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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KZ TV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국 KORCADTV

이장춘 2016. 11. 16. 09:42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B24AwSEzjB4



1956년 5월 12일! 우리나라 TV방송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최초의 TV방송은

 민영·상업방송으로 시작되었다.  HLKZ TV 또는

 KORCAD-TV라고 부르던 그 TV방송국은 1961년 12월

 31일 개국한 KBS TV보다도 5년 반이 앞선 것이었고 세계

에서 15번째 아세아에서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네 번째 TV 

방송국이었다.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화재로

방송사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재기할 길이 없어 5년 여를

연명하던 이 방송국은 KBS TV 개국을 서두르면서 1961년

10월 완전히 문을 닫았다. 지금의  KBS 1TV 채널 9는

 HLKZ에서 물려받은 것이고 거기서 일하던

분들은 KBS 개국에 주축이 되었다.



HLKZ TV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국 KORCADTV


텔리비젼 탄생의 주역은 JODK

경성방송국에서 일하다가 1943년 항일단파

방송연락운동으로 방송을 뒤로했던 황태영이다.

황태영이 처음 새운 우리나라  최초 TV방송국은 서울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에 있던   동일빌딩에서 HLKZ TV

텔레비전 방송 막이 올랐다. 쉬운 말로 종로TV라고도 부른다.

100W출력에 호출부호 HLKZ, 채널은 9였다. 미국 RCA사와 함께 한

방송국이어서 처음의 방송국 이름은 RCA를 넣어 KORCAD-TV라고

 했다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1957년 5월 7일 사주가 바뀌고 경영권

한국일보사  (사장 장기영)로  이양되면서 사명도 대한방송

식회사로 개편되어 그 영문자 명칭 DBC-TV로 바뀌었다.



HLKZ TV 설립경위



천재기술자 황태영이 1935년

 21살의 젊은 나이로 경성방송국 기술자가

 되어 최고의 기술력을 발휘   동양 최대의 출력

 50 키로 와트 송신시설을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는   경성방송국 개국때 힘을 기울인

한덕봉에 이어 방송기술 제2인자가 되었다. 최초의 지역방송국

 기술과장이 되어 이리방송국에 근무했지만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

으로 벙송국을 물러나 사업가로 변신해서 RCA 대리점을 경영했다.

그 황태영이 1954년 정부로부터 전쟁으로 파괴된 KBS시설을

복구할 기자재구입 알선 의뢰를 받고 방송장비 발주를

위해 미국 RCA를 방문해서 TV수상기 200대와

시설자재 15만 달러어치의 구매계약을

 채결하게 되었다.





RCA가 구매 커미션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자 여기서

어려움이 생겨 협상을 하던 황태영이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동전을 넣고 TV를 보는 모습을

  목격하고 여기서   TV방송국 설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황태영은 커미션을 담보로 방송장비를 외상으로 받아서

 방송국을 설치하겠다는 것을 RCA에게 제안해서 이것이

성사되자 우리나라에 돌아와 방송국 설치를 위해 

 정부 관련부처에 허가서를 제출했다.


  그 어렵던 시절, 라디오방송도 KBS만이

존재하던 시절에 어려움에 부딪혔다. 고심하던

 황태영은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는 갈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영어로 문서를 작성,   경무대에 제출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 제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황태영 

RCA와 합작으로 TV방송국을 설치하기로 해서 1955년

 기초 조사를 하고 1956년 40만 달러어치의 기자재를

들여다가 방송국을 시설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 TV방송 HLKZ였다.


달라사정이 극도로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황태영의 끈질긴 노력과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 RCA측의 TV판매

 욕구가 맞아 떨어져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5번째로, 아세아에서는 필리핀과 일본,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TV방송을

 실시한 나라가 된 것이다.



방송국 설치와 건물






위 사진은 최초의 TV방송을 실시한

건물과 보신각이 함께 한 사진이다.  서울

 종로 2가 지금의 보신각 자리에  있던 동일빌딩 4층

건물의 3층 일부에 30평 정도의 스튜디오와 자그마한 사무실을

 차리고 옥상에 안테나를 새워 100w 출력으로 방송을 했다. 이 건물은

1924년 한일은행 사옥으로 세워 건축사적 의미를 지닌 건물이었다.

