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춘하추동방송역사 2, 이장춘과 방송

이장춘 2016. 5. 24. 01:53

 

 

방송역사와 춘하추동방송!

이장춘의 춘하추동방송역사는 이장춘이

 36년간에 걸쳐 방송국에 재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장춘은 방송국에서 이례적으로 여러 업무를

담당했고 1973년 KBS 공사창립 기초작업을 수행했다.  새로

발족한   KBS 공사 직제에 따라 기획관리실 관리부 차장을 역임

하면서 공사창립의 틀을 확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었다. KBS 재직 중 

1983년 문공회가 창립될 때 창립회원이 되었으며 방송국 퇴직후

 KBS 사우회 부회장, 감사 등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원로방송인 모임 사단법인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이사로 재직 중이다.


오랜 세월의 방송국 생활, 또 방송인들의

 만남을 통한 체험과 성원을 바탕으로 춘하추동

방송역사를 쓰기 시작한지 1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2015년은  춘하추동방송 10년이 되는 해로 이를 계기로

 여러 차례의 방송인터뷰와 KBS사우회, 한국아나운서클럽

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춘하추동방송에 관한 내용이

 알려졌고 춘하추동방송에 그 글들을 올렸다.


5차례에 걸쳐 연재되고 있는 내용은

 2015년 12월 30일에 발행된 공영방송 제5호

김동식의 마이크를 끄고」라는 카테고리의 152페이지

 부터 185 페이지 까지 34페이지에 해당하는 글이다. 이 글을

쓰기위해 인하대학교 김동식 교수가 공영방송 편집위원 한양대

 특임교수 표정훈 교수와 공영방송 간사 김종화님이 배석한 가운데

   2015년 11월 16일 오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4시간 반에 걸쳐

  이장춘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오늘 두 번째 글은

 이장춘의 어린시절 그리고 방송과 이장춘의

얘기다. 사진은 이장춘이 넣었다.



중앙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방송하는 최광석 선생님과 이장춘, 기술 이석대 1970년



춘하추동방송 역사 2, 방송과 이장춘



1. 아나운서와 이장춘



이장춘 : 제가 방송 엔지니어들과도

 잘 알고 지내지만,   아나운서들의 모임인

아나운서클럽과도 친분이 많아요. 임택근 씨

 덕분에  제 블로그가   많이 알려지기도 했죠.

검색창에 ‘임택근 1977’이라고 쳐보세요.


김동식 :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퀴즈열차’군요.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가수 임재범과 배우 손지창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1961년 12월 31일

서울TV방송국 개국 방송의 아나운서가

 바로 임택근 씨였지요.




1961년 12월 31일 KBS-TV개국 실황중계방송



이장춘 : 제가 블로그에 음성 파일도

 올리고 동영상도 구해 놓고 하니까 사람들이

재미있어 해요. ‘퀴즈열차’의 임택근 씨 목소리는

 KBS에서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임택근 씨는 뉴스,

스포츠, 오락, MC 등을   다 잘하는 만능이었어요.

양반의 말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했냐면, 차를 타고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면서도 간판을 다 읽는

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였어요.



자동차 위에서 중계송하는 임택근 아나운서



제가 1963년에 서울국제방송국에

 입사했을 때 임택근 씨는 아나운서 실장

이었어요. 1964년 4월에 MBC로 간다면

 각 방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더군요.


그 당시 MBC는 설립자 김지태 씨가

구속되고 주인이 바뀌면서     큰 어려움을

 꼈었어요. 그래서 임택근 씨를 데려갔고, 사람들이

 MBC를 많이 들었고, 그 덕분에 어렵던 MBC가 살았죠.

 그리고 그 시절에는 동아방송(1963년 개국)이 생겨서, 서울

경기도를 대상으로 방송을 했어요. 전영우 아나운서의 뉴스와

 ‘유쾌한 응접실’ 등 공개방송이 아주 유명했지요. 또한 임택근이

 떠난 KBS는 이광재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 시절 MBC

임택근과 KBS 이광재의 불꽃 튀는 경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광재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알아 주었지요.

