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에 나타난 최초의 일들을 모아 ( 1 )
1924년 12월 9일 이 땅에서
첫 시험전파가 나가고 1927년 2월 16일
정식으로 방송이 시작된이래 방송은 우리민족의
애환을 안고 숟한 일들을 겪어 왔고 그 일들에는
항상 시작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시작, 최초. 처음이라는 것도
수없이 많았지만 방송사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만한 일들을 영상자료를 토대로 정리 했습니다.
자료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모으지만 아직도 구하지 못한
자료가 많은 줄 압니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두편으로
나누어 올려 드리려 합니다.여기 올리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계신분은 그 자료를 같이 보실 수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기전
여러곳에서 시험방송이 있었지만 체신국의
시험방송이 방송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시험방송은
지금의 통신공사자리였던 옛 총독부 체신국에서 했습니다.
시험방송 시절의조선총독부 체신국 모습입니다.
최초의 방송국 청사
1927년 2월 16일 !
JODK첫 전파가 발사 되던 곳 정동 1번지 !
그 마루턱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때 정동 방송국은
숱한 화재를 뿌리면서 방송역사에 첫걸음을 내 딛었던 곳!
이곳이 KBS전신인 JODK이었습니다.
JODK의 D는 일본 방송 중에서 도꾜, 오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네 번째로 설치된 방송국임을 의미 했습니다.
이곳 정동은 방송이 비교적 잘 퍼져 나갈 수 있는 부지 중 에서
구하기 쉬운 부지로 이왕직에서 가지고 있던 땅 190평을
임대받아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이 정동일대의 옛 지명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능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이곳으로 정하고 그 묘 이름을
정릉이라고 한데서 유래 됐습니다.
최초의 방송인들
1927년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 때
우리방송인은 다섯 분이 계셨습니다.
50명의 방송인 가운데 5명이 한국인 이었습니다.
엔지니어로 노창성, 한덕봉님, 아나운서로 이옥경,
마현경님, 편성에 최승일님이 계셨습니다.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님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님은
일본에서공부하고 돌아와 부부사이가
되었고 시험방송 때 부터 방송에
참여 하였습니다.
가운데는 큰 딸 노영자님으로
이나라 최초의 패션디자이너 노명자님의
언니입니다. 노명자님은 어려서 성함이고
노라노 양재 학원을 하시면서 노라노
여사라고 널리 알려 지신 분입니다.
최초의 방송인은 엔지니어들로부터
시작 되었고 엔지니어도 마이크 앞에 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른 곳에서 말씀 드렸고
제 블로그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노창성님입니다
마현경님입니다. 마현경님은
최승일님과 부부간이었습니다.
최초 의 PD
최승일님은 최초 방송제작인이고 아나운서였고
소설가, 문학가, 평론가였고, 연출가였습니다.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 마현경님의 부군이시고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님의 큰 오빠이며 방송사에 빠져서는 안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까지 이름있던
김영팔님과 같이 방송에서 큰 발자욱을 남가신 분이지만
블행이도 이 분들은 좌익 인사 였습니다.
시험방송 때부터 방송 드라마에 출연하신 분들입니다. 위 사진은 1925년 여름 시험방송 때 방송극 "새벽종"에
출연 했던 분들로 이분들은 조선 극우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이 때의 출연은 성우가 아닌 배우들이었습니다.
뒷줄 왼쪽 이백수님, 가운데분이 변기종님,
그 왼쪽분이 권일청님, 앞 줄 가운데 분이 회원님들이
잘 알고 계시는 복혜숙님 ( 복혜숙님은 60년대까지
활동 하셨고 방송문화상도 받으셨습니다.) 그
왼 쪽이 이경환님입니다. 1971년 이덕근님이
쓰신 글에서 발췌 했습니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던날 대부분 일본 방송을 중계 했거나
일본인들이 방송에 출연해서 일본어로 방송 했지만
그 중에서 한국인으로서 처음 우리말 방송을 하신분은
어린이 날 제정자로 널리 알려진 소파 방정환님
이었습니다. 아나운서 이외에 한국인이
한국말로 방송한 최초였습니다.
최초의 한국어 방송 간부
1932년 제2방송을 준비하면서
제 2 방송과가 새로 발족 했고
이 때 제 2방송과장이 되신분은 만담등으로
이름 높던 윤백남님이었습니다. 앞줄 오른 쪽 분입니다.
최초의 송신소
연희송신소는 연주소와 별도로 설치한
최초의 송신소 이었습니다. 1933년 4월 26일
이 연희 송신소 준공으로 1Kw에서 10Kw로 출력이 증강되었고
한국어와 일본어로 이중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 까지는 한 채널에서 우리말 방송과 일본어 방송을
같이 방송 했는데 우리말 방송의 양은 일본어 방송에 비해
3분의 1이나 절반 밖에 안 되었습니다.
최초의 전속 방송관현악단 지휘자
1933년에 JODK 전속 관현악단이 창설되었고
홍난파님이 첫 지휘를 맡았습니다
.
홍난파 젊은시절
홍난파로 널리 알려진 홍영후님(오른쪽)이
1933년 8월에 홍성유, 이영세님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방송 전속 관현악단의 최초 지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계시던 1935년 야유회에서
1928년 황성옛터 작곡으로 널리 알려진 전수린님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가운데분이 홍난파님이고
오른 쪽 분이 전수린 님입니다.
최초의 방송 관현악단
방송관현악단이 발족하기전 1927년 2월 16일 JODK
개국식에서 연주한 중앙 악우회 관현악단입니다.
최초에 전파를 탄 관현악단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권투 중계방송
JODK가 최초로 중계방송한 1932년 2월 21일 서정권군 도미 송별 권투대회입니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 권투 구락부가 후원힌 이 대회는 소공동에 있던
경성 공회당에서 열렸고 이 경기를 JODK가 중계방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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