 1943년 한일은행이 조흥은행에 합병 되면서 조흥은행에서 사용하다가

 6.25때 심히 훼손되어 지붕의 돔은    사리진체로 수리해서 RCA

대리점을 했고  RCA 지사장이던   황태영이 TV방송국을

실시하면서 HLKZ-TV가 되었다. 1959년 이 건물은

 불타고 뒤에 보신각을 확장 하면서 보신각의

 마당으로 흡수되었다.





HLKZ-TV 방송인



사장 황태영은 KBS 아나운서

서명석을 방송부장,  KBS 엔지니어로

 근무했던 신광우를 기술부장으로 또 공승규

아나운서 등을 영입하고, 신입사원을 공개모집

해서 선발된 육군정훈 장교 대위로 군 방송실장을

지낸 최창봉에게 연출과장의 직책을 부여해서

프로그램 편성과 제작책임을 맡겼다.





사회보는 서명석 아나운서


최창봉 신광우 설립주역


위진록 최창숙


김봉구 우리나라 최초의 TV공채 아나운서



이때 최창봉과 함께 공개 채용된

아나운서 김봉구는 취재와 아나운서 일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방송국이 문을 닫고 KBS에

흡수될 때까지 근무하다가 KBS 프리랜서로 일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방송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전개

했다. 1947년의 서명석 아나운서와 KBS 동기아나운서

위진록은 부인 최창숙의 출산 휴가로 6개월간 국내에

와 있던 중 도움을 주었고    부인 최창숙은 이

방송사의 아나운서로 근무한 적이 있다.


유명한 음악평론가 황문평이

음악과장으로 재직했고 최덕수, 이기하,

황운진, 이평재, 유인목, 허규, 장종선, 정일몽,

김유성, 홍의연, 진영희 등이 재직했다. 오승룡, 황영수

(황태영의 동생) 도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마종훈,

 신면식 등은 카메라를 담당했다.



HLKZ-TV 출연진



이때 인기절정이던 손석우가 악단장으로

 활약했으며 노능걸도 자주 드나들었다. HLKZ에서

 출연한 탈랜트로는 복혜숙, 천선녀, 장민호, 옥경희, 백성희

등이었다.  학생 극 회원으로 여운계, 김성옥, 오현경, 김영옥,

안평선, 김순철이 활동 하기시작 했고 코메디는 김희갑, 구봉서,

 서영춘등이 출연 했다.     우리가 살던 지난시대에 익히 보아

오던 탤런트는     HLKZ시절부터    활동 하던 분들이고

KBS-TV로 이어지면서 활동무대를 넓혀간 것이다.



HLKZ-TV 개국방송



HLKZ-TV개국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최창봉님의 글을 인용한다. 



“그해 3월에 공개 채용된 텔레비전

요원들에게 6월의 방송 개시를 앞두고 5월

 12일부터 3일간의 시험방송준비 지시가 하달된 것은

요원들이 정시출근을 시작한 5월 1일이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어볼 시간 여유는 실로 11일간 이었다. KORCAD

  공동 사주이던 밀러씨와 황태영씨가 필자에게 들려준 몇 권의

전문서를 유일한 안내자로 시설공사가 한창이던 스튜디오와 사무실에서

 연일 합숙하며 준비 끝에 맞이한 5월 12일의 시험방송은 실로 정식 개국식을

겸한 역사적인 공식방송이었다.     민의원의장 이기붕, 공보실장 갈홍기,

체신부장관 이응준, 서울특별시장 김태선 등 집권당 귀빈들이 유달리

많이 참석한 가운데 명아나운서 서명석의 사회로 진행된 개국 식에

 이어 방송된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성경린씨가

 지휘한 萬波停息之曲과 壽齊天의아악연주였다.






이어서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박시춘

 지휘의 경음악 연주, 가수 원방현, 백설희, 현인,

장세정 등의 가요로 구성된 바라이어티 쇼, 영화등

으로 오후 7시 30분부터 방송 끝나는 9시30분

까지 2시간동안 진행됐다.”


