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역사 90년

한국방송 90년 역사 (2) 경성방송국 JODK편

이장춘 2022. 10. 20. 19:42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1_SIxOSaoWc 


한국방송 90년! 2017년 2월
16일은 한국방송 90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부르는 ‘반달’
그 노래가 탄생하던 무렵 방송도 함께 싹이 트기
 시작했고,  1945년 해방되어 애국가를 마음대로
 부르기 시작 하던때로 터 KBS가 지작되었다.
땅에서 처음 방송이 시작된 것은 2017년 2월
 16일로 90년이 되고 우리 뜻에 따라 우리
방송을 KBS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
 7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방송 90년 역사 (2) 경성방송국 JODK편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스마트폰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방송을 주고받는 송신기요
 수신기라고 할 수 있다. 얼굴을 마주보며, 또는
주변상황을 보여주며 얘기를 나눈다. 1:1채팅도
하지만 다중을 상대로 얘기를 전하기도 하고
서로간의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SNS상
에서는 이를 일러 방송이라고 한다.


넓게 보면 스마트폰을 든 모든
사람들이 방송의 송신자요, 수신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구촌이라는 말을 익숙
하게 사용한다.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방송90년! 타임머신을 타고
 90년 전으로 가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9번 변한 것이요
 또 10년이 더 지나면 한 세기 백년이 된다. 
 후진국이다 못해서 나라까지 잃었던 이 땅에서
단 하나의 라디오 채널로 시작된 첫 방송! 정보화
시대를 맞은 오늘의 방송이 있기까지 어찌 다 말 할 수
있으며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겠는가. 수많은 방송역사서가
 출현했어도 기록으로 남은 방송역사는 빙산의 일각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춘하추동방송은 12년 가까운
세월 방송의 산 증인들을 만나 글을 모으고
영상과 소리, 사진들을 모았다.


 방송 90년이 되는 달 몇 편의
글로 압축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압축해도
12년을 해온 일을 몇편의 글로 불가능하기에
 그 대강의 줄거리만이라도 정리 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관련글을도 몇 편 연결해서
이 글을 보충하려고 한다.


2. 방송의 태동


세계에서 최초로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0년 11월 2일로 미국의 KDKA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옥상에 천막을 치고 벌레가 날아들
 정도로 허술한 방송실에서    100W출력으로 방송을
 시작한 것이     지구상에서 방송을 실시한 최초이다.
마침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있을 때라 KDKA가 처음
내보낸 프로그램은 하딩과 콕스가 대결한 미국 제 29대
 대통령 선거전의 개표 중개 방송이었고 하딩이 대통령
으로 당선 되었다는 소식이    다음날 아침 신문이
 배달되기도 전에 라디오를 통해서 전 미국인
에게 전달되자 미국 국민들은 라디오
방송의 위력 앞에서 환호했다.





그로부터 미국 내는 물론
세계 각 나라에 방송국이 설치
되었다. 처음부터 민영방송으로 시작된
미국의 방송은 오늘까지도 민영방송이 주를
이룬다.    선진국 대열에 있던 일본에서도 곧
방송국설치 준비를 서둘러 1923년 시험방송을
 시작해서 1925년부터 방송을 내 보낸 것이
오늘날의 도쿄에 있는 NHK이고 오사카,
 나고야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JODK
 경성방송국은     일본총독부가
 1924년 봄부터 방송국 설립을 추진해서
 1924년 12월 9일 최초의 시험방송을 실시하고
 2년여의 시험방송을 거쳐 1927년 2월 16일 1시
개국식을 갖고   정식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시험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때는 방송대신
 ‘무선전화’ 라는 용어를 썼다.




방송형태는 국영도 아니고
 순수 민영도 아닌 사단법인체로
 운영 되었는데 그때의 사단법인체는
 지금의 개념과는 다른 실재로는 총독부의
 통제 하에 있었고 청취료가 그 주 재원 이었다. 
 경성방송국은 일본의 내선일체 (본토와 식민지가
 하나) 라는 기본정책에 따라,   또 시대의 추세에
따라 설립되고 운영되었으되   일본 방송국의
 지국이거나   일본방송의     중계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출부호에 있어서 경성방송국은
 JO가 적용되었지만 일본의 다른 식민지
에는 JO가 적용되지 않고 대만 'JF', 만주 'JQ'
적용되었다. 방송국을 높은 곳에 세워야 잘 들릴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서울 4대문 안이 내려 다
보이는 정동 1번지 언덕에 경성방송국을 세우고 개국식
16일 오후 1시 한국인 이옥경 아나운서와  미쓰나카라고
 하는 일본인 아나운서가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보는 가운데 방송이 시작되었다.





