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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역사 4. 방송인들의 집단지성이 만들어 가는 한국방송의 역사

이장춘 2016. 5. 25. 13:39

 


방송역사의 기원을 알리는 사진 최초 방송인  노창성 이옥경의 딸 노라노 제공 






김동식 : 말씀을 듣고 있자니 선생님은

 ‘온라인 시대의 수집가이자 역사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료 수집이 역사가 되는 장면을 온라인 위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자료의 소재를 확인

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확인하다고 해도 그걸

입수하기는 더 어려운 일인데요. 자료를

입수하는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춘하추동방송역사 4.


방송인들의 집단지성이 만들어 가는 한국방송의 역사



이장춘 : 「춘하추동방송」이

제법 알려지고 난 다음부터는 자료에

관해서 인연이 잘 닿아요. 아무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 중요해요.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 선생과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 여사의 따님

이지요. 참, 1924년 12월 9일 노창성 선생이 경성방송국(JODK)

시험 방송을 하는 사진은 저한테 밖에 없어요. 여하튼, 이옥경 여사에

 관한 기록들이 가지각색이었어요.    내가 이걸 한 번 바로잡아 보겠다

싶어서 자료를 올리는데, 노라노 씨가 만나자고 하더군요. 마음껏 

해보시라 격려해주더군요. 예컨대 이옥경 여사가 초등학교 때 쓴

글씨까지 제가 받아왔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방문하게 됐고요.





김동식 :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신뢰의 네트워크가 구축된 셈이로군요. 쉼 없이

글을 올리고 네트워킹을 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장춘 : 그렇죠. 처음엔

 그저 제 경험을  담은 방송 이야기나 올려보자  시작했는데,

아마 저처럼 방송 이야기에 목마른 분들이   많았던  같아요.

하나둘 씩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주기 시작했으니까.

어떨 때는 과감하게 정공법으로 부탁드립니다. “다 내놓으십시오.

저 주십시오. 가져갔다가 반드시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킵니다.


일을 만든 다음에 원 자료는 반드시

돌려드립니다. 저에게 자료를 맡기면 「춘하

추동방송」에 어떻게 올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뢰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료를 보게 되니까, 또 그만큼

댓글 반응도 있으니까, 자료를 제공한 분이 무척 좋아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자료의 소중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분이라면, 자료를 요청하는 분에게 제공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다만 게시판 댓글로 “이거 하나 주세요”하는 식으로 무성의

하게 요청하는 경우는 빼고는 말이죠.(웃음) 제가 올린

글이나 자료에서 틀린 점이나 문제가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당부합니다.


렇게 해서 연락이 오면 그걸

반영시켜서 수정하는 거죠. 저 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알겠습니까. 각자 알고 있는

것들이 모이면서 오류도 수정되고 점점

더 정확도가 높아지는 거지. 


김동식 : 그런 의미에서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을 방송인들의 집단지성

(collective intelligence)의 산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초기 방송 관련 자료들 중에서

 제 연구주제와 통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제가

나중에 부탁을 드려도 될는지요.(웃음)


이장춘 : 말씀만 하세요.

학술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면야

저로서는 정말 좋지요. 자료 입수와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김영우라는 분이 있는데요. 1961년

MBC 개국아나운서로 들어왔다가 1963년미국으로 가서

1965년에 미국 하늘 아래서 처음으로 우리말 방송을 시작한

 분입니다. 저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고, 사실 저는 그 분

 성함도 못 들어봤거든요. 그   런데 작년 4월에 저한테

연락을 하셨어요.    “이 선생, 내가 갖고 있는

자료를 다 주겠소. 전부 다 부탁합니다.”

 정말로 자료를 다 보내주셨어요.





DVD에 담아가지고 말이지요.

현지에서 방송한 것에 관한 자료도 있고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촬영한 사진이나 동영상도

많이 보내오셨고요. 50년간 방송 한 걸 다 보내주셨으니

양이 엄청납니다. 자료라는 게 한 없이 늘어나도 결국 정리

해두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촬영하러 행사에 가면 300장 정도는

 찍습니다. 100장 찍으면 그중 건질만한 건 한 15장 정도나 될까요.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을 당신이 한다”는 둥 별 얘길    다 듣습니다.

