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남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대한민국 중앙방송국 방송이 끊겼다. 그것을 안 도쿄주둔 UN군 사령부에서 6월 29일부터 대한민국을 위한 방송이 시작되었다. VUNC! UN군 총사령부 방송! UN군이 장악하고 있던 NHK 두개의 채널 중 한 채널이 이 방송에 사용되었다. 위진록, 홍양보 아나운서 앞에 놓인 마이크에 NHK나 JOAK 호출부호가 있음을 본다. JOAK는 일본에서 제일먼저 생긴 방송국이라는 의미를 담아 부른 호출부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경셩방송국의 호출부호는 JODK로 이것은 일본에서 네번째 세워진 방송국임을 의미했다. VUNC 마이크 앞에 앉은 홍양보 아나운서 콜사인도 없이 방송국 명칭도 없이 방송인도 없이 주일본 전권공사 김용주의 입을 통해서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6.25 성명서와 UN의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급히 시작된 방송! 이 방송이 21년간을 이어가면서 대한민국과 함께 했다. VUNC 유엔군 총사령부방송, 한국방송역사 90년(22) VUNC에 최초로 방송인을 파견한 것은 1950년 7월 3일이다. (한국방송 70년사) 방송인이자 방송 역사학자 유병은은 그의 저서 방송야사 189P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6.25때 대전방송과장으로 재직했던 유병은 선생님 실재 체험담 전략.....“연달아 중앙방송국 에서 피난 온 직원 수가 차츰 증가했다. 며칠후에는 민재호 아나운서를 일본에 파견하여 UN군에서 운영하는 VUNC 방송국에 보내 방송토록 했다. 급히 일본으로 떠나게 된 민재호 아나운서가 한 장의 메모지를 보여주며 작별인사를 했다. 저자가 그 메모지를 읽어보니 주일대표부 한국은행 도쿄 출장소장에게 내무부장관 최순주의 친필 메모지시 공문이었다. 내용은 ‘민재호 아나운서 일본 체재 중의 경비를 적당히 지출하시오’ 였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희귀한 메모 였다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중앙방송국 방송과장이던 민재호는 단신으로 VUNC 유엔군 총사령부방송에 파견되어 방송국장으로부터 직원의 일까지 담당하며 또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 되었을 때는 서울에 와서 방송을 하는 등 동부서주하며 이 방송을 이끌어 갔다. VUNC 마이크 앞에 앉은 위진록 아나운서 홍양보, 위진록, 유덕훈, 김유선 등 후속 아나운서, 방송인들이 파견된 것은 9.28 수복 이후의 일이다. 위진록 아나운서는 필자를 만나 말했다. ‘한 달 정도의 파견계획 으로 간 VUNC에서 22년을 방송했다. 나는 KBS에 사표를 낸 적도 없고 퇴직을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엄격히 말하면 지금도 KBS 아나운서 신분이다.’ 라는 말씀을 한적이 있다. VUNC 유엔군 총사령부방송은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
서울을 점령하면서 방송국을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 한 공산군은 방송국을 제일먼저 점령, 손아귀에 넣어 1950년 6월 27일 자정을 기해서 서울에서 방송하던 대한민국 중앙방송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28일부터 공산군의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는 바로 일본에서 대한민국을 향한 방송을 하기로 하고 첫 방송을 시작한 것이 29일의 일이었다. 이때의 일을 당시의 주일본전권공사 (주일 한국대표부 단장)를 역임한 김용주(김무성 의원부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국방송 70년사 221P) 김용주 주일 한국대표부 단장 사진출처 김무성 의원 블로그 1950년 6월 27일 밤 전화통과 라디오 앞에서 밤을 새우던 우리 대표부는 밤 10시경 모윤숙 여사의애국시 낭송을 끝으로 서울 방송이 끊겨 버렸다. 당시 서울방송은 밤에는 들을 수 있었으나 낮에는 청취가 되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28일 밤이 되어 우리는 다시 라디오 앞에 모였는데 뜻밖에도 라디오에서는 공산당의 적기가가 울려나오면서 북괴방송이 나오지 않은가? 서울방송이 북괴에 점령당한 것을 직감한 나는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허위방송을 듣고 어떻게 동요할지가 제일 우려되었다. 특히 지하에 잠복 해 있던 공산당 들이 어떤 만행을 야기 시킬지 심히 걱정되었다. 