이상은 HLKZ-TV 개국당시의

 편성 제작책임을 맡았던  최창봉 글에서

 인용했고 다음은 그 당시 광고 제작에 임했던

최덕수님의 2001년에 발행된 .한국의

방송인. 책에서 기술한 내용이다.





영창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종각 옆의

KORCAD-TV의 고 황태영 사장은 영창의 김사장과

중학 동창인데 TV를 개국하게 됐다며 유니버설 전속으로

맺고 있는 박시춘, 남인수, 백설희, 등을 개국 쇼에 출연시켜

줄 것을 의뢰했다.개국 초라 출연료는 주지 못하는 대신에

광고를 거저 하라는 교환조건이었고 영창이 출연료를

부담해서 백년설,현인, 명국환, 신 카나리아,

백설희, 권혜경,원방현 등이 등장하는

 특집쇼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6년 5월 12일 저녁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방송이자 텔레비전방송인 KORCAD AM, FM,

TV의 HLKZ-TV개국특집 제 2부는 유니버설 레코드 아워가

방송됐다. 이것은 영창의 김 지배인이 구성했고 나는 깨지지

않은 유니버설 레코드라는 광고를 제작해 주었다.   이래서

유니버설 레코드사는 우리나라 상업방송이자 TV방송사상

최초의 광고주이고 이때의 광고도 최초의

 광고가 되는 셈이다.



생방송으로 이루어진 광고 스라이드



HLKZ-TV 정규방송 실시



HLKZ-TV가 정규방송에 들어 간

것은 6월부터로 처음에는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격일제로 정규방송을 실시했고  11월

부터는 매일 방송을 실시하면서 시청자들에게

TV방송의 신비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방송국 경영은 순탄치를

않았다. 우선 수상기의 보급이 너무 적었다.

 처음에 방송을 시작 할 때 국내에 들어온 수상기는

 수백 대에 불과했고 일반 수상기 한 대 값이 썰 20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쌌고 달러를 쓰기 위해서는 금액의

 많고 적고를 떠나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엄청

나게  어려운 외화사정에 따른 수입이 제한되어   보급도 지지부진한

가운데 가두에 설치된 TV시청을 겨냥한 광고료가 다소 있었어도 어려움

 따랐다. 처음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을 안고 출발한 상황에서 갈수록

누적된 적자를 감당 할 길이 없어 설립자 황태영은 개국 1년만에

 1957년 5월 7일 동양맥주 (사주 박두병)와 화신(사주 박흥식)이

 인수하고 경영은 당시 경영의 귀재로 유명한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이 맡으면서 사명도 DBC (대한

방송)으로 바꾸어 방송했다.




한국일보사(사장 장기영) 경영권 인수



장기영 사장



운영권을 인수한 한국일보사는

1957년 5월 6일을 기해 대한방송주식회사

(DBC)로 새로 출발 했다. 1년 간에 걸쳐 수상기가

3,000대로 늘어났어도 어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시절

힘을 쓰던 한국일보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방송이 유지

될 수 있었다. 한국일보사와 공조가 이루어지고 인력이 투입

되었다. 보도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문제안 기자가  DBC TV기자로

 활동하면서 동서 냉전시대이던 1958년 독일 배르린에서 판문점

까지 5만 Km를 자동차로 주행하면서 취재활동을 하는 등

 바람을 일으키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위 사진은 문제안기자가 5만 Km

자동차 여정을 마치고 판문점에 돌아

오던 때 환영나온 장기영사장 등의 모습이고

아래는 이승만대통령과 인터뷰하는

 문제안 기자의 모습이다.






위 사진은 중앙청 뜰에 가설된

공개방송 무대 (1958.4.18)다.   DBC로

발족 하면서 행사나 스포츠 실황중계방송도 하고

뉴스도 하루에 자체 취재 2회와 한국일보사 제공 1회를

 편성했으며 각료들도 방송에 출연 했다.    뉴스, 교양,

연예 오락등 제반 프로그램이 형태를 갖추어갔다.

퀴즈나 노래자랑, 주부시간등프로그램의

다양성도 유지 해 나갔다.