이광재씨가 스포츠 중계할 때면 라디오점이나

다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죠.(웃음)



2. 서울국제방송국에 대한 기억들





김동식 : 노정팔 선생의 한국방송과

 50년」(1995)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이장춘 씨는 65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국제국에

배치되었다. PD가 낯선 일이라 처음에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날이 갈수록 깊이 빠져들어 갔다. 그 후 방송공사가 된 후에도

사회교육국에 오래 근무했으나 본래의 전공인 행정직을 살리기 위해

 기획관리실 관리부 차장으로 변신했다.   그 후 업무국 중앙출장소장

 등을 거쳐 관재부장, 관재국장을 지내다가 지금은 공사의 수입을

 전담하는 업무국장의 중책을 맡고 있다.”(613면) 선생님께서

 1963년에 서울국제방송국에 입사하셨으니까

대목은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장춘 : 노정팔 선생님의 책중 저에

 관한 부분은,     많은 분들의 얘기를 선생님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쓰시다 보니 다소 착오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공사가 될 때 공사 창립 실무

작업을 수행했고 공사가 발족된 후 새로운 직제에

 따라 기획관리실 관리부 차장을 했습니다.


김동식 : 1941년 순창 복흥에서

태어나셨지요. 유년시절의 고향에

 대한 말씀을 청해 듣고 싶습니다.


이장춘 : 제 고향은 아주 산골짜기입니다.

노령산맥 가운데 내장사 절벽 있는 곳이 바로

리집이라고 말하곤 합니다.(웃음) 1950년대 중반까지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버스도 안 다녔어요. 장작

 싣고 다니는 트럭 꼭대기에 타고 다니거나 걸어서 학교를 다녔죠.

시골 사람들이 다들 어려울 때였지만 저희 집도 힘들고 어려웠어요.

  우리가족이     6.25 때 소 한 마리 끌고 피난가서 그것을 판 돈으로

먹고 살다가 다시 옛집에 와보니 살던 집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다른 사람이 짛어 놓은 방 한칸 흙집을 사서 살고

조금 남은 돈으로 길거리에 사과상자 엎어놓고

그 위에 소금이나 과자 몇 개 올려놓고

 파는 장사를 했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그 상황을

상상 할 수 없을거에요. 그래도 저희는

 소 한 마리 밑천이 있어서 좀 낳았지요. 몇 년

그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면서 쌀장사를 시작했는데

 제가 많이 도와드렸어요. 리어카 끌고 지게 지고 인생에

안 해본 게 없어요. 그랬으니 공부인들 제대로 했겠습니까.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요. 당시 시골에서는 선생님,

공무원이 최고였어요. 5.16 이후에 공무원 시험이

생겼고, 아버지가 공무원 시험을 권유하셨죠.


새벽에 광주까지 걸어가서 시험을 보고,

합격 통보 받고 보니   국제방송발령이

났더군요.   난생 처음 서울에 왔는데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왼편에 사회생활 교과서에서 사진

으로 본 중앙청이 나와요. 여기 내려달라고 했지.

공보부 인사계에서 발령장을 받고 HLKA라고

 적힌 차를 타고 국제방송국으로 갔어요.

그날 국제방송국장이시던정팔

선생을 처음 뵈었죠.


김동식 : 평생을 방송국에서 

일 하셨고 지금은 방송의 역사를

정리하고 계신데요. 처음으로 방송을

 접했던 때가 기억나시는지요.


이장춘 : 1960년대가 되면서

스피커가 시골마을에도 보급됐어요. 집이

 면사무소 옆에 있었기 때문에 스피커로 나

 방송을 들었고 재미있어 했지요. 하지만 많이 듣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공부를 했으니

까요. 아버지도 그러한 점을 눈여겨보고

공무원 시험을 권했던 것 같아요.


김동식 : 국제방송국에 대해 말씀을

청해 듣고 싶습니다. 저는 전공이 한국문학

이어서 방송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 소속되어 중앙방송국이 운영

되었지요.   조선방송협회가 있었지만 여기에는 기술자만

 근무했습니다. 2원 구조로 이상한 방송운용형태였지요. 그러

다가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10월부터 국영방송이 시작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중앙방송국이 유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에 임시 중앙

방송국이 있었지요.   그때는 공보처

 중앙방송국이라고 했습니다.


