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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역사 3. 이장춘과 한국방송공사 KBS

이장춘 2016. 5. 24. 19:42

 


5차례에 걸쳐 연재되고 있는

춘하추동방송역사와 이장춘!   오늘은

그 세 번째로 KBS 한국방송공사 창립시의 새로운

 제도확립으로 부터 시작되어 공사 수입, 지출 등의 경영과,

디지털 전산정보 시스템의 구축 등 KBS와 함께 한 얘기다.  

 인하대학교 김동식 교수와 대담으로 KBS가 발행한 2015년

 12월 30일 공영방송 책에 실려 있다. 사진은 책  '공영

방송'에서 복사한 사진과 춘하추동방송이

보유한 사진을 활용했다.





춘하추동방송역사 3. 이장춘과 한국방송공사 KBS

 방송망 체계화부터 디지털 시스템까지



김동식 :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서울중앙방송, 서울국제방송, 서울TV

방송이 1968년에 중앙방송국으로 통합됩니다.

혹시,    방송국 통합 이후 1960년대 말부터

방송공사 창립 움직임이 있었지요.


이장춘 : 그렇지는 않았어요.

민방이 생기면서 그쪽 봉급이 좋으니까

방송국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어요. 방송국

에서는 수당을 주면서 사람들을 잡으려 했지요. 

1960년대 말에 주사 봉급이    2만 5천원인데,

1만 5천원을 수당으로 줬으니 아주 쎘죠.


방송공사 움직임은 1970년대

윤주영 장관이 들어서면서부터였어요.

기자회견과 국무회의에서 공사 전환 계획을

 밝힌 적도 있고. 윤주영 장관은 고려대 동기인

최창봉 씨를 중앙방송국장으로, 노정팔

씨를 관리국장으로 선임합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윤주영장관의 건의에 따라 박 대통령이

 밀어붙였고,   그 해 12월 30일 방송공사

 공포되었습니다. 공사가 되면서 새로운 직제에 따라

 기획관리실 관리부 차장이 되었는데 당시 제 나이가

 33살이었으니 최연소 차장이었지요. 40대 전후

사원들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40대 중반의

사원이 차장을 할 때였으니까.


김동식 : 공사 창립 전까지는 중앙

방송과 지역방송이 이원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국영방송시절

공보처,   공보실,   공보부,  문화공보부의

 장관이 방송국의 최고 책임자였지요. 


이장춘 : 문화공보부 장관

보좌하는 방송관리국장의 행정지휘를

 받았어요.  공사가 되고 일원화를 위해서는

 시스템과 법제화 등 할 일이 많았습니다. 지역방송도

도(道) 단위로 체계화시켜야 했고. 당시에는 다른 지역의

방송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충북에서

그 지역의 방송을 못 듣고  충남의 방송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

지요. 충남 옥천에 충북의 대전 뉴스가 나오는 식이었죠.(이 부부은

자역이 바뀌었는데 수정이 않되었음)  방송 채널과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인데요. 애를 먹기는 했지만, 그 지방에서 그 지방의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조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일흔 다섯이 된

지금까지 몸무게가 61kg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1973년 공사 창립을

전후로 해서 사내 조직과 규정을 만드는

 밤, 낮없이 일을 했던때 53kg까지 빠진 적이 있습

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 만든 사규집(社規集) 원본

이 지금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표지가 새까맣고

한자(漢子)가 가득한 문서였는데…….


김동식 : 혹시 공사 창립 당시의

 자료를 가지고 계신지요.


이장춘 : 저쪽 방에 그 동안

 제가 사용한 비망록을 모아두었어요.

 어디 한번 가 봅시다.   (방을 옮겨 30여

권에 달하는    비망록과 자료철을 살펴봄.)

여기저기 막 써놓아서 잘 모르겠네. 내 글씨가

공개되면  ‘이장춘이 글씨가   저 모양

이구나’ 할 텐데. (웃음)


김동식 : (비망록에 첨부된 

문서를 보면서)     이 서류는 유신

 시대에 새마을 방송 목표나 관련 사항을

명기한 공식 문서인가 봅니다. 

 

이장춘 : 그 자료철이 언제 건가요?


김동식 : 1974년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장춘 : 아! 내가 관리부 차장

할 때 메모해 놓은 거네. 그런데

 문서를 붙여 놓은 건 몰랐네. 워낙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는 거라.





김동식 : 이건 아까 말씀

하신 전국 방송망 체계화와

관련된 문서인 건 같네요. 

 

이장춘 : 맞습니다.

방송망 관련 보고서에

내가 첨부한 거죠.


김동식 : 하나하나가 KBS의

 그 시절 현황은 물론이고 당시 우리나라

방송 현실을 증언하는 자료들입니다. 1990년의

이른바 ‘KBS 사태’라고 해야 하나요? 방송 민주화

시기에 직접 경험하신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블로그 포스팅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장춘 : 꼭 정리해봐야겠다. 

 생각했거든요. 그 시기에 관해 학자들이

 쓴 글도 봤는데, 아무래도 현장 경험한 사람하고는

 뉘앙스가 다르거든요. 강조하고 싶은 건 이거에요. 방송

민주화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방송이 돼서 국민의 힘이 뒷받침

되어야 온전하게 가능하다.    좋은 프로그램으로 사랑 받아야 하고,

또 경영에서도 국민의 박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방송 운영과 인사가

 어떤 특정 세력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국민의 뜻에 따르는 기반이 서야

한다. 공정방송을 이어가야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데

 기여해야 한다. 역사의식을 담아야 한다. 국민과 함께하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 너무 거창했나요?(웃음)


김동식 : 방송 경영 분야에서도

다양한 경험을 쌓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장춘 : 관재국장할 때였어요.