나는 29일 새벽 맥아더 사령부의 윌로비 장군을 찾아가 어제저녁 방송얘기를했더니 그도 방송을 들었다면서 도대체 서울 전황이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도리어 반문했다. 나는 방송국이 적의 수중에 들어 갈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리한 상황을 설명 해 주고 전 국민에게 미국의 참전과 UN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정을 속히 알려 UN군이 상륙 할 때까지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참고 반격 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니까 그런 사실을 고취할 전파매체를 곧 마련해서 적침을 받은 한국민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맥아더 사령부가 쓰고 있는두개의 방송국 중 하나를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윌로비 장군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 면서 내가 단독으로 결정 할 수 없으니 곧 간부 회의를 열어 귀하의 뜻이 관철 되도록 최선을 다 해보겠다, 고 약속 했다. 이윽고 그날 오후 2시경 그로부터 우리가 NHK 제2방송을 사용해도 좋다는 결정이 내렸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오늘저녁방송은 9시부터 하되 미리 녹음 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오늘 밤 만은 김 공사가 직접 방송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것이 20여년에 걸쳐 방송 된 바 있는 UN동경 방송의 시초이다. 그런데 우리 주일 대표부의 부족한 인원으로는 이 방송업무를 도저히 감당 하기가 어려워약 3주일이 지난 뒤에 다시 윌로비 장군을 만나 고충을 전하고 UN군 사령부에서 인수해서 계속 해 달라고 부탁 했더니 그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의사가 있었으나 차마 먼저 제의 할 수가 없었 다면서 쾌히 응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 방송은 당시 6.25 전쟁 중에 우리 국민 에게 희망과 용기를 넣어주는 유일한 방송이 된 것이다.” 김용주 주일 한국대표부 단장 사진출처 김무성 의원 블로그 VUNC는 6.25로 한국방송이 부산, 대구, 마산에서만 방송이 가능했던 상황에서 대한민국 전역을대상 으로 하는 방송을 해야 했기 때문에 후꾸오가 방송국의 대 출력을 활용했다.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는 우리방송보다 더 잘 들렸다고 한다. VUNC는 도쿄에서 방송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면서 군용 BC-610, 300W송 신기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와 군용차에 방송기기를 싣고 이동방송을 하거나 대로변에 대형 스피카를 설치 해서 항송을 했는가 하면 UN군이 주둔하던 반도호텔 (지금은 롯데 호텔을 새로 지음)에서 방송을 하기도 하는 한편 불타버린 KBS를 재건하는데도 큰 힘을 기울였다. 이때 민재호 아나운서도 함께 들어와 방송을 했다. UN군이 북진하여 평양방송을 점령하자 한국의 방송인들을 특파원과 함께 평양방송에 보내 "자유의 소리"를 12월 4일 후퇴 할 때까지 방송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정부와 KBS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하자 KBS방송 활동을 돕기 위해 상주 특파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아울러 중공군을대상으로 중국어방송 곁들이기도 했다. VUNC는 부산 피난시절 하루 두 차례씩 프라임 타임대인 밤 9시와 10시에 각각 30분씩 KBS를 통해 중계방송 되었다. 방송국에 주둔 해 있던 UN군 사령부 심리전과는 텔레타이프를 통해 신속하고 정확한 뉴스를 보내줄 뿐 아니라 뉴스해설을 도와 주었고 " 할머니의 얘기" 라는 프로그램을 제공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공산당의 실체를 알기 쉽게 얘기 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김경자 아나운서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능숙하게 내어 아예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1951년 11월 공비들이 남원지구 에서 약탈을 감행 할 때에는 국군의 공비 소탕을 돕기 위해 남원지구에 공비귀순을 종용하는 방송 팀을 파견했다. 1951년 3월 16일 서울이 다시 탈환되자 KBS의 파괴된 시설복구와 공중파 송신을 원조하기도 