이장춘 : 서울중앙방송국에는

 제1방송과와 제2방송과가 있었어요.

1과는 국내방송을 맡았고, 2과는 해외방송과

대북방송을 했지요. 서울중앙방송국은 정동에

있었는데 1957년에 방송1과는 남산으로

 옮기고 방송2과는 정동에 남아

있었어요.


5.16 이후 서울중앙방송 2과가

담당하던 해외방송과 대북방송을 모체로

1961년 7월 1일자로 국제방송국이 설립되었습니다.

 1963년에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방송인력이 그쪽으로 많이

옮겼어요. 그래서 제가 국제방송으로 발령이 난 거죠. 저는 방송국에

들어간 날부터 방송을 했어요. 방송인력이 부족하니까 프로듀서는 방송에

 바로 투입됐죠.(웃음) 1961년 12월 31일 서울TV방송이 방송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서울중앙방송, 서울국제방송, 서울TV방송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개의 방송국이 1968년 7월

 25일에 중앙방송국으로 통합되죠.


김동식 : 방송을 하면서 방송을

배우는 시절이었군요.(웃음) 일반적으로

 6.25휴전시  까지의 정동(貞洞) 시대,  휴전

이후의 남산 시대, 1973년 공사 창립 이후의

 여의도 시대로 보곤 하는데요. 남산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던 그 무렵이군요. 


이장춘 : 가끔 사람들이 언제부터

 KBS였는지 제게 묻고는 합니다. 1973년

 공사가 된 때부터냐, 공사 이전에는 어떤 명칭

이었냐 등등. 해방 직후 ‘서울라디오스테이션’이라고

문재안 선생이 현판을 써서 걸었는데요. 1945년 9월 9일

부터 KBS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KBS라는 명칭은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잘 못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후배들

에게도 늘 그 얘기를 해 줍니다.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KBS라는 영어 약자는 해방후 오늘

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요.


김동식 :   말씀을 들으니

초기의   한국방송사의 맥락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국제방송국 입사

이후에 춘천에서 근무하게 되시죠?


이장춘 : 서울국제방송국에서

 1년 정도 있다가 춘천으로 갔어요. 그곳에

 가니 제가 직제에도 없는 편성장이에요.(웃음)

 아나운서 3명, 프로듀서 1명, 보조원 1명, 기자 2명,

행정 1명 엔지니어 기술과장 포함 5명 운전원 1명, 청부 1명

급사 1명 이게 방송국 직원 전부여요. 음악 프로그램의 경우

 대부분 아나운서가 맞고,      그 밖의 프로그램은 프로듀서가

보조원 한명과 함께 다 해내야 했어요. 기획, 편성, 연사섭외,

현장녹음 따고 편집하고 원고 쓰고 나레이션 넣고.

그 시절에는 한 명의 피디가 보조원 한 사람

 대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공개방송, 녹음구성, 드라마

 연출 제작 다큐멘터리구성 등을 다 했지요.

바쁠 때는 기자도 했고, 선거방송을 4번 했는데 이거

보통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당시 춘천의

전화번호 2천개를 외울 정도였어요.(웃음) 3년 있는 동안

잠 잘 시간도 없으니 연애할 시간도 없었어요. 집에서

 결혼하라고 재촉 하길래 어머니가 골라 주십시오.

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사람이

지금 집사람이에요.(웃음)


김동식 : 「춘하추동방송」의

편집 기술은 그 시기의 혹독한 훈련에

 의해 마련된 것이네요.(웃음) 1967년 서울로

복귀하셔서 대북방송을 담당하셨지요. 블로그를

보니 당시 방송국은 자정이 넘어가면 대북방송

으로 전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이장춘 : 대북방송은 기획, 편성,

그리고 몇 개의 프로그램을 맡아 제작

했습니다. 당시에 북한에서 귀순하거나 자수한

사람이 있으면 방송 쪽에서는 제가 가장 먼저 면담을

 했습니다. 귀순이나 자수의 경우에는 대방동 공군본부 옆의

콘센트에 수용되어 있었고,    전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로

대전형무소에 있었는데요. 그곳에 가서 면담을 했죠. 한번은 아주

혼난 적이 있었어요. 1969년의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아시죠?