당시 현금 부채가 1천억 원 정도나 됐어요.

깜짝 놀랐지. 일종의 비밀이었어요. 1994년부터

1년간 관제국장 하다가 업무국장을 했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제주 국장으로 있다가 다시 관제국장을 했지요.

처음 관재국장을 할 당시    홍두표 사장이 현금 부채가 1천억 원

넘으면 큰일 난다고, 어떻게든 줄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

하지만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는데 마른 수건 짜듯이 한다고 해서

 당장 부채를 줄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더구나 시청료

거부 운동의 여파로 수신료 수입 여건도 불리했고. 그때

홍두표사장이 저에게 업무국장을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두가지 과제를 주었습니다.


첫재는 시청료징수를 한전에 위탁

했는데 시청료 거부에 익숙해진 분들이

 수상기 등록을 기피하는 경향이 농후하니 TV를

갖은 모든 국민들이 TV시청료를 낼 수 있도록 하고

둘재는 민영방송의 70%를 받고 있는 광고요율을 민방과

같은 수순으로 만들어라는 거였어요. 시청료 부문은 제가

전문이니까 자신 있었고 광고가 문제였는데 이 분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광고주들도 만나러 다니고

 광고주협회 상임이사도 만났어요.


마침 상임이사가 방송국 동기인거라.

 “나 좀 도와달라”고 했지요. 그 말이 통했는지

7개월 정도 지나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어서

 시청료와 광고료가 정상으로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해 공사

결산서에는    공사 발족이래 최대의 흑자를 낸 것으로 되고

관재국장시절의 현금부채 1,000억도 모두 상환했으며 그로

부터 10년간은 공사의 재정이 튼튼했습니다.  수신료와 

광고의 정상화로  부채 문제를 푸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생각하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김동식 : 전산정보실장도 지내셨는

데요. 홍두표 사장 시절인가요?


이장춘 : 서기원사장과

 홍두표 사장 시절이지요. 1990년대

 초반에 연세대학교에서 1년간 대학원 코스

 공부를 했어요.   방송국에서 일하는 대신 학교에서

공부를 한 것이지요.     졸업하면서 논문을 써야하는데

의욕이 생기더라고. 1990년에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

출간됐는데, 내가 그 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지식이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 곧 지식사회로 바뀐다는 통찰인데, ‘야, 이거

대단하구나. 우리가 21세기를 준비하려면 뭘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 뉴미디어를

주제로 해서 원고지 6백 매 분량의 논문을 썼어요.


나중에 전산정보실장이 됐을 때,

비록 내가 컴퓨터는 잘 모르지만 시대의

변화 흐름을 좀 안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지.     바야흐로 시대의 방향은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야 하는데, 관행이나

사고방식이나 제도는 여전히 아날로그에 젖어 있었단 말이죠.

KBS나 방송 분야만의 흐름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빠르게 바뀌어가는 전환기였던 겁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KBS 전산정보실은 보조 역할에 머물러 있었어요. 급여

시스템 만들어라 하면 만들어주고, 뭐 이런

식이었으니까. 내 생각은 달랐어요.


앞으로는 전산정보실이 앞장

서서 이끌어가야 한다는 걸 직원들에게

주지시켰어요.   전산정보실 직원들의 역량을

 집결해서 홍두표 사장에게 보고서를 냈지요.    KBS

방송 시스템을 전산정보 시스템으로 바꾸어 취재에서 편집, 

제작, 송출까지 일관시스탬으로 바꾸고, 전국 방송망을 연결하는

 전산 시쓰템을 구축하며 새로운 문서시스템도 구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KBS에 데이터뱅크를 만들어 앞으로 있을 전국의

테이터 뱅그와 연결하면 KBS가 정보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점도 강조되었습니다.


김동식 : 시기를 감안하면 무척

이나 큰 구상이었네요. 전산정보와

 관련된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장춘 : 당시 KBS에서 제일 좋은

컴퓨터가 이른바 386이었어요. 높은 사양의

컴퓨터 2천 대를 3년이내에 도입하고, 문서관리시스템․

보도시스템․데이터베이스 등을 새롭게 갖추고, 전산 관련

 인력을 매년 10명씩 확충해야 한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예산이 83억 원 정도가 필요하겠더라고.

홍두표사장이 물어요 예산이 얼마나 드느냐?

83억이라고 했더니 830억이 

아니고 83억이냐고요.


83억을 들여서 이 계획을 실현

하고 이 바탕 위에서 앞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시스템을 구축 해 나가면 된다고

했지요. 홍두표사장이 즉석에서 임원회의를 열어

 실천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계획안은 실천에 들어

갔는데 그러면서 이 일은 나 사장에게 기고 회사의

돈 관리가 중요하니 관재국장을 하라는거예요. 어쩔 수

없이 관재국장을 갔는데      그 얘기는 앞에서 했고

제가 구상한 전산정보시스템은 뒷날 보니 많이

후퇴했지만 그 골격은 유지되더군요.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인터뷰 한 것을 이렇게 글로 적으니
읽는 사람이 훨씬 편하게 읽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읽게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국장님
 블로그에 올리셨으니 남겨지는 것이여서, 방송 역사의
귀중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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