누가 먼저 맞추나의 열딴 장면


10만환 퀴즈 프로그램




미국의 상업 텔레비전 패턴의 

 충실한 편성으로   1년간의 방송시간은

 93.6시간이었고 1년간 출연한  인원은 모두

만 7천 5백 명이었다. 58년 3월 8일 종로 보신각 앞

광장에 옥외 스튜디오를 가설 하고 승마 법을 방영 했는가

 하면  3월16일에는 10만환 퀴즈라는 프로그램도 선을 보였다.

DBC로 새로 발족하면서 자리가 잡혀 가는 듯 했을 때 1959년 2월

2일 화재를 만나 방송국이 모두 불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TV방송을 이어가려는 직원들의 노력은 대단 했지만 어려운 경영에

 화재까지 당한 경영진으로서는 소극적인 태도로 방송국 재건에

어려움이 있어 결국 AFKN과 USIS의 도움을 받아 AFKN

채널을 이용 화재 1개월 뒤인 3월 1일부터 저녁

7시부터 30분간씩 방송을 할 수 있었다.

 


  


HLKZ-TV와 AFKN



1957년 4월 15일부터 문을 연

AFKN은 어려운 상황을 다소라도 타개

해주었다. 여기서 다양한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도

 얻었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상기의 보급이

 빨라졌다. PX에서 TV수상기가 흘러나오자 그 수상기가

일반인에게 흘러 들어갔고 또 국내 수상기 값도 싸질 수

밖에 없어 수상기 보급이 빨라진 것이다. PX물건

보급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TV방송 발전에는 기여했다.





그러던 중 위에서 말한 화재를

 만나 AFKN시설을 활용 방송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위는 AFKN에서 빙송

하기로 하던 때의 사진으로 주한 미군방송 스튜디오

 방송시작 기념식장에서 최창봉 HLKZ-TV 방송부장

AFKN 라이니카 소령이 함께 한 사진과 출연진

들이 함께 한 사진을 올렸다.




AFKN에서 방송하던 때의 HLKZ-TV직원들의 모습



 다른 나라 국영 방송채널을 빌려

쓰면서 광고도 할 수 없고 다른 수입원도

기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간 방송을 실시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었다. HLKZ-TV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으며 최창봉은 방송문화

연구실장을 거쳐 MBC 창설요원으로 갔다가 KBS-TV를

 건설하게 됨에 따라 개국책임을 맡아 HLKZ-TV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들과 함께 KBS-TV개국에 힘을

기울였고 HLKZ-TV에서 쓰던 채널 9는

 KBS TV    채널이 되었다.



HLKZ-TV 역사적 의미



HLKZ-TV는 불행히도 방송국은

 단명으로 끝났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으로  방송사에 기록되고 또 KBS도

이 방송사에서 훈련받은 TV방송 제작진이 있었기에

빠른 기간 내에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는 어찌보면

KBS TV탄생의 주역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황태영, 최창봉 등 그 이름 역시

이 방송과 함께 이 나라 방송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가

 아세아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지만 그때에는

 6.25가 할퀴고 간 상처도 미처 아물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따라서

 TV수상기를 갖은 사람들도 없었는데 TV방송 실시는

  의외로 받아 들여 지던 그 시대에 탄생해서

어려움을 겪다가 간 방송국이었다.



HLKZ-TV와 방우회



방송인들의 총 집합체로 방송사료

 보존을 위해 힘을 기울여 온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방우회)는 그때 그 모습을

사진으로 보존하기 위해 1986년 눈으로 보는 TV방송

30년 사진첩을 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그때 그

사진첩은 비매품, 한정판으로 발간되어 쉽게 보기가

 어렵다. 춘하추동방송에서 모을 수 있는 사진과

자료를 모으고   TV방송 30년 사진첩에

있는 귀한 사진을 골라 올린다.

 


개국 첫날의 시사회 장면으로

KBS에서 옮겨 간 서명석 아나운서

당시 국제 報道聯盟 이사장

송정훈과의 대담 장면


최초의 TV드라마 : 홀- 워씨홀 작 최창봉연출 "사형수"

왼쪽부터 오사랑, 최상현, 김경곽, (1956년 9월) 최상현님은

KBS공사 발족 후에 TV제작부장 등을 역임했음


1957년 9월 최창봉이 미국 보스턴 대학으로

연수차 때날 때 환송사진. 황태영 (왼쪽에서

두번째) 죄창봉 (오른쪽에서 세번째 )



1939년 사진으로 맨 오른쪽 앞줄 두 번째 분이 황태영


HLKZ-TV가 있던 동일 빌딩으로 창설자 황태영은

방우회 회원으로 활 동하다가 세상을 뜨셨다. 