뭐 어떤 얘기를 들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모은 자료들이 다 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한 거지.


김동식 : 그야말로 1인 미디어

또는 1인 방송국을 운영하고 계시는군요.

「춘하추동방송」을 보며   놀랐던 것이 방송과

관련된 과거 자료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

 있은 방송 관련 기사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방송역사의 지난날과

오늘날을 동시에 기록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장춘 :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제대로 찍어주지도 않을뿐더러 사진

보내기까지 일주일도 걸리고 한달도 걸리더라구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저는 방송 관련 행사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면 그날 당일로 올립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려요. 행사 동영상 올리는 작업 일정이 잡히면

다른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이장춘의 취재, 촬영현장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 죽고 나서   내가 보고 싶거든 이장춘의

‘춘하추동 방송국’에 들어가 봐라, 이렇게 유언장에

쓸 거다.”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을 때마다 책임감이나

사명감 같은 마음이 더 커져요.   자료를 그냥 올리는 법은

없습니다. 동영상에 관한 설정도 신경 써야 하고, 사진과

음악의 시간적․내용적인 조화도 유념해야 하니까요.

블로그에 한 편을 올리더라도 하루 안에

작업을 다 끝내기 어렵습니다. 


김동식 : 1인 미디어를 이 정도의

공력을 들여서 운영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데요. 참으로 대단하시다는 말씀 말고는

 달리 다른 말씀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장춘 : 후배들로부터 블로그

관리와 운영에 관해 도와달라는 연락이

가끔 와요. 성심껏 조언해주곤 합니다. 또는

자기 블로그의 글을   「춘하추동방송」에 올려

달라거나 광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 오기도

합니다.     「춘하추동방송」과 연결되면 자기의

블로그에 방문객이 늘어난다는 거죠.(웃음)


김동식 : 선생님 블로그가 허브(hub)가

된 셈이네요. 제가 보기에 「춘하추동방송」은

 온라인 방송박물관 역할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방송박물관에 대해 깊은 소신을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장춘 : 아끼는 후배로 박명규

PD가 있는데 수원 센터장이었어요. “선배님,

이제 됩니다!” 하더라고. 예산도 20억 원이 편성

됐다는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2000년대 중반에

KBS가 수백 억 원 적자가 났어요.  결국 예산이

 없던 게 되어버렸지. 우리나라 방송 역사

자료에는 큰 맥이 두 가지가 있어요.





유병은 선생이 모은 자료하고

장도형 선생이 모은 자료인데, 유병은

 선생이 모은 자료는 KBS에 이관되어 잘 정리가

 돼 있어요. 장도형 선생의 자료는 아직 공개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고. 내가 김인규 사장한테 방송

박물관을 설립하게 되면 ‘장도형관(館)’이나

 ‘장도형실(室)’을 만들라고 조언했어요.


그렇게 해야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방송 박물관이 다시 추진은

됐는데, 그만 여러 부서에서 자기 소관으로 여기고

나서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문을 모

르는 장도형 선생에게 갑자기   여러부서로부터  연락이

가니까,   선생이 언짢아했죠. 결례를 범한 셈이지. 한 5분

분량으로 장도형 선생 관련 방송이 나가기도 했는데, 처음엔

취재에도 응하지 않으려는 걸   내가 나서서 겨우 성사시켰

어요. 그 뒤론 방송박물관이 다시 흐지부지 됐지. 하지만

 박물관다운 방송박물관을 설립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누가 하겠습니까? 결국 KBS가 해야지.





김동식 : 「춘하추동방송」이

온라인에서 방송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방송박물관 건립은 언제라도 다시

진행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장춘 : 사실 제 블로그가 좀

산만해요. 분야별로 정리가 더 되어야

 하는데, 그때그때 관심 있는 주제에 푹 빠져드는

습관 때문에 그러질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체계성은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KBS 9시 뉴스를 담당

했던 앵커들의 역사처럼, 작고 단순한 것 같지만 제대로 고증이

안 된 주제들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해 왔어요. 힘닿는 범위

안에서 자료를 모으고 나름대로 정리를 해봤죠.