45m 철탑 2기의 안테나에서
 1Kw출력에 파장 435m  (690KHz)
으로 송출되는 전파는 전파장애가
없던 때라 경기도 일원에서는
그런대로 들을 수 있었다.


3. 우리말 전담 채널 발족
 이중방송(二重放送) 실시


방송이 시작되면서
갖가지 화재를 낳고 신비함
으로 받아드려지면서 큰 호기심을
 끌었지만 라디오 값이 워낙 비싸서 상당
기간 시험방송을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 했어도
 방송국 개국무렵에 등록된 라디오 수신기는 1,440대
 불과했다.   일본인 위주로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일본어 7에    우리말 방송 3으로 편성되고 시간도
 듣지 않는 시간에     편성 되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수신기 값이 쌀 50가마니, 100가마니
 값으로   워낙 비싸다 보니  한국인들
에게 외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방송편성비율을 6:4 정도로
하는 등 개선을 해 보았어도 한국인들
에게는 여전히 관심 밖이다 보니 수신기는
 늘어나지 않고 경영은 어려워져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자 부득이 고양군 연희면에 송신소를
새로 세워 한국방송채널을 새로 마련하고 출력도
 늘려 1933년 4월 26일부터 우리말방송을 따로
분리해서 방송을 했다.   이것이 방송국과
따로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 송신소다.





이때부터 방송을 우리말과
 일본말로 한다는 뜻으로 이중방송
二重放送이라고 했다. 한국어방송을
 전담하는 새로운 채널이 새로 탄생한
 역사적인 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제2방송이라고 불리던
 우리말 방송은 출력 10Kw, 주파수
 610Kz로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와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공공
기관에서 우리말 사용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유일하게 우리말을 자유롭게 사용
할 수 있었던 곳이 경성방송국
제 2 방송과였다. 


4. 조선방송협회 발족과 전국방송망 구성


이에 앞서 1932년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개
편되어 서울의 JODK 경성방송국
외에 1935년부터 부산, 평양, 청진,
 이리, 함흥 등에    방송국을 세워
 전국방송망이 형성되어갔다. 


이중방송 실시를 앞두고 촬영한 방송부 직원들
성함이 없는분들은 일본인 방송인이다.


이중(二重)방송 실시는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활기를
불러 넣어 주었다. 우리말 제2방송의
 독립 탄생은 그 당시로서는 한국인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방송
시간도 1일 16시간으로 크게 늘었으며 그 시절
 문화계 최고반열에 있던 윤백남(윤교중)을 영입
 제2방송과장으로 하고 이혜구, 이하윤, 김문경,
최아지(최정석) 등 방송인들을 공개모집
해서 우리말 방송에 임했다.


  값싼 라디오를 개발해서
 라디오 보급도 빨라져 한국인 청
취자들도 대폭 늘어났다. 방송인들
에게도 새로운 의욕을 불러 넣어
주면서 활기를 띠었다.


5. 이중방송 초기의 방송내용


우리말 방송채널은
 우리방송인들이 우리말로
방송을 하는 채널이기는 했어도
 방송의 편성이나 내용은 일본의 정책에
따라야 했다. 총독부 당국이나 협회로서는
 우리말 제2방송의 설치 목적이라 하여 心田開發,
農村振興, 婦女敎育의 3  대 방침을 수립하고 직접
간접으로 사상개조, 황국 신민화 운동을 프로그램
속에 반영시키려고 했기에 뉴스,시사프로그램, 
 교프로그램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연예프로그램이나 어린이 프로그램
 중점을 두었다.


 지금처럼 뉴스나 해설 등의
 보도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 비평의 시사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 내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전달 해 주던 시절이   아니었고
감시원을 두어서 일제가 허용하지 않는
 방송은 가려지던 때였다. 