.

HLKZ-TV OB쇼에 출연한 여덟살 때의 윤복희


HLKZ-TV어린이 노래회


우리나라 최초의 TV카메라 마종훈


HLKZ-TV 카메라가 종로네거리에서 촬영하는 장면

1957년 3.1절 최초 TV중계방송


AFKN어린이 방송극 출연진이고 젊은 시절의 이낙훈이 보인다.



위 사진은 출판기념회때 촬영한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강찬선, 김명희, 김창구, 김기호,

 이상만, 두사람건너 한사람건너 신상운, 한사람건너

방흥안, 뒷줄 오른쪽 두 번째 조돈준



-1957년 5월 HLKZ 레스링 중계-


TV다큐멘타리 편집장면 (1957년)



AFKN에서 방송하던 시절의 드라마 제작진,

번호따라    1. PD 최덕수,   3. 디렉터 아린슨,

4. 탤런트 김선희, 6, 탤런트 김기성, 7. 탤런트 

김기창(후에 KBS 카메라부장), 8. 조찬길,

9. 탤런트 김복희 10. 탤런트 최진하 


HLKZ-TV노래자랑 입상자 기념사진

-1956년 PD, 황문평, 아나운서, 최희태 성악가

김상두씨가 뒷줄에 보인다.-


HLKZ-TV 노래자랑

-노명석씨의 아코디언이 돋 보였다-


 

HLKZ-TV 개국 초기의 방송주역들

-좌로부터 신광우, 황영수, 황문평-


HLKZ-TV 학생 음악콩쿨 입상자 기념

-1957년 피아노 복진태, 심사 김상두 황문평, 사회 최희태


HLKZ, 1957년 연말특집 좌로부터 이수열,

한사람건너 황문평, 한사람 건너 민병욱, 홍이연


한동일 피아니스트 귀국공연 앞선 좌담 (1958년)


TV쇼 윤부길씨의 원맨 쑈 (1957년)-윤복희 아버지 


공개방송 1958년 4월 17일 미 8군 음악대 출연


해병 군악대 연주(1958년)


미술담당 민병욱 뒤에 AFKN에서도 미술 담당했음



탤런트 김영옥(깅영길 아나운서 남편) 방송사료사진

생방송시절 김영옥님 출연

 

 

 

 

 

 


김봉구 아나운서 방송사료






















이정부 아나운서



68년에 입사한 저희들 보다 12년이나

 더 앞선, 전쟁을 막 끝낸 1950년대 후반...

여명기의 TV방송을 개척해오신 선배님들의 숨결과

열정과 발자국 소리가 귓전에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마치 저희들의 뿌리도      더욱 깊은곳에 박혀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더러는 빛이 바랜 영상도 있었지만 옷깃을 여미고

 한장 한장 참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긍지를 느끼며, 한국 최초의

TV방송 HLKZ의 역사를 훑어보았습니다. 희귀하고 소중한

 사료를 힘들게 발굴, 정리, 게재해주신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국장님의 집념과 역량,    그 노고에

 찬탄과 함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최덕수 선생님



 춘하추동방송 이상춘 선생님

 

 메일 감사히 받았습니다.

방송의 역사를 정리 기록하시느라고

수고와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보내주시는

 메일은 즉시 읽고 보관하고있습니다. 이상춘

선생님과 가족이 건강하시고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최덕수 올림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우리나라 TV방송 창시자 황태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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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방송 창시자 황태영님의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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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방송인 최창봉님과 방송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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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역사 살아있는 전설, 최창봉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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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수 선생님이 말하는 최초의 TV방송 HLKZ와 방송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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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구 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HLK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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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서명석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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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서명석님 (2)


AFKN (미군방송)과 한국 TV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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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TV방송국 HLKZ사옥에 얽힌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