김동식 : 「춘하추동방송」에는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 시기,

정동․남산 시대, 민영방송과 지역방송 등

한국방송의 역사와 관련된 글과 자료가 배치

되어 있습니다. 제 전공이 한국근대문학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제강점기의 경성방송국과

 단파라디오 사건에 대한 글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장춘 : 저는 우리나라 방송의

역사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방송학자들 중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더군요.   하지만 조선방송협회가 됐든

 누가가 됐든,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하더라도 우리 땅에

세워진 것이고,   또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일했습니다. 더구나

 방송이 우리말을 지켰어요. 경성방송국 제2방송과(課)에서만큼은

우리말 방송이 허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방송이 유지되려면

 청취자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어 방송은 우리 땅에서 청취자를

 끌 수 없었고,    한국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방송국 운영이

 안 되니까.   처음엔 일본어와 우리말 비율이 약 75:25

정도였는데,   사람들이 듣지 않으니까 34:66으로

바꿨고, 그래도 잘 안 들으니까 일본어

방송을 섞는 걸 포기했죠.


요컨대 우리 땅에서 한국인

방송인들이 우리말로 방송하면서 우리

청취자들이 들었다는 겁니다. 우리 방송이

아니라고 할 순 없잖아요.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이뤄진 모든 걸 일본 역사에

넘겨줘야 합니까? 아니지요.


김동식 : 어느 분야든 근대적 기원,

출발에 관한 문제에서 아직까지 이견이

 제법 분분한 게 현실입니다. 선생님, 평생을

방송국에서 일하셨는데요. 돌이켜볼 때 후회나

 회한이 남아있는 일은 없으셨는지요. 1980년

대에 접어들면서     방송 통폐합이 있었고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 민주화와

관련된 진통이 있었으니까요. 


이장춘 : 후회는 없어요. 제가

 어렸을 때 고향 마을 근처에 빨치산이

출몰했거든요.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그런 곳이었죠. 빨치산 토벌하러 온 전투

경찰들이 근처에 주둔했는데, 그 사람들 밥 먹는

임시 식당이 있었어요. 비가 오면 그 식당에서

수업을 했죠. 공부가 제대로 됐겠어요? 뭐

 그 땐 다 그랬으니까.


제가 솔직히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제가

 별다른 인맥이나 연줄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일하면서 제법 고집도 부리는 스타일입니다. 맡은

 업무가 뭐든 성실하게 임하는 것만이 제가 기댈 곳이었어요.

 열심히 하는 모습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저를

잘 봐주셨어요.    물론 중간퇴직 위기도 있었습니다.  제 부하 직원

한 사람이 꽤 큰돈을 먹었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어요.  관리감독 책임을

 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저에 대한 파면 징계가 논의됐지만,         당시

 징계위원회 위원장이 장기범 선생이  “만약에 이장춘이가 이번

일로 파면되면 여기 파면될 사람들 줄줄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덕분에 살아남았지요.





그래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방송통폐합이 논의되던 1980년대에는 사표를

먼저 받더라고요. 그걸 수리하면 끝인 거죠. 저는

서너 번쯤 사표를 반려 받았습니다. 풍파도 없지 않았지만

 KBS를 다니면서 먹고 살았고 아이들도 키웠고 이제껏 제가

살아올 수 있었잖아요. 지금도 KBS와 한국방송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뿐입니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제가 춘하추동방송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들락거리면서 기사를 읽고,   연세가 높으신

분이 이렇게 훌륭한 블로그를 운영하시는데 감동도하고
열심히 읽고 했는데, 이렇게 줄기를 잡아서 사실들을 엮어놓으니,

처음 읽고 지나간 것들까지 다시한번 더 읽어서인지 다시 기억 나는

 것도 많습니다. 세상을 뜨신 분들도 많고, 또 이제 연로하셔서 함께했던

 이들을 안타깝게 하시는 분들도 많으니, 그분들이 연로하여 시대를 미처

 쫓지 못하셔서개인 블로그를 가지신 분들도 많지 않으니, 정말 그분들

 사후에도 춘하추동방송을 찾으시는 분들이 꾸준히 수를 더해

가리라는 생각입니다.국장님이 몸담고 계셨던 KBS를

위해 도움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시겠다는 말씀이

 블로그를 찾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큰

귀감이 될 말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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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방송역사 2, 이장춘과 방송


춘하추동방송역사 3. 이장춘과 한국방송공사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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