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초기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값이 보통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값이었다.
해드샛을 쓰고 한사람씩 들을 수 있는 「광석 라디오」는 쌀 세가마니 값을 주고 살 수 있었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사용이 어려웠고 진공관 라디오는 쌀 20가마니 정도의 값을 주어야 했으며 미국제 좋은 라디오는 쌀 100가마니 값 이상을 주어야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서울에서 1Kw로 방송하던 시절이라 청취지역도 극히 제한적인데다가 한·일어를 동일채널에 편성하는 등 여러 사정으로 라디오가 보급되지 않으니 청취료 수입이 들어오지 않아 방송국 운영이 극도로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1932년 조선방송협회를 설립하고 출력증강·이중방송실시·지역방송 확장과 함께 방송국에서 라디오를 직접생산, 싼값으로 보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보급형 라디오는 1호부터 6호까지 보급되었다. (「장도형 박물관」보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라디오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은 경성방송국을 건립한 최초방송인 노창성이었다. 그는 방송국 설립과 함께 강습회 등을 열어 라디오 제작기술을 전수했고 그로부터 강습을 받은 사람들이 라디오 제작과 수리 등에 임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초의 라디오 商을 연 「이운선」으로 그는 시험방송시절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라디오 기술을 배워 경성방송국 설립 무렵, 라디오 상회를 열었다. 「 광운대학 설립자 」조광운도 라디오 보급의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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