  따라서 방송국에는 기자가
 없었고 뉴스는 일본방송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방송하거나 동맹통신이라고 하는
일본정부의 통제 하에서    발행되는통신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 방송 하는 것이었으며
 당국에서 보내주는 소식을 그대로 베껴
전달 해 주는 것이 뉴스였다.


필요 할 때는 신문을
인용해서 방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증권시장이나
기상대에 직통전화가 있어서 쌀값이나
주식시세 기상통보를 전해주는 것이 큰
소식이었고 전기소식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생활뉴스였다.


이런 환경에서 음악이나
방송극, 어린이방송프로그램 등에
 역점이 주어져서 활기를 띠면서  분야의
성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순수
 우리말 방송이 이어졌고 우리문화가 이어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말방송을 없앨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그 내용은
밑에 글을 연결했다. 


 이찌 되었던 제한적이기는
 했어도 이중방송 실시로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우리말
방송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고 할 수 있다.


6. 전쟁기의 방송


1937년 중일전쟁이 일
어나고 2차 대전이 가까워지면서
 방송을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도구로
 활용 해 가면서 이때까지 그런대로 활기를
 띠던 연예오락, 어린이 방송까지도 차츰
위축되었고 가수나 배우도 전쟁목적
수행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1938년, 국민정신
 총동원령을 공포하고 인력과
물자 등 모든 것을 통제하는 소위
조선 육군 지원병 령을 공포 그 취지를
방송에 적극 반영하도록 강요했다.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2방송 채널에 일본어를
 섞어 방송 하도록 강요 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방송국을 물러난 분이 그때의
제 2방송 책임을 맡았던 제 2방송과장 심
우섭이었다. 심우섭은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의
 큰 형님이고 심훈도 방송국에 근무한 적이 있다.
 그런대로 활기를   띠었던 연예오락 방송도 일본어 
상용과 황국신민화를  내세워 일본의 浪花節曲調를
(주: 일본고유의 노래 '나나와부시' )흉내낸 가요
야담 등을 방송토록 하고    우리 고전음악인
창과 민요와 대중의 인기를 모아 가던
유행가 등을 규제했다.


가수나 배우가 전쟁목적
수행에 동원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그만둔 가수도 있었고 마지못해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뒷날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때의 방송 프로그램은
소위 국민정신 진작운동에 맞추어 특별 강좌를
수시로 방송하도록 하고 이른바 銃後미담을
주간정보시간에 방송 하도록 했으며 방송극
(드라마) 역시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춰
 나가도록 강요해서 전쟁목적수행
이나 식민지정책 강화를 위해
혈안이 되었다.


성인 프로그램은 물론
어린이 프로그램 까지도 그렇게
몰고 갔다. 1940년 8월부터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한글 혼용 신문은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만이 존재했다.
 외국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는 단파수신기는 모두
 몰수 되었다.


방송편성과 내용은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것으로
바뀌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총독부의
 검열은 강화되고 일본에서 오는 방송이나
통신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방송해야만 했으며
 방송연사를 억지로 끌어내어 총독부에서 직접
작성한 원고를 연사들의 입만 빌려 방송하는가
 하면 가수 등 예술가들에게는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이 강요되었다.


이에 응하지 않으려고
 활동을 중지하거나 만주 등
일본의 손길이 덜 닿는 곳으로 가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방송편성은
 형식상으로는 방송국에서 했어도 내용이나
연사동원은 총독부나 경기도 경찰부가 담당
하다시피 해서 일본이 필요로 하는 방송만을
 했고 원고의 사전 검열이나 또 방송을 듣다가
다른 내용이 나갈 때중단시키기도 했다.
생방송을 듣고 있다가  어느    때던지
중단 시킬 수 있는 기계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사람은 큰 고역이었다. 여러 이유를
 대면서 방송국에 나오지 않으려고 해도
 그리 쉽게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명망 있는
람일수록 방송국에 더 끌려 나와야 하고 나오면
자기 뜻과는 다른 내용의 방송을 해야 되니, 끌려
나와 민족을    배반하는 방송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할 때    그 고통이란 이루 해아 릴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분들에 대한 친일논란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6. 전쟁 중의 방송체제와 전파관제


1941년 12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일본군의 힘이 미치는
모든 지역안의 방송국을   "大본營"산하에
예속시켜 버렸다. (한국방송협회 발행 1997년 판
 한국방송 70년사) 일본 NHK가 전파관제를 사전에
 준비 했다가  진주만 침공과 함께 실행에 들어갔고
 우리나라 방송에 대해서도 1942년 4월 27일부터
 전파관제에 들어가면서     출력을 50Kw방송은
5Kw로 10Kw방송은 1Kw로 출력을 의도
하는 대로 낮춤과 동시에     모든 
방송국이 동일주파수를 썼다.


