
정리하신 분입니다,
성기석님은 1990년 8월 15일
45주년 광복의 날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훈장은 아들 성용현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 왼쪽 ) 오른쪽은 같이
훈장을 받으신 조종국님이고 가운데 분은
단파방송 연락운동 책을 쓰신
유병은 선생님입니다.
방우회 춘하추동방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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