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남산시절

TV 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5 )-탤런트-

이장춘 2009. 5. 7. 15:24

 

 

 

 

TV 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5 )

방송이 송출과 동시에 출연자들의 확보가
절실 한 것이었다.  HLKZ등에서 출현하던 영화인,
연극인을 비롯한 연예인 들이 있었고 가수나 성우는 라디오에서
 활약하던 연예인들이 있었지만 탈랜트는 세로 더 확보 해야만 해서
 62년 1월 25일에는 제 1 기 탈랜트 26명을 선발했고 5월들어

  30명을 다시 충원 했다. 이들  30명가운데  14명은 어린이,

 연예, 음악, 오락분야를 담당 할 출연자였다.

 

 

박주아, 정혜선, 김난영의 신인시절

 
1차와 2차에 걸쳐 선발한 드라마 탈랜트는
김난영, 정혜선, 박병호, 최길호, 태현실, 박주아, 김혜자등

42명 이었는데 이 가운데 4명은 교육받는 과정에서 그만두고 

38명의 탈랜트와 HLKZ시절부터 방송에 출연해온  김승호, 장민호,

이순재등 연극인, 영화인들이 드라마에 출연 했다.   이들이 KBS-

TV 발족으로부터  지난세기의 드라마 주역이 되었다.

이들가운데는 지금도 활동하는 분들이 있다.  

 

 

당시에는 방송시설도 극히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녹화기가 없어서 드라마를 비롯한  모든 방송이
녹화 방송이 아닌 생방송으로 진행되어 어려움이란 이루 말 할수
없었고 뉴스에도아나운서 스트레이트 방송외에 한, 두꼭지의
 녹화필림 삽입이고작이었다.  다음은 한참 뒤에 들어온

 TV녹화기로  최초 시험녹화 모습이다.

 



1961년 서울 텔레비전방송(KBS-TV) 개국 초기부터

 

사용된 흑백 TV카메라로 뉴스, 좌담, 오락, 스포츠 등
프로그램 제작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TV칼러방송이

 시작된 1980년까지 사용 되었다.

 

 

우선 방송을 시작하고 보자는 것이어서  

방송초기에 제반 여건은 순탄치를 않았다.
우선 돈이 모자랐고 사람이 모자랐다.
 
연간 예산 4,500만원 라디오 방송을 하던
중앙방송국의 예산이 7,000만원이던 시절이었으니까
4,500만원으로는 겨우 방송명맥만 이어가는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방송초창기의 어려움을 반영하듯 62년 1월
15일 처음 주간 기본방송 순서를 편성한 후 에도
한해동안 여섯 번이나 편성이 바꾸었다.
 
 

 

처음 네 시간반에서 5시간으로 늘려 보기도 했지만  

유지하기가 어려룹고 전력사정도 원활하지 못해  한 때는
3시간 반으로 줄어든 때도 있었다. 생방송의 어려움과 재정적인
어려움으 방송은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 중심으로
되어 그 비율이 40%를 넘었다.
 
이 토록 어려움을 겪으면서 재정적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TV방송예산을 일반회계 외에
특별 회계를 도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특별회계
재원을 광고료와 시청료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100원씩 받던 시청료를 150원으로 올렸다.
 
이를 위해 국영 텔레비전 사업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국영 텔레비전 사업 특별 회계법이
제정되고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청료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고 

 

 100원이던 시청료는 150원으로 책정되었다.  KBS-TV가
광고를 처음 시작한것도 이때였다. 이로서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해결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 수상기 3만대였에 불과했다.
HLKZ시절에 7천-8천대 정도가 있었지만
 KBS-KV방송실시를 계기로 2만대를 관세 등을
면제 해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싼 값으로
공급해서 약 3만대가 된 것이다. 

3만대라고 해 보았자 시청료액수도 별것
아니러니 와 광고도 수상기 대수가 적어 크게
기대 할 것은 못되었다. 또 수상기 대수도 잘 늘어나질 않고
한때 줄어드는 경향 까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수상기를
만들 수도 없었으려니와 수입수상기에 대해계속 특혜를
줄 수 없다 보니 값도 비싸고 또 시청료도 다소의
부담이 되었으며  시청권도 서울에 국한 되어서 
수상기가 늘어날 여건이 못 되었다.
 
국산 수상기가 나오기 전 까지는 일반인이
 수상기를 살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필자가 1963년
방송국에 들어 왔을때 첫달 봉급 3931원으로  쌀 한가마니
 값이 3,000원이었고, 한달 하숙비가 쌀 한가마니 값일때였다.
20만원 이상이던 외재 수상기 한대 사려면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5년이상을 모아야 되니 어디 엄두나 안났다.  여기다가
 전자제품은 사치품이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근본 생각과
 상당수의 언론인, 정치인 , 지식층까지 TV국산화를 '
사치풍조를 조장한다'고 반대하던 시절이라
어려움은 컸다. 
 

 

1966년 8월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생산한 국산 제1호 수상기.

 

낡은 수상기는 없어져도 새로운 수상기는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1960년 후반부터
분위기가 바뀌면서 1966년, 국산 TV가 생산되고 또 지역에
중계소를 설치해서 시청권이 늘어나면서  1969년에는
 남산의 출력도 2KW에서 12.5KW로 늘어나, 시청권이
늘어나면서 수상기가 많이 보급되어  재정적인
 문제는 해결 될 기미가 보였다.  
 
당시 대통령의 월급이 7만8천원일 때 19인치
국산 TV가격은 6만 8천원을 시작으로 8만 7천원의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달려 추첨을 통해 판매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되자 66년 까지만 해도
연간 6000만원 미만이던 시청료가 67년에는 그 배가 넘는
 1억 3,800만원으로 늘어났다. 68년에는 1억 8,000만원이

 되었고 출력이 12.5KW로 늘어난 69년에는  5억원을

  육박하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남산TV송신소

출력증강 스위칭 모습이다. 

 

 

1972년 남산 50KW출력증강 스위칭 장면

   

전해에 비해서 무려 3배 가까운 시청료 수입이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100원이던 시청료가 150원,
200원, 300원으로 오름과 동시에 수상기 보급이
 빠른 속도로 늘어 났기 때문이었다.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 될 기미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 무렵부터 TV 3국시대가 전개 되면서
 경쟁체제가 전개되어 국영 TV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체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