이에 따라 우리말 방송은
다시 제2방송의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방송을 들을 수
없는 사각지대가 늘어났다. 1943년 11월 10일
 중단되었던 제2방송을 다시 부활했지만 1080Khz
단일 주파수로 방송했고 1944년 3월 30일부터는
전국을 주야간 동일 주파수 관제로 강화 했다가
1945년 2월 11일부터 전파관제 管區 변경에
따라 종전의 4군제를 6군제로 바꾸면서
 제2방송의 전파발사는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이 전파관제를
실시한 주된 목적은 전파를 따라
연합군의 공습이 이루어지는 것을 예방
하고 외부의 방송을 차단하는 등의 군사적
 목적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파를 막기
 위해 서울시내 세 곳에서 방해전파를 발사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우리말 방송인
 제2방송 채널은 중단되고 더부살이로 우리말
 방송을 이어가야만 했고 편성은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1943년 하반기부터 방송국
언덕에 땅굴을 파고비상방송시설을
 만들거나 시내 요소에 비상시설을 갖추어
  방송국 연주소나 연희송신소에서 방송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했다.    위 사진에 보는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계단에 만든 비상방송국 시설로 2평
 규모의 스튜디오 1개와 한 평 규모의 스튜디오
 2개를   만드는 등    방송 시설을 갖추었다.
 이 시설을 경성방송국이라고소개된 글을
본적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7. ‘항일단파방송연락운동’


1942년에 일어난 것이
오늘날 ‘항일단파방송연락운동’
이라고 불리는 단파 수신사건! 방송인들은
 멀리 미국, 중국 등지에서 들려오는 자유의 소리를
듣고 독립 운동가들에 전해주어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렸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다. 이 일로 방송인들을
비롯해서 독립운동가, 전직 언론인, 라디오 가게, 부속품
 가게에 이르기까지 350여명이 채포되어 갖가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았고 70여명이
 형 언도를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6명의 옥사자를
내기도 했다. 그때 그 일을 기리고 선열들의
뜻을 기리는 물망비가 KBS 서 현관
 1층 옥상에 있다.
 
 



김무생(아나운서) 선생님 글


역시 "춘하추동 방송" 의
<한국 방송 90년 역사 →JODK 경성
방송국 편 >을 통해서우리 대한민국의
 방송의 역사와 문화, 거기다 당대의 우리의
 삶의 모습까지도이렇게 한 눈에 그 핵심
 내용들을 만날 수 있어서 퍽 다행이자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2017년 2월 16일이

한국방송 90년이 되는 날이니 우리
대한민국 방송을 향해 → 여러분!  힘차고도
당당한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정식으로 방송을 시작한 그 옛날 1927년
 2월 16일 → 그로부터   90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
국민과   함께 한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의 방송이
 있기까지 그 역사의  둥지를 틀어오신 우리의
방송 선배님     여러분의   그 노고와
 장인정신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당시에 우리 문화와 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던   제 2방송의 얘기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우리말 방송의 몸부림

이었다는 점에서  참 숙연해지기도 합니다.이어지는
"전쟁기의 방송" 과  제가 작년(2016년) 9월에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던 이장춘 선배님을 중심으로 방송 선후배
여러분이 함께 해 거행된 "항일 단파 방송 연락운동"  등의
살아있는 우리 방송의 역사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그 숨결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 옛날 방송이 막 태동하면서

 라디오 수신기 값이    쌀 50가마니
100가마니였다는 사실이   지금의 우리
방송의 소중함 고귀함과 더불어서 방송역사의
 90년을  한결 더 실감나게 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방송 선배님 여러분의 노고에 고마움의
박수를

 보냅니다.더불어 90살 대한민국 방송에 힘찬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 소중한 방송 얘기의 창문을 항상 열어 주시는 
이장춘 선배님 고맙습니다.    <춘하추동 방송>가족
여러분과 이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 복 많이
 받으세요.건강과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무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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