했다. VUNC에 근무했던 위진록 아나운서는 필자와 만나 파괴된 정동연주소 부근에 있던 조선방송협회 건물에 스튜디오를 새로 만들 때 VUNC가 일본 NEC로부터 많은 방송기기를 사 보내주어 방송시설 복구에 힘을 기울였다는 점을 역설 하며 한국방송사의 주요부문으로 기록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울을 완전히 수복한 후에도 일본 동경에 있다가 1958년 일부는 서울로, 일부는 오끼나와로 각각 이동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71년 6월 30일 VUNC가 막을 내릴 때까지계속해서 방송을 하면서 프로그램을 KBS에 제공해서 대북방송 채널로 오후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송 해 왔다. 서울 함락 후 숨어서 듣던 미국의 소리방송과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이 있어서전황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을 가지고 들었다. 6..25한국전쟁과 함께 탄생한 VUNC는 21년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후복구를 위해 힘쓰는 등 우리와는 끈끈한 인연을 맺으면서 그 임무를 다하고 1971년 6월 30일 막을 내렸다. 1960년대 국제방송국 에서 대공 심리전을 담당했던 필자는 저녁 9시 부터 10시까지 방송된 VUNC방송에서 위진록 아나운서의 굵직한 목소리로 무겁게 천천히 들리는 <V-U-N-C> 개시멘트가 생생하다. 6.25 참전 군 심리전 장교로 근무했던 장마루촌의 이발사 원로방송작가 박서림 선생은 위진록 아나운서에 관한 최근 글을 접하면서 그때의 VUNC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VUNC에 근무한 분은 민재호아나운서를 비롯해서 홍양보, 위진록, 유덕훈, 이상송, 김유선, 김기형,김덕빈 등 많은 우리 방송인들이 방송을 했다. 작가 김영수, 김희창 두 분도 VUNC에서 집필 했으며 배우 김복자도 성우로 참여해서 방송을 했다.
우리방송인들이 우리말 방송을 주로 했던 VUNC 분위기는 우리나라방송이나 다를 바 없었다. VUNC에 일하시던 분 가운데는 김영수, 김희장 등 국 내로 돌아오신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 미국에 머물렀다. 민재호 아나운서는 VOA로 옮겨 방송 하는등 활동하다가 1987년 8월 2일 미국에서 세상을 뜨셨지만 가족들과 필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메일 주고받는다. 홍양보 아나운서는 VOA로 옮겨 방송하다가 미국 버지니아에서 살던 중 2016년 백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셔서 아들 홍철과 친구인 강태인님으로 부터 연락 받아 세상에 알렸다. 성우등 광범한 활동을 했던 김복자, 민 구 님도 세상을 뜨셨디. 위진록 아나운서, 유덕훈 아나운서는 LA에 사시면서 KBS 사우회 회원이시고 김유선 아나운서 는 남편 이중집님과 함께 뉴욕 부근에서 사신다. VUNC와 KBS 동남아 순회공연 1958년 그때까지 유례가 없는 대규모 동남아를 대상으로 한 해외 친선 KBS 순회공연이 있었다. 임원식을 단장으로 하는 KBS교향악단과 김백봉 무용단 등 100 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친선예술단이 3개월간에 걸쳐 태국, 월남, 필리핀, 홍콩, 일본 등지를 순회하며 동남아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한다는 큰 의미를 갖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그해 봄 VUNC가 요코하마 나하로 옮겨오던 1958년, 이 순회 예술공연단이 순회공연을 끝내고 귀국차 3일간 휴식을 위해 요코하마의 중심 항구 나하에 머물렀다. 그 말을 들은 위진록 아나운서는 한 번도 생으로 연주되는 교향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요코하마 주민들에게 KBS교향악을 들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위진록 아나운서는 임원식 단장과 교섭해서 계획에 없는 나하연주를 추 진해서 3일 간의 준비로 어렵고 힘든 공연을 성공리에 치룰 수 있었다.위진록 아나운서는 2013년 발간된 ‘ 고향이 어디십니까’ 자서전에 자세히 기록 해 놓았다. 위 사진은 나하 공연을 마치고 임원식, 김백봉 단장과 VUNC에 근무한 김영수, 김복자님이 함께 한 사진이다. 화 보
VUNC에서 백선엽, 김정열장군과 방송하는 홍양보아나운서 도쿄에서 황우겸아나운서 야구중계방송을 돕는 홍양보아나운서 VUNC에서 작가 김영수 VUNC에 근무하던 시절 김유선 아나운서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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