프로그램을 만들면 보름 정도는 재방송이 나갑니다.


지역출장을 갔는데 이수근 대상

프로그램이 위장간첩으로 밝혀진 뒤에도

재방송으로 나간 겁니다. 국무회의에서도 이 일이

거론됐고, 저를 파면하라는 홍종철 장관의 지시가 내려

왔다는 겁니다. 그래도 제가 신임을 얻었는지 위아래에서

 안 된다고 이야기들을 해줘서 살아남았죠. (웃음)


김동식 : 최근에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선생님과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당시의 대북방송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이장춘 : 「자유통신」과

 「두고 온 형제에게」라는 프로그램인데요.

 「자유통신」은 우리나라에 대한 소식이나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5분 정도    다루었습니다.    「두고 온

형제에게」는 자수 또는 귀순한 사람들이 북한의 간부나 요

직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었어요 . 월북 작곡가

이면상,   작사가 조명암과 같은 사람들을 편지 내용에 올려요.

일제 때 이랬고 북한에서 이랬다는 내용이었죠. 국제방송국에서는

 「논설」을 내보냈는데, 라면글씨로 유명했던 방필주 씨가 원고를

쓰고, 강찬선 씨가 낭독을 했습니다. 「논설」 프로그램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시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듣는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밖에 「자유의 등대」,

「부엉새」, 「자유 아시아의 소리」

등이 있었어요. 「자유 아시아의 소리」

45분인데 이 프로그램은 통일교에서 돈을

 댔어요. 정일권 씨, 양유찬 씨 등을 통해서

 통일교가 힘이 있던 시대였죠.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춘하추동방송의 주인이신
국장님의 구술 자서전을 보는 것 같습

니다. 국장님 어머님께서 며느님을 잘 택해

주셨으니, 국장님과 자녀들이 다 건강히 훌륭한

사회인으로 자리하고 계심도 국장님과 사모님의

성실과  모범되게 사셨음을  증명한다는 생  각

입니다. 춘하추동방송의 사령탑이신 국장님

 관한 이러한 기사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글


KBS 방송역사의 산 증인,

 발로뛰는 현장기자,이신 이장춘

사장님!파란만장한 방송국생활과 어렸을적

고향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 글을 보니 어쩜

어린 시절 제 고향에서 의 기억이 떠 오릅니다. 이장춘

사장님!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시골 마을에서 중학교를
나왔다니 저와 일맥상통하는 학창시절의 추억도 있습니다.
강진촌놈이 광주까지 진출하여   광주상고 졸업 후, 당시

(1966년도),하이칼라인 은행시험(상업은행)에 실패 후,

 전남 지방공무원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여 면서기,

읍서기, 군직원으로 28년간 강진군청에서

근무 하였습니다.


이장춘 사장님!은 방송인의길을

 저는 공무원의길을 걸어 왔는데, 본업

졸업 후 이장춘 사장님은 옛날 일을 다시 시작

하시고, 저는 또 노래를 좋아하여 엉뚱하게 가수를

하고 있습니다. 고향소식과 방송애환 그리고 선후배

방송인들의 소식 감사합니다.다음 3편이 기

대가 됩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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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KBS한국방송공사가 되던날 대공방송 요원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찾는 사람들) 앞줄 왼쪽부터
 이내수, 이순자, 김용석, 전옥배, 곽영자, 손종만, 송현식,
뒷줄 왼쪽부터 이병웅, 장영오, 이공진, 강정수, 최영춘, 채선경,
이장춘 1972년 사내 체육대회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 앞줄 오른쪽
부터 김기흥, 장민구, 송현식, 지용수, 장영오, 김기찬, 선경,
이내수. 이공진, 곽영자, 강정수, 손종만, 이창훈, 전옥배,
윤진영, 우길명,  대길, 맨 뒷줄 네사람, 오른쪽
부터 김용석, 이장춘, 방필주, 최광일